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재밌잖아.
(70/97)
70화. 재밌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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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화. 재밌잖아.
2023.03.01.
미친 한태이.
한태이가 했던 말이 머릿속을 헤집어놨다. 호흡이 가빠지며 손에 땀이 나기 시작했다. 등골이 서늘해지고 목이 뻣뻣해졌다.
“중간에 내가 소문낸 걸 들킬 뻔했다고요.”
“은근히 간이 조그맣네요.”
“허!”
한태이의 말에 코웃음 치더니 양주가 담긴 얼음 컵을 빙글빙글 돌리는 유나라 씨. 그러더니 한태이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두 사람, 헤어지게 하는 방법 없어요?”
이것들이!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맥주를 가져다주려던 친절한 직원이 깜짝 놀라 멈춰 섰다.
“소, 손님?”
친절한 직원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컸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나를 쳐다봤다. 한태이와 유나라 씨 그들도.
“무, 문다율?”
꽤 당황한 두 사람. 한태이는 정말로 본인 눈에 보이는 사람이 내가 맞는지 내 이름을 불렀고, 유나라 씨는 그저 눈만 껌뻑거리며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너희 두 사람. 뭐야?”
내 목소리에 움찔한 유나라 씨가 눈을 굴려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하지만 한태이는 당황한 것도 잠시. 평소와 같은 표정으로 돌아와 나를 빤히 바라봤다.
“오랜만이네?”
“오랜만?”
“설마, 우리 두 사람을 미행한 거야?”
“말 돌리려고 하지 마. 지금 둘이 무슨 수작이야?”
“수작이라니. 말이 너무 거치네.”
느릿한 동작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더니 옆에서 당황해서 어찌할 줄 모르는 유나라 씨를 보더니 싱긋 웃었다.
“우리 술자리는 여기서 그만할까요? 먼저 가 볼래요?”
“네? 아. 그러죠.”
유나라 씨는 한태이의 말에 주섬주섬 가방을 들고 나서려 했다. 나는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어딜 가요.”
“이, 이거 놔요!”
내가 팔을 붙들자, 푸드덕 놀라며 내 팔을 거칠게 쳐냈다. 그때 그녀의 잘 손질된 붉은 손톱이 내 손등을 할퀴고 지나갔다.
“지금, 한태이랑 작당을 해놓고 어딜 가겠다는 거예요?”
“손님. 여기서 그러시면 안 됩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진정하시고요…….”
나는 그녀가 할퀸 손등이 아픈지도 모르고 다시 그녀의 팔을 붙들려 했지만, 분위기가 살벌해지자 직원이 나를 말리기 시작했다. 그 틈에 한태이가 나에게 다가와 나를 붙들었다.
“유나라 씨. 빨리 가세요.”
“야. 이거 놔!”
순간, 지서준의 말이 떠올랐다. 한태이도 남자라고. 마음먹고 힘을 쓰면 너도 당해내기 힘들다고 했던 말.
나는 강한 힘으로 내 팔을 붙잡고 있는 한태이를 죽일 듯 노려봤다. 그런 나를 내려보던 한태이가 피식 웃더니 직원에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뭔가 오해가 있어서요. 계산해 주세요. 지금 나가겠습니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 직원이 서둘러 한태이가 내민 카드를 받아 계산했다. 직원이 내민 카드를 받자 한태이가 나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이거 놔.”
“얌전히 좀 갈 수 없어?”
사람들이 지나가며 나와 한태이를 쳐다봤지만, 그 누구도 말릴 생각이 없는 듯했다. 한적한 골목 뒤편에 있는 작은 근린공원. 한태이가 내 팔을 잡고 있던 손의 힘을 풀었다.
“중학생 때도 그렇고, 힘은 엄청 세네.”
나를 잡고 있던 손목을 휘휘 돌리며 빈정거리는 한태이를 나는 눈에 잔뜩 힘을 주고 노려봤다.
“유나라 씨랑 너랑 뭐야.”
“뭐긴 뭐야. 네가 본 그대로 그냥 아는 사이지.”
“그냥 아는 사이?”
“그래. 뭐 굳이 덧붙이자면 사랑의 큐피드?”
“지금 나랑 농담해?”
내 말에 숨을 크게 내뱉은 한태이가 눈가를 손으로 꾹꾹 눌렀다.
“내가 너랑 무슨 사이라고 농담하겠어? 어?”
능글거리던 한태이가 갑자기 인상을 쓰며 목소리를 낮췄다.
“우연히 유나라 씨랑 알게 됐고, 그러면서 유나라 씨가 지서준이랑 같은 회사에 다니는 것도 알게 됐어. 좋아한다길래 도와주기로 한 게 잘못인가?”
