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9화. 한태이의 그녀. (69/97)


69화. 한태이의 그녀.
2023.02.26.



 
나는 사내 고충 처리부서에 신고했다. 고충 처리부서에서는, 내가 최대한 피해 보지 않도록 한다고 했지만, 주둥이를 가만히 두지 않았던 김 과장이 문제였다.

내가 기어코 신고하자, 본인이 아는 사람들에게는 죄다 억울하다며 입을 놀리고 다닌 김 과장. 회사에 소문이 나는 건 막을 수 없었다.

그것 때문에 한 가지 좋은 점은, 내가 지서준의 여자친구라는 소문이 조금은 묻혔던 것이랄까.


“헤이. 문 대리. 오랜만입니다.”

지서준과 같이 점심을 먹기로 했다. 만나기로 한 곳에 지서준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서준 뒤에 싱글벙글 웃으며 나에게 인사하는 바이오 제1팀 팀장님. 그리고 이경훈 연구원님, 그리고 막내 장우석 씨가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저는 같이 밥 안 먹습니다.”

상당히 단호하게 말하는 지서준. 그러자 거구의 팀장님이 지서준의 팔을 와락 끌어당겼다.


“내가 회사 카드로 쏩니다! 문대리. 컴온. 같이 갈 거죠?”

내가 끌려가는 지서준을 멍하니 바라보자, 옆에 있던 이경훈 연구원님이 내 등을 밀었다.


“존이 비싼 거 사준대요. 같이 갑시다!”

그렇게 끌려간 곳은 소머리곰탕 집. 무려 3대나 이어오고 있다고 간판에 크게 적혀 있었다.


“여기가 비싼 곳이에요?”

내가 묻자 장우석 씨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곤 수저통에서 숟가락, 젓가락을 꺼내 사람들 앞에 가지런히 놓기 시작했다.


“문 대리. 비싼 거 좋아하면 머리 벗겨져요. 빡빡.”

“‘공짜 좋아하면’입니다.”

옆에서 인상을 찌푸린 지서준이 틀린 문장을 교정했다.

그러자 존 팀장님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핸드폰 메모 앱을 열어 한 글자씩 천천히 입력하기 시작했다.


“팀장님이 계속 문 대리랑 식사하자고 했는데, 지 수석님이 반대했어요.”

“네? 왜요?”

“금쪽같은 내 새끼?”

메모하다 말고 정답을 외치듯 말하는 존 팀장님.


“그건, 부모가 아이한테 하는 말입니다.”

이번에는 깍두기를 먹기 좋게 자르며 장우석 씨가 교정해줬다.


“일할 때도 한국말로 해요?”

“아니요. 일할 때는 영어로 대화해요. 그게 정확성이 더 높죠. 쉴 때는 한국말. 그게 저희 팀 룰입니다.”

“맞아요. 그래야 한국말이 쑥쑥 늘어요.”

존이 방금 나온 공깃밥을 흔들며 말했다.

옆에서 여전히 불만 가득한 표정인 지서준이 내 앞쪽으로 양념들을 늘어놨다.


“천천히 먹어.”

“오. 스윗합니다. Mr. Ji.”

나는 멋쩍게 웃으며 숟가락을 들었다. 생각보다 맛있는 소머리국밥에 눈이 번쩍 뜨였다.


“여기, 팀장님이 엄청 좋아하는 맛집이에요. 맛있죠?”

이경훈 연구원님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모습에 싱긋 웃던 이경훈 연구원님이 지서준 눈치를 슬쩍 보고는 입을 열었다.


“두 분 잘 어울리세요.”

그러자 말없이 국밥을 흡입하던 장우석 씨가 입에 음식을 가득 문 채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리고 무언가 말하려 입을 열려고 하는 찰나.


“씹고! 씹고……. 말하세요.”

지서준의 말에 장우석 씨는 다시 입을 다물고 열심히 저작근을 움직였다. 그러곤 꿀꺽 삼키고 서둘러 말을 뱉었다.


“저는, 지 수석님보다 문다율 대리님이 더 아깝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지 수석님이 성격이…….”

“자! 우리 막내. 먹어. 많이 먹고 눈치 좀 키우자. 어?”

장우석 씨의 입을 막은 것은 이경훈 연구원님이었다. 그 모습이 꼭 고등학생들을 보는 것 같아 절로 웃음이 나왔다.

맛있게 식사하고 회사로 돌아오는 길. 그들이 지서준의 동료라는 사실이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단 한 번도 내게 그 사건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소문이 돌고 내가 가장 많이 들었던 괜찮냐는 말도 없었다. 그것이 가장 좋았다.


“오늘 잘 먹었습니다.”

헤어지기 직전, 존 팀장님에게 인사를 하자 다음에는 정말로 비싼 걸 사주겠다고 약속하곤 쿨하게 자리를 떠났다.


