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토끼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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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화. 토끼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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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화. 토끼몰이.
2023.03.12.
토끼몰이란, 산토끼를 잡기 위하여 목으로 몰아넣는 일. 또는 그 일을 하는 사람을 뜻하는 말이다.
나는 지금 토끼몰이를 시작하려 한다.
내가 잡을 토끼는 매우 영악한 듯 보인다. 최대한 숨을 죽이고 기회를 엿봐 끝까지 몰아넣어 포획해야 한다.
사실, 토끼를 잡아야 하나 아직 확신은 들지 않는다.
내가 그 토끼를 꽤 좋아했으니까.
**
유독 추운 아침이었다. 이제는 정말로 겨울이 오려나 본지 뼛속까지 파고드는 냉기가 몸을 덜덜 떨게 했다. 한겨울보다,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추위가 더 매섭게 느껴졌다.
[오늘 같이 밥 먹자. 백인하 씨도 데리고 나와.]
뻣뻣하게 굳은 손을 호호 불어 확인한 메시지는 조금은 황당했다.
순진하기만 한 토끼인 줄 알았는데, 속이 시커먼 음흉 토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요즘 백인하 씨를 조심히 주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토끼는 매우 영리했다. 평소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모습을 유지하며 여전히 천진난만한 가면을 쓰고 있었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모습에 혹 내가 오해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데, 그녀와 같이 점심을 먹자니.
[무슨 생각이야?]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지.]
그녀는 토끼가 아니라 호랑이였던가.
추위에 잔뜩 움츠러들었던 몸이 회사에 들어가자 조금씩 녹기 시작했다. 따뜻한 커피를 들고 자리에 앉자 백인하 씨가 손을 비비며 사무실로 들어왔다.
“대리님. 오늘 상당히 춥죠?”
“네. 이렇게 갑자기 추워지니까 더 추운 것 같네요.”
“네. 장갑 하나 장만해야 할까 봐요.”
손을 꼼지락거리며 자리에 앉는 그녀를 조용히 응시했다. 그러자 눈을 살짝 굴려 나를 보더니, 그녀가 물었다.
“뭐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세요?”
“네? 아……. 오늘 따뜻한 거 먹을래요? 지서준이 산대요.”
“지서준 연구원님이요?”
“네.”
잠깐 고민하던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점심때가 되어가니 날이 풀렸다. 그래도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무들을 보니 따뜻한 국물이 생각나 우리가 자주 가던 국밥집으로 들어갔다.
“저까지 안 사주셔도 되는데…….”
자리에 앉아 수저를 놓으며 백인하 씨가 말했다.
“아닙니다. 다율이랑 같은 팀 동료인데, 이런 점심은 언제든지 사드릴 수 있죠.”
어? 이놈 봐라.
평소보다 많이 누그러진 말투와 표정으로 말하는 지서준을 나는 눈만 껌뻑거리고 바라보았다. 호랑이를 잡는다더니, 회유해서 목에 방울이라도 달 작정인 건가.
“그럼 커피는 제가 살게요! 꼭 제가 사게 해주세요!”
백인하 씨가 지서준을 향해 간절히 외쳤다. 그러자 지서준이 살짝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서준의 미소에 백인하 씨의 볼이 살짝 붉어졌다.
허……. 도대체 이건 무슨 꿍꿍이인 건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국밥이 나왔다. 따끈한 국물에 아삭아삭한 김치를 올려 한입 먹으니, 몸속 어딘가 얼어 있던 부분이 스르르 풀리는 것 같았다. 몸도 노곤해졌다.
“한태이한테서 연락이 왔어.”
아니. 이렇게 맛있는 국밥 앞에서 한태이 이야기라니. 모래를 뿌려도 이렇게 으석으석하진 않을 것이다.
“갑자기 걔 이야기는 왜 꺼내.”
내가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묻자 숟가락을 멈췄다.
“유나라, 그 사람이랑 했던 이야기 확인차 전화했었어.”
“유나라 씨?”
“거짓말하는 걸지도 모르잖아. 제대로 확인해야지.”
나는 눈에 물음표를 띄우고 지서준을 바라봤다.
“익명 게시판. 그 얘기는 아무래도 그 여자 말이 맞는 것 같더라.”
아! 그렇구나.
나는 왜 쟤가 갑자기 저 이야기를 꺼내나 싶었는데, 우리 앞에 앉은 백인하 씨의 반응을 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래? 익명 게시판은 확실히 유나라 씨가 한 게 아니구나.”
내가 맞장구를 치며 앞쪽에 앉은 백인하 씨를 바라보았다.
나는 속으로 조금 놀랐다.