“그럼, 내가 들었던 내용은 뭐야. 소문이라니.”
“아……. 그거?”
다시 빙글빙글 웃으며 나를 내려보더니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그냥 조언하나 했을 뿐인데, 유나라 씨가 그런 일을 벌였더라고? 나는 최근에나 알았지 뭐야.”
나는 모든 책임을 이 자리에 없는 유나라 씨에게 떠미는 것을 보고 이를 악물었다.
“오호. 주먹에 힘 좀 풀지? 왜? 중학교 때처럼 한 대 치기라도 하게?”
내가 꼭 쥔 주먹을 보며 빈정거리며 자신의 볼을 가져다 댔다. 그 모습이 중학교 때 어느 날을 떠올리게 했다.
.
.
.
“여기 한태이라는 애가 누구야?”
학교에서 일찍 끝나자마자 지서준이 다니고 있던 학교로 달려갔다.
내일이면 담임에게 청소도 하지 않고 도망갔다고 혼날지도 모르지만, 그건 지금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버스를 타고 가는 내내 얼마나 주먹을 꽉 쥐고 있었던지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깊게 파여 있었다.
“한태이?”
“그래. 1학년 3반 한태이…….”
그때 누군가가 나에게 다가오더니 손가락으로 어딘갈 가리켰다.
“한태이라면 지금 체육관에 있을 텐데. 거기서 농구 시합하고 있을 거야.”
나는 가르쳐준 이름 모를 아이에게 고맙다 인사한 후 체육관으로 보이는 곳으로 달려갔다.
남자 중학교에 다른 학교 교복을 입은 여자아이가 돌아다니니 모두 하던 일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나는 그저 체육관의 커다란 문만이 보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남자아이들 몇 명이 농구를 하고 있었고, 몇 명은 구경하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나는 크게 심호흡했다.
“한태이!”
내가 목에 핏대를 세우고 부르자 그곳에 있던 남자아이들이 모두 움직임을 멈추고 소리의 근원지를 찾았다. 나를 발견하자 서로를 바라보며 누구냐 물었고, 그곳에 있던 누구도 나를 알지 못한다며 고개를 저었다.
“한태이가 누구냐니까?”
나는 다시 한번 소리쳤다.
그러자, 농구공을 잡고 서 있던 한 남자아이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난데? 넌 누구…….”
그래. 너로구나.
나는 냅다 달려가 어린 한태이를 밀쳤다. 무방비 상태였던 한태이는 체육관 바닥에 속절없이 쓰러졌다.
“너. 뭐야!”
나는 쓰러진 한태이 위로 올라가 멱살을 잡았다.
“장난? 너는 장난일지 몰라도, 당하는 사람은 얼마나 큰 충격일지 생각도 못 해?”
내가 멱살을 잡고 흔들자 주위에 있던 애들이 펄쩍 놀라며 나를 잡으려 다가왔다. 나는 그들의 손을 강하게 뿌리쳤다.
“네가 한 건, 폭력이야. 때리지 않는다고 폭력이 아닌 게 아니라고!”
“뭐라는 거야! 얘 좀 말려봐!”
주위에 있던 아이들에게 소리치는 한태이. 그러자 옆에서 나를 어쩌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했던 아이들이 나를 붙잡고 자리에서 일으켰다.
나는 이거 놓으라며 발버둥을 쳤고, 그러다 내 발이 한태이의 얼굴을 강하게 걷어찼다.
“아악!”
코를 움켜쥐고 옆으로 데굴데굴 구르는 한태이. 그런 한태이를 보고 나를 붙잡고 있던 아이들이 전부 그 자식에게 몰려갔다. 코를 쥐고 있던 손을 떼 나를 노려보는 한태이. 그놈의 코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태, 태이야. 너 코피나!”
누군가의 외침에 손등으로 코를 쓱 문질러 코피를 확인한 한태이가 소리쳤다.
“너, 뭐냐니까!”
“친구인 척, 접근하고 다른 애들 선동해서 사람 괴롭히고! 걔가……. 걔가 얼마나 중학교 올라가서 좋은 친구 사귀었다고 자랑했는지 알아? 네가 아냐고!”
나는 다시 한태이에게 다가가려 막 발을 뗐을 때.
“문다율!”
익숙한 목소리가 체육관에 울려 퍼졌다.
급하게 달려왔는지 무릎을 짚고 숨을 고르고 있는 지서준이 나를 노려봤다. 그러더니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내 손목을 움켜쥐었다.
“여기서 뭐 해.”
