66화. 빨리 구해주지 못해 미안해.
(66/97)
66화. 빨리 구해주지 못해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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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화. 빨리 구해주지 못해 미안해.
2023.02.15.
‘쾅.’
크게 울리며 열린 문. 그곳에 누가 서 있었다. 나도 모르게 차 있던 눈물에 일그러져 누가 서 있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으악! 너, 뭐야!”
내 위에 있던 김 과장이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에게 밀쳐져 나동그라졌다. 나는 잽싸게 고인 눈물을 훔쳤다. 그제야 나는 그 사람이 누군지 알아볼 수 있었다.
“서, 서준아!”
지서준이었다.
지서준은 지금 미쳤다. 오랫동안 보아온 나는 뒷모습만 보고도 알 수 있었다. 지서준이 엎드려 끙끙대는 김 과장의 멱살을 부여잡고 올려 주먹에 힘을 주고 얼굴을 가격했다.
‘퍽!’
지서준의 주먹이 김 과장의 얼굴을 내려치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그 뒤 들려오는 김 과장의 신음.
나는 벌벌 떨면서 그저 멍하니 지서준을 보았다.
“너. 뭐, 뭐야! 윽!”
주먹 한 방에 나가떨어진 김 과장이 얼굴을 부여잡고 갑작스러운 공격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오, 오지 마. 오지 말라고 이 자식아!”
지서준이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김 과장의 멱살을 잡았다.
“너 뭐……. 억!”
다시 한번 가격당한 김 과장은 쌓아 놓은 비품을 쓰러트리며 바닥에 굴렀다. 고통이 상당한지 이번에는 말도 말하고 웅크리고 신음만 흘려댈 뿐이었다.
“일어나.”
처음으로 말을 뱉은 지서준. 그 목소리로 지서준이 얼마나 화가 나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오한이 들 만큼 낮고 차가운 목소리. 그 목소리에 정신이 바짝 들었다.
“으아아악! 아파! 아프! 악!”
지서준이 일어나지 못하고 버둥거리는 김 과장을 다시 한번 가격했다.
“서, 서준아. 그만해.”
그러나 내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 듯 다시 김 과장을 향해 손이 올라갔다.
“지서준!”
나는 내가 지금 뱉을 수 있는 최대한의 목소리를 끌어올려 지서준을 불렀다. 그제야 멈칫 멈춰선 지서준.
나는 일어나 지서준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주저앉기를 반복했다.
“하지 마. 하지 말라고.”
나는 지서준이 주먹을 움켜쥐고 멈추자 목소리를 쥐어짜듯 말했다. 최대한 침착하게 말하고 싶었지만, 벌벌 떨리는 목소리까지 막을 수 없었다.
“과장님. 문 대리님……. 문 대리님?”
인사팀 막내였다. 목을 쭉 빼고 나를 찾으며 두리번거리던 인사팀의 막내가 우리를 발견했다.
“이게 무슨…….”
인사팀의 막내는 입을 떡 벌린 채 우리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잽싸게 나에게 다가왔다.
“괜찮으세요? 아니, 이게 도대체…….”
막내가 빠른 발걸음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주저앉아 있는 나를 부축하려 하자 지서준이 주먹을 거두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보겠습니다.”
지서준의 살벌한 분위기를 느꼈는지 막내가 고개를 끄덕이곤 주춤주춤 나에게 떨어졌다.
“즈, 새끼……. 경찰 불러. 으……. 경찰!”
지서준이 떨어지자 비척비척 자리에 앉아 피를 닦아내며 나와 지서준을 노려보더니 경찰을 부르라며 소리치기 시작하는 김 과장.
옆에 서 있던 인사팀의 막내가 슬금슬금 그에게 다가갔다. 그러곤 꽤 많이 흘리는 피에 깜짝 놀라 그 사람을 부축했다.
“피, 피가……. 김 과장님 움직이지 마세요. 네?”
“빨리 안 불러!”
악에 받쳐 소리를 지르니 침과 피가 함께 튀어나왔다. 인사팀 막내는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티, 팀장님 모셔 오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곤 잽싸게 달려나가는 막내.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지서준이 본인이 입고 있던 회사 동계 잠바를 벗어 내게 입혀주었다.
“어디, 어디 다친 곳은 없어?”
지서준의 목소리에 무언가 툭 끊어지는 느낌이 들며 눈에 다시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아랫입술을 꼭 깨물며 고개를 저었다.
“깨물지 마. 피나잖아.”
엄지로 턱을 잡아 꽉 깨물고 있던 아랫입술을 빼냈다.
