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7화. 개차반. (67/97)


67화. 개차반.
2023.02.19.



 
개차반.

사전적 뜻은, 언행이 몹시 더러운 사람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라 적혀 있다.

한마디로 김 과장은 지금 모든 것이 개차반이었다. 얼굴도. 언행도.

곤죽이 된 얼굴로 침을 튀겨가며 본인의 무죄를 주장하던 김형석 과장이 지서준을 보더니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그러더니, 나와 지서준이 꼭 붙잡고 있는 손을 보고는 덜덜 떨리는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팀장님. 보이시죠? 저 두 사람. 그렇고 그런 사이 같은데, 둘이 짜고 나를 골탕 먹이려는 거라니까요?”

“이봐. 김 과장. 지금 김 과장 말대로라면, 두 사람이 연인 사이라는 건데, 그럼 문다율 과장이 왜 김 과장을 유혹했겠어. 어?”

“그, 그건…….”

잠깐 말문이 막혔는지 불어 터진 입술을 벙긋거리던 김 과장이 나를 보더니, 고개를 홱 돌렸다.


“기억이 안 나요. 술에 많이 취해 있었다니까요. 팀장님.”

블랙아웃을 주장하는 김 과장. 말도 안 되는 소리만 지껄이는 김 과장의 말에 지서준과 맞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대체 얼마나 마신 거야. 얼마나 마셨길래 이런 실수를…….”

“실수요?”

나는 인사팀 팀장을 향해 물었다. 조용히 있던 내가 말하자 흠칫 놀라며 팔짱을 풀고는 나를 보던 인사팀 팀장.


“아. 그건.”

“지금 김 팀장이야말로 실수한 거야. 지금 누가 봐도 김 과장이 성추행한 것 같은데, 그게 실수라니. 어?”

우리 팀 팀장이 앞으로 나서며 말하자 인사팀 팀장이 본인의 단어 선택에 대해 사과했다.


“지금, 김 과장이 술 취해서 기억 안 난다고는 하지만, 지금 이거 아주 큰 문제인 거 아시죠?”

“네? 저는…….”

김 과장이 억울한 듯 입을 열었지만, 우리 팀 팀장님이 곧바로 김형석 과장의 입을 막아버렸다.


“저희 팀에서는 사내 성추행 매뉴얼에 따라 일을 마무리 지을 겁니다.”

“네? 그게 무슨! 저는 피해자라고요!”

“어이. 한 팀장. 진정하고…….”

인사팀 김 팀장과 김 과장이 우리 팀 팀장님에게 한마디씩 했지만, 전혀 동요 없이 제 할 말을 이어갔다.

그러자 흥분한 김형석 과장이 나와 지서준 그리고 팀장님을 향해 마구 소리치기 시작했다.


“지금 본인 팀의 팀원이라고 감싸는 겁니까? 한 팀장님은 게시판도 안 봤어요? 남자 후리고 다니는 여자라잖아. 네?”

“지금 뚫린 입이라고!”

“아, 안 돼. 서준아!”

나는 아까부터 숨까지 참아가며 화를 삭이고 있는 지서준이 또다시 발끈하자 팔에 매달려 그를 말렸다.

내가 말리자 우뚝 멈춰 서고는 김 과장을 죽일 듯 노려봤다. 본인이 또 다른 위기가 있었던 것도 모르고 김형석 과장은 계속해서 뱀 같은 혀를 놀렸다.


“아까, 정찬형 연구원이랑 우연히 술자리를 같이했는데, 전혀 그런 사이 아니더랍니다.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둘이 밥 먹고, 붙어 다닌 거야? 어?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체육대회 할 때도, 저 둘이 범상치 않던데!”

나는 온몸에 피가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체육대회 날.

술에 얼큰하게 취해 화장실에 갔을 때, 누군가 뒤쫓아왔던 기억이 스치고 지나갔다. 여자 실루엣이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그때는 술에 취해 잘못 안거라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는데…….

그 사람이 김형석 과장이라고 생각하자 발끝에서부터 소름이 돋아났다.


“그러고 나서 정찬형 연구원이랑 사귄다고 익명 게시판에 딱 올라오는 거 보고, 내가 저 여자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사내행사에서 남자친구랑 둘이 몰래 붙어 다니고, 또 다른 남자한테도 은근히 꼬리 치고, 어? 그래. 그러니까 술 취한 사람을 유혹해놓고 피해자인 척하는 거 아닙니까!”

여전히 본인이 피해자임을 강조하는 김형석. 그 사람이 피를 튀기며 본인의 무죄를 주장할수록 내 머리가 차갑게 식어갔다.