“진짜 좋은 사람들인 것 같아.”

“응. 안 그랬으면 바로 회사 그만뒀을걸.”

“왜?”

“네가 회사에서 나랑 사귀는 거 밝히고 싶지 않아 했으니까. 다른 회사 다니면 떳떳하게 남자친구가 나라고 말할 수 있잖아.”

회사를 옮기고 싶었던 이유가 그거라니.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진짜거든.”

“누가 가짜래?”

가만히 나를 내려다보는 지서준.


“회사에서는 뭐래?”

“응? 잘 모르겠는데 감봉 조치, 회사 내 성희롱 방지 교육, 그리고 다른 곳으로 발령까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래.”

“혹시 말이야…….”

고개를 끄덕이며 잠깐 생각에 잠겼던 지서준이 몇 번 망설이다가 뱉은 말은 조금 의외였다.


“너희 팀에 여자 직원은 너 말고 그 여자 한 명이지?”

“백인하 씨?”

“응……. 그 여직원 어떤 사람이야?”

어떤 사람이냐니. 무슨 의미로 물어보는 걸까. 지서준의 눈빛은 많은 생각이 담겨 있었다.


“말 그대로. 네가 느끼기에 어떤 사람이야?”

“굳이 말하자면, 여동생 같은 느낌? 만약 여동생이 있다면 이런 느낌이 들지 않을까 생각이 드는 사람.”

“여동생?”

내 말에 한쪽 눈썹을 슥 올리고는 높디높은 회사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왜? 백인하 씨에 대해서는 왜 묻는 거야?”

“그냥, 조금 걸리는 부분이 있어서.”

불안한 마음에 지서준에게 묻자 살포시 웃고는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라니. 분명 좋지 않은 부분인 것 같은데, 어떤 부분인지 도저히 내 머리로는 생각할 수 없었다.


“무슨 일인데…….”

“그냥, 그냥 추측이야. 확실치 않아. 그래서 아직은 말 못 해. 나중에 다 말해줄게.”

그러고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저럴 때는 내가 무슨 수를 써도 지서준은 입을 열지 않을 것이다. 남의 험담은 일체 입에 담지도 않는 지서준. 그런 그가 백인하 씨에 관해 물었다. 분명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지서준과 헤어지고 찝찝한 마음에 사무실로 돌아왔다.


“어? 대리님. 이제 식사하고 오세요?”

“네? 아. 네.”

먼저 와있던 백인하 씨가 칫솔을 들고 사무실을 나가다 입구에서 마주쳤다.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토끼 같은 얼굴.


“지서준 연구원님이랑 식사하고 오신 거죠?”

“네.”

“그렇구나. 그럼, 저는 양치하고 올게요.”

의심을 시작한 탓일까. 방금 지서준을 언급하는 그녀의 표정이 내가 평소에 알던 그녀의 표정과 미묘하게 다른 것 같았다.

나를 지나쳐 화장실로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



“그런 미친놈이!”

오랜만에 만난 고주연과 도이라는 내 근황을 듣고는 불같이 화를 내기 시작했다.


“나 같으면 쪽팔려서도 회사 못 다니겠는데, 그놈은 오히려 당당하게 다닌다 이거지? 하긴, 그런 인간이 자기 잘못을 아는 게 더 이상하겠다.”

“그런 인간치고 낯짝 안 두꺼운 인간을 못 봤어. 내가.”

고주연과 도이라는 계속해서 침을 튀겨가며 김 과장에 대해서 욕을 했다. 나는 친구들의 말에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호응했다.


“거기를 확 차주지 그랬어.”

“그럴걸. 지금 엄청 후회 중이야.”

나보다 더 화를 내는 친구들을 보며, 위로를 얻어가는 밤.


“오늘 네 남자친구는 못 온대?”

“응. 요즘 바쁘대.”

“회사에서 너희 사귀는 거 소문났다며. 괜찮아?”

“맞아. 고등학교 때 너랑 지서준, 사귀지도 않는데 그런 소문이 돌아서는 너 고생 많이 했잖아.”

“그때 내가 다 억울했는데…….”

“그때처럼 그렇지 않아. 지금 내가 고등학생도 아니고.”

사실, 별로 친하지도 않았던 사람들이 불쑥 말을 걸어오며 어떻게 사귀게 된 건지, 얼마나 사귀었는지 하는 그런 질문을 하고는 했다. 본인들의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해 예의는 밥 말아 먹은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골치 아픈 일이 있어서 그런지 그런 것들은 그저 얕은 한숨 한 번으로 넘길 수 있었다.


“부모님들도 아셨다며?”

“응. 우리 엄마가 눈치채고 있었어.”

