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궁지에 몰린 토끼는 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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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화. 궁지에 몰린 토끼는 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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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화. 궁지에 몰린 토끼는 문다.
2023.03.15.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녀가 옷을 털고 몸을 돌려 회사로 향했다.
“어디 가!”
잽싸게 백인하 씨를 붙잡은 김 과장이 그녀를 돌려세웠다.
“할 말 다 했잖아? 그럼 된 거 아닌가?”
“뭐?”
다시 몸을 돌려 회사로 돌아가는 그녀. 이번에는 내가 그녀를 잡아 세웠다.
“지금, 김 과장이 한 말 다 사실이에요?”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근 2년 동안 그녀가 이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 사람이었던가. 너무나 차가운 표정으로 나를 보던 그녀가 ‘핏’ 하고 웃었다.
옆으로 지나가는 차들이 바람을 일으켜 머리가 백인하 씨의 머리를 헝클였다.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넘긴 그녀가 입을 열었다.
“지금, 다 봤잖아요. 내가 무슨 더 할 말이 있나요? 아. 사과를 바라는 건가? 네. 죄송해요. 됐나요?”
가볍게 고개만 까닥 움직이고 다시 회사로 돌아가려는 백인하 씨였다. 화가 났다. 지금, 잘못한 사람은 누군데, 저런 태도라니. 나는 빨리 그녀의 팔을 잡았다.
“지금, 이 태도가!”
나는 내 말을 끝내지 못했다. 저 작은 체구에서 무슨 힘이 이리 센 것인지. 내가 팔을 잡으려 하자 그녀는 내 손길을 피하고 양손에 힘을 실어 나를 밀쳤다.
그래. 그녀가 밀쳤다. 그리고 나는 중심을 잃었다.
빠앙!
퍽!
클랙슨 소리가 요란하게 들린 후 굉장한 소리가 나를 덮쳤다.
웅성웅성.
비명이 섞인 사람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눈이 무거웠다. 귀에서 이명이 들렸다.
자꾸만 눈이 감겼다. 나는 간신히 눈을 떴다. 아스팔트, 그래 아스팔트가 눈에 보였다. 내가 넘어진 건가. 머리에서 무언가 뜨끈한 것이 흘러내렸다.
검붉은 피였다.
누구 피지? 까맣던 아스팔트 위로 붉은 피가 조금씩 흐르는 게 눈에 보였다.
“허, 흑.”
고통.
갑자기 찾아온 고통이 내 온몸을 휘감았다.
“119! 누가 119 좀 불러주세요! 사람이 차에 치였어요!”
“아…… 아파요.”
“마, 말하지 말아요. 피를 많이 흘려요.”
나에게 다가온 누군가 내 머리 위에 손수건을 올려놓고 말했다. 아프다. 눈이 무겁다. 이렇게 아픈데 자꾸만 눈이 감겨왔다.
지서준이 보고 싶었다.
그때, 내 흐린 시야에 지서준이 보였다.
당장이라도 절규할 것 같은 지서준의 표정이었다. 지서준이 보고 싶었지만,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 지서준을 보니 조금 후회가 됐다.
많이 놀랐나 보네……. 울면 안 되는데…….
지서준 눈에 가득한 눈물을 보며 생각했다. 그러나 더는 무거운 눈을 뜨고 있을 수 없었다. 그렇게 나는 눈을 감았다.
**
“……보세요. 네? 눈 떠보세요. 문다율 환자.”
누군가가 나를 깨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떠야 하는데, 무겁기만 한 눈덩이는 올라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래. 조금만 더 자자.
“문다율 씨? 일어나보세요. 소리 들리세요?”
아이참. 머리도 아프고 더 자고 싶은데, 자꾸 누가 깨우는 건지. 계속해서 깨우는 목소리에 간신히 눈을 들어 올렸다.
“깨, 깨어났어요.”
지서준의 목소리였다. 흐리기만 한 시야에 엄마, 그리고 지서준이 보였다.
“문다율 씨. 여기 계신 분들 누군지 알아보시겠어요?”
흰 가운을 입고 있는 사람이 엄마와 지서준을 가리켰다. 내가 엄마와 남자친구도 못 알아볼까. 나는 입을 열어 대답하려고 했다.
“으…….”
하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냥 고개만 끄덕이셔도 됩니다. 힘들면 말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나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움직였을 뿐인데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져 왔다.
“수술은 잘 됐고, 깨어났으니 회복실에서 조금 더 상황을 지켜본 후 일반 병실로 옮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수술? 내가 지금 병원에 있는 건가?
아. 맞다. 나 교통사고 당했었지. 마지막 지서준의 모습이 떠올랐다. 많이 운 건 아닐까. 은근히 물러터진 놈인데.
나는 눈을 움직여 지서준을 바라봤다.