그녀의 표정에서는 어떤 생각도 읽히지 않았다. 먹던 걸 멈추고 나와 지서준이 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익명 게시판이요? 그걸 유나라 씨가 썼대요?”
전혀 내용을 알지 못한다는 듯 백인하 씨가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도 평소와 다를 것 없었다.
“아니요. 익명 게시판은 다른 사람이 쓴 것 같아요. 그 전에 정찬형 연구원이랑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소문낸 건 그 여자고요.”
“네? 그 소문을요? 유나라 씨가 그러던가요?”
“네. 두 분이 친분이 있다고 아는데 그건 잘 모르셨나 봐요.”
“그렇죠.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죠.”
그 뒤 백인하 씨는 유나라 씨에 대해서 이것저것 물어봤다. 그러나 딱히 그녀가 무언갈 했다는 정황은 잡을 수 없었다.
역시, 만만히 볼 토끼가 아니었다.
점심을 먹고 그녀가 산 커피를 홀짝이며 회사로 돌아가는 길. 열심히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그녀가 먼저 들어가라는 말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졌다.
그녀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아무런 반응이 없는데……. 진짜 우리가 애먼 사람 잡는 거 아니야?”
“글쎄. 더 구석으로 몰아봐야지.”
지서준의 표정은 확고했다.
같은 팀에서 그녀와 2년이 가까워지도록 일했었다. 함께 밥을 먹는 시간도 많았고, 사소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즐거운 시간도 보냈다. 상사에게 깨지는 날이면 가볍게 술잔을 기울이며 서로를 위로했다.
그런데, 그녀가 정말로 그랬다면…….
“혹시, 더 이상 깊게 파고 싶지 않은 거야?”
나를 바라보던 지서준이 물었다.
“나도 잘 모르겠어.”
내 말에 지서준이 내 머리를 가볍게 톡톡 두드렸다.
“네 마음이 뭔지 알아. 익명 게시판이 중요한 게 아니야. 정말로 백인하 그 여자가 김형석 과장 일에 관여가 되어 있었는지 그게 중요해. 그것만큼은 절대 용서할 수 없어.”
나는 지서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
내 생각보다 빠르게 그녀가 반응을 보였다.
“문 대리님. 유나라 씨가 혹시 제 얘기하지 않던가요?”
“네? 무슨 얘기요?”
급한 일을 처리하고 간단히 차 한잔하자던 그녀였다. 나는 흔쾌히 백인하 씨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커피를 홀짝이는데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냥요. 문 대리님 소문도 낸 여자인데, 제 얘기라고 좋게 할까 싶어서요.”
태연한 척 묻는 그녀였지만, 초조해하는 느낌마저 지울 수는 없었다.
“인하 씨.”
“네?”
동그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녀.
“유나라 씨랑은 어떻게 친해지게 된 거예요?”
“네?”
잠깐이지만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제가 인사팀 막내랑 친하게 지냈어요. 그러다 보니 어찌어찌……. 하하.”
생각지 못한 질문을 던졌던 탓일까. 조금은 흔들리는 백인하 씨의 모습에 나는 조금 더 바짝 그녀에게 다가갔다.
“유나라 씨가 인하 씨가 성격이 좋아 보여서 먼저 친해지자고 했나 보다. 맞죠?”
“네? 네. 그렇죠. 하하.”
“그래서, 그때 부대찌개도 같이 먹자고 했나 봐요. 그 부대찌개 집, 유나라 씨가 추천한 거라고 했던가?”
“네? 아! 네. 유나라 씨가 먼저 가자고 했던 곳이었어요. 정찬형 연구원님이랑 문 대리님을 그곳에서 보고 얼마나 놀랐는데요.”
거짓말.
유나라 씨는 분명 갑자기 백인하 씨에게 연락이 왔다고 했다.
“그 집 맛있죠. 또 가고 싶네요.”
내 눈은 점점 차분히 가라앉았다. 커피잔을 들고 서둘러 탕비실을 나가는 그녀를 보고 나는 마음을 굳혔다. 제대로 토끼몰이를 해보겠다고.
그로부터 며칠 후.
며칠 내내 춥다가 미세먼지가 찾아오며 오늘은 조금 따뜻한 기운이 돌았다.
“차라리 추운 게 낫지……. 이게 뭐야.”
오늘따라 심한 미세먼지에 코가 꽉 막혀버렸다. 미세먼지가 심해지며 없었던 비염까지 생겨 고생하는 중이었다.
황사용 마스크를 끼고 출근하는 길. 회사로 가는 길에 사람들이 흘끔거리며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소란스러운 소리. 내 호기심에 못 이긴 발이 그쪽으로 향했다.
“이, 인하 씨?”