“그래. 너랑 지서준을 제일 잘 아시는 분들인데 모르는 게 이상하지.”

그렇게 소주와 안주가 거의 비워갈 때쯤, 남자친구가 근처까지 데리러 왔다며 고주연이 일어났고, 나와 도이라도 그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뭔 일 있으면 바로 언니한테 전화해라.”

“전화하면?”

“내가 가서 확 엎어버리려니까. 어?”

“말만이라도 고맙네.”

남자친구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면서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몇 번이나 돌아보던 고주연이 사라지고, 나와 도이라는 잠깐 걷기로 했다.


“이제 겨울이네. 겨울이야.”

“응. 20대가 거지 같이 끝나가네.”

“그냥 아홉수 제대로 치렀다고 생각해. 너의 30대는 찬란하게 빛나리.”

마법의 주문을 걸듯 손가락을 튕기는 도이라. 정말로 마법이 걸린 걸까? 또렷해지는 정신에 눈도 맑아졌다.

그렇게 맑아진 눈에 재수 없는 한 인간이 들어왔다.


“한태이?”

“한태이? 한태이가 누구야?”

그리고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한태이 옆에 있는 저 여자는 유나라 씨였다. 두 사람은 어디를 가는지 같이 길을 걷고 있었다.


“유느님이 왜 쟤랑 있지?”

“유느님은 또 뭐야?”

무언가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의 유나라 씨와 그 옆에서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열심히 입을 놀리는 한태이가 보였다.


“도이라. 나 먼저 간다!”

“야! 어디가!”

나는 도이라를 버려두고 그들 가까이 다가갔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내 발걸음은 조심스러워졌다.


“아. 조금만 더 가면 들릴 것 같은데.”

 

 
여전히 열심히 떠들어대는 한태이. 처음과는 많이 누그러진 유나라 씨의 표정이 반드시 저들의 대화를 들으라는 욕구를 부추겼다.


“……했잖아요. 그런데, 두 사람이……. 이제는 정말 끝이라고요.”

“이런, 속이 많이 상했나 보네.”

점점 선명하게 들려오는 대화에 나는 조금 더 바짝 그들에게 다가갔다. 다행히 두 사람은 대화에 집중하고 있어서 그런지 내가 그들을 쫓고 있는 건 눈치채지 못했다.


“내가 보기엔 유…… 씨가 훨…… 잘 어울리는데?”

아무래도 불타는 금요일의 길거리라 인파에 뒤섞인 두 사람의 대화 소리가 뚝뚝 끊겨 들려왔다.


“답답하네. 어디 들어가기라도 해라.”

기적처럼 내 바람은 이뤄졌다. 한태이는 주변을 둘러보다 유나라 씨를 데리고 어딘가로 들어갔다. 시간을 두고 그들을 따라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을 내려가니 꽤 한적해 보이는 바가 나타났다.

혹, 그들이 나를 발견하지는 않을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다행히 그들은 자리 잡고 술을 고르느라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그들의 대화를 엿들을 수 있는 자리로 가 앉았다.


“지서준은 단호하죠.”

갑자기 지서준 이름이 한태이 입에서 나왔다. 나도 모르게 내 얼굴을 가리고 있던 메뉴에 힘이 들어갔다.


“저……. 손님?”

“아. 매, 맥주 주세요.”

“어떤 맥주로 드릴까요?”

아이참. 나는 재빨리 저들의 대화를 들어야 하는데, 유독 친절한 직원이 계속 말을 걸어왔다.


“아무거나, 아무거나 주세요.”

“아……. 네.”

수상한 눈빛으로 나를 보던 직원이 고개를 끄덕이고 내 손에서 메뉴판을 빼앗아 갔다.


“그 두 사람이 사귀는 건 시간문제였을지도 몰라요. 어렸을 때부터 그랬으니까. 문다율 걔가 지서준 일이라면 물불 안 가리고 달려들었거든.”

“하. 그런 건 알고 싶지 않고요.”

“하하. 그래요?”

“한태이 씨가 말한 대로 문다율 대리가 끔찍이도 싫어한다는 소문도 냈다고요. 회사에 그런 소문 내려고 내가 얼마나 머리 썼는지 알아요?”

나는 유나라의 말에 심장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소문이라니. 그리고 소문을 본인이 냈다니…….


“내가 소문내라고 했다니요. 나는 그저 정보만 제공했죠. 아마, 두 사람은 그 소문이 나기 전에 사귀고 있었을지도 모르죠. 내가 아는 문다율은 그런 소문이 퍼지면 몸을 움츠리고 지서준과 거리를 둘 줄 알았는데. 고등학교 때 그런 소문으로 엄청나게 고생했거든요. 문다율이.”

유독 똑똑히 들렸던 한태이의 말. 나는 욕지기를 참으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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