“뭐하긴. 쟤가 한태이라며. 내가…….”
“문다율!”
지서준의 다그침에 나는 일시 정지하듯 멈췄다.
아. 큰일이다.
지금 지서준은 엄청 화가 나 있었다. 나는 하려던 말을 멈추고 입을 꾹 다물었다. 여기서 말해봤자 지서준의 화를 돋우는 일이란 걸 알았다.
“뭐야. 지서준, 너, 이 미친 여자애랑 아는 사이야?”
한태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코를 다시 훔치며 지서준이게 물었다.
“지서준 이름 부르지 마.”
나는 지서준 앞을 가로막으며 한태이에게 으르렁거렸다.
“하!”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나와 내 뒤에 있는 지서준을 보고 한숨을 내쉬더니 입을 열었다.
“그날, 그렇게 도망치더니……. 뭐야. 여자친구한테 다 말한 거야?”
한태이가 ‘얼굴값 하네.’라며 중얼거렸다. 그놈의 말에 주위에 있던 아이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입 다물어라.”
나는 한태이를 물어뜯을 듯 앞을 나섰다. 그때, 지서준이 내 팔을 붙잡고 체육관 밖으로 몸을 돌렸다. 강하지 않은 힘이었다. 그러나 나는 지서준의 손을 내칠 수 없었다.
지서준이 떨고 있었다.
중학교 때 지서준의 떨리던 손. 그 손길을 바라보다 뒤돌아본 나는 그 나이답지 않은 표정으로 나와 지서준을 보고 있는 한태이를 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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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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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야?”
“복수? 아하. 중학교 때 너한테 얻어맞아서 코피 흘린 거? 내가 그렇게 쪼잔한 인물로 보이나?”
“그럼 뭐야.”
“말했잖아. 그냥 큐피드라고.”
“웃기지 마.”
내 눈빛을 고스란히 받아내던 한태이가 한숨을 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안 속네.”
그러더니 기다란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비는 척하며 입을 열었다.
“재밌잖아.”
“재미?”
이 미친놈이 뭐라고 하는 걸까. 나는 잠깐 내 귀를 의심했다.
“그래. 처음부터 노력도 없이 모든 걸 가진 놈이 참 거슬렸는데 말이야. 오랜만에 봤는데도 걔는 참 멋있더라. 짜증 나게……. 그 모습을 보니까 그냥 모르는 척하기에는 내가 좀 한가한 놈이라서.”
한태이는 여전히 능글거리는 표정으로 말하고 있지만, 그 눈빛이 바뀐 건 찰나의 순간이었다.
“누가……. 누가 처음부터 노력도 없이 가졌다는 거야?”
“아니면 말고.”
미친놈.
나는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래서 유나라 씨를 통해서 장난치고 싶었다?”
“사실, 처음부터 그럴 마음은 없었는데, 너랑 지서준 표정을 보고 기분이 더러워져서 말이야. 나는 정말로 반가워서 인사했던 건데.”
“넌 여전히 네 마음만 중요하구나? 남의 마음 따위는 생각도 안 하고.”
“내가 소시오패스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 뭐. 아무렴 어때. 별로 재미가 없네. 유나라 씨, 그 여자. 생각보다 별로 능력도 없어 보이고…….”
양손을 들어 항복하듯 손을 올리는 한태이. 그 모습에 화가나 소리라도 지르려 입을 여는데, 가방 속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기 시작했다.
“받아봐. 지서준일 것 같은데…….”
핸드폰을 확인하니, 역시나 지서준이었다.
“맞지?”
지서준의 전화를 받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한태이와 같이 있다는 것을 들킨다면 바로 이곳으로 달려올 게 뻔했다.
“왜 안 받아? 으흥. 나랑 지서준이랑 만나게 하고 싶지 않구나? 예전이나 지금이나 너는 참 지서준을 과보호한단 말이야.”
“말조심해. 아직, 유나라 씨와 너의 관계, 그리고 회사 소문. 그것 먼저 해결해야 하지 않나?”
그때.
“문다율!”
지서준이었다.
“여기, 여긴 어떻게…….”
중학교 때 체육관에서의 거친 숨을 몰아쉬던 모습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 지서준은 나에게 다가와 내 손목을 잡았다.
“추억의 명장면 재현이야?”
지서준이 내 손목을 놓고는 한태이의 멱살을 잡았다. 한태이를 강하게 가제보의 기둥으로 밀치며 압박하자 한태이가 버둥거리며 지서준의 손을 잡았다. 그러나 지서준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내가 그때 당하기만 하던 지서준으로 보이나?”
지서준의 표정에 한태이의 얼굴이 굳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