그곳에는 김형석 과장에게 손목이 잡혀 있는 인하 씨가 있었다. 얼마나 세게 잡혀 있는지 잡혀 있는 손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나는 백인하 씨를 돕기 위해 그들에게 다가섰다. 그러나 나를 발견한 그녀의 표정을 보고 우뚝 멈춰 섰다.
나를 보고 화들짝 놀란 그녀의 눈이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져 있었다. 그 눈에는 난처함, 당황, 놀람이 뒤섞여 있었다.
“이게 누구야. 잘 왔네.”
잔뜩 흥분한 김형석 과장이 나를 발견하곤 눈을 희번덕였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주춤주춤 발을 뒤로 물렸다.
“이 여자, 당신 팀이지?”
“김 과장님! 다, 다른 곳에 가서 얘기해요. 네?”
“뭐야. 이제 와서 나랑 이야기할 마음이 생긴 거야? 어? 왜. 남의 인생 이렇게 만들고 너는 쪽팔리기 싫어?”
“입 다물어요! 빨리, 다른 곳에…….”
잡힌 손을 빼내려 안간힘을 쓰던 그녀가 김형석 과장을 끌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김 과장이 인하 씨의 손을 쳐냈다.
“내가 또, 남이 그렇게 하자면 하기 싫어지잖아. 특히, 내 인생 망쳐놓은 사람이 하자는 대로 내가 해줄 것 같아?”
백인하 씨의 비어버린 손이 벌벌 떨리고 있었다.
“문다율 씨. 당신 뒤통수 제대로 맞았어. 알아?”
“지금, 무슨 소리를…….”
“저 여자. 저 여자가 나한테 뭐라고 한 줄 알아?”
“제발, 그만!”
“이거 놔!”
백인하 씨가 달려들어 김 과장을 말렸지만, 작은 체구의 그녀가 잔뜩 흥분한 김 과장을 말릴 수 있을 리 없었다.
“언제부턴지 우리 인사팀 술자리에 끼어들더니 얼큰하게 취해 있는 나를 붙잡고 그러는 거야. 응? 자기 팀 문다율 대리가 나랑 꽤 잘 어울린다고. 한번 잘해볼 생각 없냐고. 본인이 자리를 만들어주겠다고.”
온몸의 열이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갑갑한 마스크를 통해 열심히 숨을 쉬어 봤지만, 답답함만 늘어 결국 신경질적으로 마스크를 끌어 내렸다.
“그러면서 나한테 문다율 씨의 정보를 하나하나 흘리더라고. 그런 추잡한 소문까지 전부다.”
나는 움직이지 않는 몸을 겨우 움직여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나와 눈을 마주치자 격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에요. 저 미친 사람이 지금 헛소리를…….”
“미친 사람? 내가 너 발뺌할까 봐 증거도 다 모아놨어.”
씩씩거리며 양복 안주머니에서 핸드폰을 찾아 뒤적이더니 내게 내밀었다. 떨리는 손으로 받아든 핸드폰에는 김 과장과 백인하 씨가 주고받은 메시지가 있었다.
[동계 회사 지급품 사이즈 취합 건 문대리 님에게 넘겼어요. 잘해보세요.]
[우리 대리님, 은근히 박력 있는 남자 좋아해요.]
[지서준 연구원님이랑은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냥 친구 사이래요.]
[문대리 님은 외모보다는 과장님처럼 은근히 유머 감각 있는 사람 좋아해요.]
[문다율 대리님 멘토, 멘티 다 없어요. 인사팀에서 인원 충당 핑계로 같이 가자고 하면 안 돼요? 거기서 좋은 시간 보낼 수 있잖아요.]
더 읽어 내려가려 했지만, 김형석 과장이 내 손에 있던 본인의 핸드폰을 잡아채 갔다.
“봤지? 내가 괜히 문다율 대리에게 그랬겠어? 어? 저 여자가 분명 나한테 관심 있다고, 자기한테도 그랬다고 얘기했다니까! 그러곤 일이 이렇게 되니까, 다른 여직원들 부추겨서 나를 신고하게 해? 내가 끝까지 몰랐으면 어쩔 뻔했어. 어?”
억울하다며 방방 뜨는 김형석 과장.
“내가 없던 일 신고하게 했어요? 당신이 했던 일이잖아.”
백인하 씨의 표독스러운 말이 들려왔다.
“뭐? 아직,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지? 내가 이대로 나만 죽을 것 같아?”
점점 큰소리가 나자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고, 우리의 얼굴을 아는 사람들은 가까이 다가와 무슨 일이냐고 묻기 시작했다.
잔뜩 불안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는 백인하 씨. 그때, 갑자기 그녀의 눈빛이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