여전히 내 손을 꽉 잡은 지서준의 따뜻한 손에 공포심은 얼음 녹듯 녹아내렸다. 공포가 사라지자 구석에 웅크려 있던 이성이 다시 제 자리를 찾았다.


“지금, 체육대회 날 저를 스토킹했다고 하시는 거예요?”

내가 말하자 역시나 김형석 과장이 펄쩍 뛰었다.


“스, 스토킹? 누가? 어? 그냥, 어쩌다 우연히 발견했다니까?”

똑똑.

김형석 과장이 발작하듯 난리를 피울 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저…….”

문이 빼꼼히 열리고 고개를 집어넣은 사람은 인사팀의 막내였다.


“지금, 팀장님 찾으시는 분이 있는데요?”

“누가?”

잔뜩 예민해져 있는 인사팀 김 팀장님이 날카롭게 묻자 인사팀 막내가 몸을 흠칫 떨었다.


“연구팀 쪽에서 팀장님을 찾으세요.”

“급한 일이래?”

“그런 것 같은데요.”

“하필 이럴 때……. 잠깐 다녀올게요.”

인사팀 팀장님이 막내와 함께 의무실에서 나간 후. 잠깐의 침묵이 돌았다.

나는 어떻게 이 사람에게 잘못을 인정하게 할까. 아니, 저 사람이 본인이 지금 뭘 잘 못 했는지는 아는 걸까. 이런저런 생각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돌아다녔다.

순간, 나는 지서준의 눈빛이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계속해서 똑같은 말만 반복하는데, 이렇게 힘 빠지게 실랑이하지 말고 그냥 확인하죠.”

“그게 무슨 말이에요? 지서준 연구원.”

싫어도 너무 싫다. 그런 표정을 숨기지 않고 김형석 과장을 보던 우리 팀 팀장님이 지서준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생각해보니, 이렇게 큰 연수원에서 보안을 허투루 할 일도 없고, 그리고 아까 그 홀. 거기도 꽤 큰 홀이던데, CCTV가 없을 리가 없잖아요.”

사악하다.

사악하다 못해, 무섭기까지 한 지서준의 표정에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곳에 CCTV가 있었던가? 그렇다면 이렇게 저 인간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더는 듣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그래요. 그러면 되겠네요.”

왜 그 생각은 하지 못했던 걸까. 내 얼굴에 금방 화색이 돌았다. 그와 반대로 엉망진창의 김형석 과장 얼굴은 피가 쭉 빠진 얼굴이 되었다.


“CCTV? 그걸 왜 확인합니까.”

눈에 띄게 작아진 목소리.


“왜. 걱정되나? 거짓말한 게 들통날까 봐?”

“그, 그게 무슨.”

“당신이 말한 대로 경찰 부르자고. 경찰 불러서 CCTV 확인하고 법적 절차 밟아 보자고. 나한테 맞은 게 정 억울하고 분하면 그렇게 하면 간단하지 않나?”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 빙글빙글 웃어가며 말하는 지서준은 흡사 악마의 모습과 같았다. 하지만 우리 팀 팀장님은 깊게 생각에 잠긴 모습이었다.


“팀장님?”

내가 팀장님을 부르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럽시다. 인사팀 김 팀장이 오면 경찰 부르고 바로 CCTV 확인합시다. 그러기에 먼저. 앞으로 경찰 조사도 있고 하니, 우리 대화는 모두 녹음하기로 하죠.”

핸드폰을 들고는 녹음기를 틀기 시작했다.


“지금 누구 허락받고 녹음하는 겁니까?”

“아까부터 경찰 찾는 사람이 누구죠? 정말로 억울하면 이런 녹음쯤이야 별거 아니지 않나?”

“문문. 힘들겠지만, 아까 어떤 상황인지 천천히 말해봐.”

좀 전에는 힘들면 말하지 말라는 지서준이 내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인사팀 팀장이 나가자마자 김형석을 구석으로 몰아 자멸을 하도록 유인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김형석은 그렇게 자멸했다.

**

김형석 과장은 지서준과 팀장님이 몰아가자 술기운에 그랬노라 말했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본인은 내가 여기저기 흘리고 다니는 것처럼 말했다. 소문처럼 문란한 여자인 줄 알았다고 끝까지 내 마음을 후벼팠다.

녹음본을 들은 인사팀 팀장은 김 과장에게 큰소리를 치기 시작했고, 나는 팀장님의 권유로 잠시 복도에 나와 있었다.

큰 소리가 오가고, 잠깐 들어와 보라는 말에 들어가니 김 과장이 무릎을 꿇고 빌기 시작했다.