“너희들 내가 모를 줄 알아? 어? 으……. 지서준 너 이 자식. 어디서 폭행을!”
입속이 터졌는지 피를 흘리면서도 계속해서 욕을 섞어가며 나와 지서준에게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김 과장. 그 모습을 노려보던 지서준이 으르렁거리며 다시 일어나려 했다.
“하지 마. 그만해.”
내 울먹이는 소리에 멈춰선 지서준.
“이게 무슨 일입니까!”
인사팀 팀장님과 우리 팀장님이 벌컥 문을 열고 들어왔다. 우리 팀 팀장님은 나와 김 과장, 그리고 지서준을 번갈아 보더니 나에게 곧장 달려왔다.
“괜찮아요?”
“흐흡.”
나는 이제는 멈추지 않는 눈물을 손바닥으로 벅벅 문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무슨…….”
“경찰! 경찰 불러주세요. 팀장님. 네? 저 여기 피 흐르는 거 보이세요? 아……. 입안이 다 터진 것 같아요. 이도 흔들리는 것 같고.”
인사팀 팀장님이 다가가자 더욱 아픈 듯 울먹거리며 본인이 얼마나 피가 나는지 보여주기 급급했다.
“도대체 사람을 이 지경으로!”
“김 팀장! 지금 상황 파악 똑바로 해요!”
인사팀 팀장이 김 과장을 살피더니 지서준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우리 팀 팀장이 벌떡 일어나 인사팀 팀장을 강하게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힘을 주어 말했다.
그제야 지서준의 옷 사이 흐트러진 옷을 부여잡고 훌쩍이는 나를 발견한 인사팀 김 팀장이 고개를 돌려 김 과장을 보았다.
“지금 이게 무슨…….”
“저 여자, 문다율 대리가 먼저 나를 유혹했다고요! 술 취한 나를…….”
“저 새끼가…….”
김형석 과장의 말에 내 어깨를 감싸 쥐고 있던 지서준이 벌떡 일어났다.
“지서준 연구원. 진정해요.”
“지금 진정하게 생겼습니까? 저 새끼가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참아요. 일단 참아요.”
우리 팀의 팀장님과 인사팀 팀장님이 지서준을 붙들고 간신히 말렸다.
얼마나 기세가 대단한지 두 사람이 질질 끌려갈 정도였다. 지서준의 서슬 퍼런 눈빛에 다시 움찔거리던 김 과장이 빠른 몸놀림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술 취해서 제대로 기억은 못 하는데, 내가 미쳤다고 무턱대고 들이덤빕니까? 네? 팀장님.”
“그 입 다물어요!”
지서준을 말리던 인사팀 팀장님이 소리를 질렀다. 그제야 상황 파악이 됐는지 입을 꾹 다물고는 침을 꿀꺽 삼켰다.
“지서준 연구원. 진정하고, 문다율 대리 좀 챙겨요. 네?”
우리 팀 팀장님의 말에 그제야 몸에 힘을 풀더니 머리를 마구 헝클이고 소리를 지르는 지서준. 팀장님들의 손을 뿌리치고 뒷모습을 보이며 한참을 씩씩거리며 숨을 몰아쉬던 지서준이 뒤를 돌아 나에게 다가왔다.
“일단, 다율이 데리고 잠깐 진정하고 오겠습니다. 저 새끼 잡아두고 계세요.”
김형석 과장을 노려보던 지서준이 내게 걸어와 나를 품에 안고 일어났다.
“나 걸어갈 수 있어.”
“알아. 내가 안아서 가고 싶어서 그래.”
그렇게 지서준이 나를 안고 그 끔찍한 곳을 나왔다. 다행인지, 지서준이 나를 안고 가는 내내 복도에서 사람의 그림자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렇게 건물 밖으로 빠져나와 환한 가로등 아래 벤치에 나를 내려놓았다.
“어디……. 어디 다친 곳은 없어?”
“우으응. 없어.”
나는 계속 울어 꽉 막힌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다친 곳이 없다고 했는데도 이곳저곳 꼼꼼하게 내 몸을 살피던 지서준이 내 팔목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내 손목은 붉게 물들다 못해 조금씩 퍼렇게 변하고 있었다.
“괜찮아. 정말이야. 이제 정말 괜찮아.”
나는 주먹을 꼭 쥐고 있는 지서준의 손을 잡았다. 그제야 손에 힘을 풀고 나의 손을 꼭 잡아주는 지서준.
“미안해.”