“내가 미안해, 문 대리.”

갑자기 변한 태도에 다른 시커먼 꿍꿍이가 있는 것은 아닐까 의심했다. 그러나 김 과장은 무언가 두려운지 벌벌 떨고 있었다.


“내가 술에 취해서 미쳤었나 봐. 다시는,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거야. 어? 문 대리 근처에 얼씬거리지도 않을게!”

무슨 이야기가 오갔던 것일까.

오늘은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말에 회사에 복귀해서 이야기해 보자고 한 뒤 우리는 의무실을 빠져나왔다.


“저랑 다율이는 먼저 서울로 올라가 보겠습니다.”

“그래요. 내일 푹 쉬고 월요일에 봐요. 문 대리.”

“네. 팀장님. 오늘 감사했습니다.”

“감사할 일도 많다. 내 팀 내가 챙기지, 누가 챙기나. 많이 놀랐을 텐데, 푹 쉬어요. 나머지 일은 서울에 가서 곰곰이 생각해보고 결정합시다.”

결론은 경찰은 부르지 않기로 했다.

뒤늦게 나온 김 과장이 쩔뚝거리며 걸어갔다. 지서준에게 맞아 퉁퉁 부어 피 엉겨 붙은 얼굴로 본인의 방에 돌아가는 김 과장을 보고 깜짝 놀라는 다른 사원들.


“짐 어디 있어?”

“방에.”

“같이 가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내 손을 꼭 잡아주고 있는 지서준. 나는 지서준의 커다란 옷을 턱 끝까지 올려 입고 뒤뚱뒤뚱 걸어갔다.


“어? 문 대리님?”

짐을 챙겨 지서준과 함께 택시가 기다리는 정문까지 가려는데 중간에 백인하 씨를 만났다. 그녀 뒤에 다른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중 유나라 씨도 있었다.


“왜 전화를 안 받으세요. 그런데…….”

그제야 핸드폰을 확인하니 백인하 씨로부터 몇 통의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아. 미안해요. 내가 일이 좀 있어서……. 걱정했어요?”

백인하 씨는 답이 없었다. 그녀는 그저 나와 지서준이 잡은 손을 뚫어지게 바라볼 뿐이었다.

수군수군.

나와 지서준을 보며 백인하 씨 뒤에 있던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유나라 씨는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 나와 지서준을 번갈아 바라봤다.


“어디…… 가세요?”

백인하 씨가 물었다.


“네. 다율이가 많이 아파서요. 지금 같이 서울 올라갑니다. 팀장님께는 말씀드렸으니 저희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지서준이 나 대신 대답했다. 지서준의 말에 갑자기 앞으로 튀어나온 유나라 씨.


“왜 지서준 연구원님이 같이 가세요? 굳이 지금, 이 시각에 서울까지요? 단둘이?”

많이 혼란스러운 듯한 유나라 씨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울음기도 섞여 있었다.


“여자친구가 아프다는데, 남자친구가 같이 가는 게 뭐가 이상한 거죠?”

 

 
지서준의 말에 유나라 씨의 눈이 커졌다.


“가자.”

나를 잡아끄는 지서준.


“인하 씨. 서울에서 봐요.”

여전히 나와 지서준이 잡은 손에서 시선을 거두지 못하는 인하 씨에게 인사를 남기고 그 자리를 떠났다.

택시를 타고 서울로 올라오는 길. 서울의 밤과는 다르게 캄캄하기만 한 창밖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거기에 CCTV 없었으면 어쩔 뻔했어. 천만다행이다.”

“응? 아……. CCTV.”

내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잠깐 생각에 잠긴 지서준이 내 머리를 살짝 눌러 제 어깨 위에 기대게 했다.


“거기 CCTV 없어.”

“뭐?”

나는 지서준의 말에 고개를 들어 지서준을 보았다.


“그런 곳까지 CCTV를 설치하는 곳이 많지 않지.”

“그, 그럼…….”

“거짓말 좀 했어.”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이 태연하게 말하는 지서준.


“바보 같은 놈이 그런 것까지 생각할 수 없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시작한 말인데, 한 팀장님이 내 의도를 알아차리시곤 바로 옆에서 거들어주신 거고.”

“말도 안 돼.”

나는 생각지도 못한 말에 중얼거렸다. 그러자 다시 내 머리를 끌어당겨 제 어깨에 기대게 하더니 허벅지를 토닥였다.


“이제, 가만히 안 있을 거야. 제일 앞에 서서 너를 지켜줄 거야. 그러니까 내 뒤에 숨어 있어. 넌 그래도 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