갑자기 미안하다는 지서준의 말에 잔뜩 부어버린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뭐가 미안해.”
“더 빨리 못 구해줘서.”
“그것보다 어떻게 빨리 구해줘.”
지루한 자리에서 겨우 껴 있던 지서준이 내가 김형석 과장이랑 어딘가로 가는 모습을 보고 이상함을 느꼈단다. 잔뜩 취해 보이는 김 과장을 보고 따라나선 것이라고…….
“더 빨리 쫓아갔어야 했는데.”
후회가 가득한 눈. 나는 그런 지서준의 얼굴을 붙잡아 눈가를 쓸었다.
“안 추워? 옷도 나한테 주고.”
입김이 나오는 날씨였다. 그런 날씨에 얇은 맨투맨 한 장만 입고 있는 지서준을 보니 걱정이 밀려왔다.
“지금 내 걱정이 돼?”
나를 보고 어처구니없다는 듯 바라보는 지서준. 그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이 사람과 있으면 안전하다. 그런 느낌이 들면서 저절로 웃음이 배어 나왔다.
“응. 걱정돼. 내가 이 지경이어도 네가 추울까 봐, 그래서 감기라도 걸릴까 봐 걱정돼.”
내 말에 나를 꼭 끌어안는 지서준.
“큼. 흠.”
누군가 헛기침을 하며 본인의 존재를 알렸다.
“팀장님.”
우리 팀 팀장님이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약 좀 가지고 나왔어요. 문대리 많이 놀랐을까 봐.”
“네. 감사합니다.”
지서준이 팀장님이 건넨 약을 받아서 들고는 물의 뚜껑을 열었다.
“‘아’ 해.”
“그냥 줘.”
“빨리 ‘아’ 해.”
이놈이 옆에 팀장님도 계시는데 부끄럽게.
“문 대리 빨리 입 벌려줘요. 내가 다 민망하네.”
나는 팀장님의 말에 민망해져 지서준에게 눈을 흘기며 입을 벌렸다. 입을 벌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약을 넣고는 물을 입에 가져다 댔다.
내가 약을 삼키는 걸 옆에서 지켜본 팀장님이 주저하다 입을 열었다.
“안에서 무슨 일이 있던 건지, 이야기해 줄 수 있어요?”
“지금요?”
좀 전에 있었던 일이 다시 화두에 오르자 다시 날카롭게 가시를 세우는 지서준. 팀장님은 머리가 아픈 듯 머리를 움켜쥐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안에서 김 과장이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어요. 자세히 기억이 안 난다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지서준 연구원이 본인을 구타하고 있었다고……. 정신을 차리니 본인이 꼭 성범죄자처럼 몰리는 것 같은데, 오해가 있는 것 같다고요.”
“오해요?”
나는 김 과장의 주장에 너무 황당했다. 환멸까지 느껴졌다.
“저는…….”
나는 상황을 설명하려다 선명하게 떠오르는 기억에 오한이 들었다. 내가 주저하자 내 등을 토닥이며 당장 말하지 않아도 된다는 지서준. 나는 그를 보며 고개를 젓고 숨을 크게 쉬고 내뱉었다.
“잠깐 쉬고 있었는데, 맥주가 필요하다고, 같이 가지러 가자고 하셨어요. 그리고 따라 비품 모아둔 홀로 들어갔는데, 갑자기…….”
“괜찮아요. 더는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무리하지 마요.”
나는 팀장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그 자식 어디 있습니까.”
“진정해요. 지금은 의무실에 있어요. 지서준 연구원, 얼굴은 곱디고운데 주먹은 안 그런가 봐요? 입안이 다 터지고 이가 빠졌어요. 본인은 잘못 없다고 경찰 부르겠다고 고집을 부리고 있어요.”
팔짱을 끼고 잠깐 고민에 빠진 팀장님. 그러곤 무언가 결심한 듯 나와 지서준을 보았다.
“우리. 용기를 내 봅시다.”
김 과장과 인사팀 팀장님이 있는 의무실로 향하는 길. 팀장님과 지서준, 그리고 나는 비장한 표정으로 문 앞에 섰다.
“알았죠? 지서준 연구원은 무조건! 무조건 릴렉스에요. 폭력은 절대 네버!”
“……네.”
“지금 대답 늦은 거 알죠?”
“명심할게요.”
몇 번이고 지서준을 향해 경고를 날린 팀장님이 의무실 문을 열었다.
팀장님, 그리고 지서준의 뒤를 쫓아 들어가니 얼굴이 엉망진창으로 변한 김 과장이 의무실 침대에 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