역시나 많이 울었는지 벌겋게 물든 눈이 퉁퉁 붓기까지 했다. 그 눈에는 아직도 눈물이 그렁그렁 차 있었다.
울지 말라고 해야 하는데……. 목소리는 나오지 않고 다시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안 되는데, 우리 엄마도 울고 있는데……. 나 괜찮다고 말해줘야 하는데.
나는 간신히 감기는 눈을 떴다.
“깨어 있으려고 애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한숨 푹 자고 나면 조금 더 몸이 편해질 테니 걱정하지 말고 주무세요.”
의사의 말에 나는 눈에 힘주기를 포기하고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
깨질 것 같은 통증에 눈을 떴다. 다시 눈을 뜨고 첫 번째로 보인 것은 낯선 천장이었다. 분명 의사는 자고 일어나면 몸이 편해질 거라 했는데, 거짓말이었나보다.
머리서부터 발까지 안 아픈 곳이 없었다.
“아파…….”
잔뜩 갈라진 목소리가 입 밖으로 나왔다.
“괜찮아? 잠깐, 기다려. 간호사 데리고 올게.”
지서준의 목소리. 내가 깨어나 아파하자 빠른 걸음으로 밖으로 나갔다. 주위를 둘러보니 엄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간호사가 다가와 이것저것 묻더니, 담당 의사 선생님께 말해 진통제 처방을 받겠다며 밖으로 나갔다.
“나 알아보겠어?”
“내 남자……친구.”
내 대답에 우는 것도, 웃는 것도 아닌 표정을 지어 보인 지서준이 내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진통제 들어가면 조금 뒤에 통증이 가라앉을 거예요. 내일 새벽에 간단하게 검사하고 주치의 선생님 오시면 설명 들으시면 됩니다. 불편한 점 있으면 바로 불러주세요.”
상냥한 간호사 언니가 진통제 하나 더 달아주며 지서준을 흘끔거리며 설명했다.
이보세요. 얘가 애절한 표정으로 내 손 붙잡고 있는 거 안 보이나요? 당장이라도 손을 올려 간호사 언니 눈앞에서 흔들어대고 싶은데, 도저히 그럴 힘이 나지 않았다.
내가 끙끙거리자 눈을 크게 뜨며 내 몸 이곳저곳 살피며 어디가 아픈지 물었다. 그런 지서준의 모습을 아깝게 바라보던 간호사 언니가 병실을 나섰다.
“얼굴……. 가리고 다녀.”
내 뜬금없는 말에 내 몸을 살피던 지서준이 나를 바라보았다.
“내 건데……. 자꾸만 다른 사람들이…….”
이제는 한계인 건가. 진통제가 들어가니 다시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를 보던 지서준이 갑자기 입고 있던 후드의 끈을 바짝 조였다. 곧게 뻗은 코의 둥근 끝자락만 보이도록 가리고 예쁘게 리본까지 묶었다.
“이렇게 가리면 돼?”
“으……응.”
저렇게 가려질 정도로 얼굴이 작다니. 짜증 나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잠이 들었다.
그렇게 한동안 나는 잠이 들고 깨고를 반복했다. 자고 깰 때마다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이 달라졌다. 엄마와 아빠였다가, 윤희 아줌마였다가, 지서준이었다.
어느 정도 깨어 있기까지 6일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몸이 조금 회복되니 당장이라도 씻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도 거동이 조금 불편한 몸이었다. 더구나 여기저기 붕대와 밴드 때문에 씻는 일이 쉽지 않았다.
내가 씻고 싶다고 하자 지서준이 따뜻한 물에 수건을 적셔와 내 몸을 닦기 시작했다.
“머리 가려워.”
“드라이 샴푸 해줘?”
“아니, 물로 감아서 벅벅 긁어서 씻었으면 좋겠다.”
“아직 붕대 풀 때까지는 안 돼.”
손으로 코를 막지라도 말 것이지. 내가 조금 움직이면 움찔하며 코를 막는 지서준이었다.
“……백인하 씨는?”
나는 지서준의 손길에 팔을 맡긴 채 계속 궁금하던 걸 물었다.
“경찰 조사받고 있어.”
“응……. 그렇구나.”
백인하 씨에게 밀쳐져 차도로 튕겨 나갔다. 지나가던 차가 나를 피하지 못했고, 나는 그대로 차에 치였단다. 다행히 빠른 속도로 주행하고 있지는 않아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월요일에 경찰이 병원으로 온다고 했다. 가족들과 지서준은 내가 조금 더 안정을 찾은 후 경찰 조사를 했으면 좋겠다고 했지만, 내가 빨리하고 싶다고 고집을 부렸다.
사고 난 후 정신을 잃기 직전, 바닥에 주저앉아 입을 틀어막고 있는 백인하 씨의 모습이 보였다. 안다. 일부러 나를 차도로 밀지 않았다는걸.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용서되는 것은 아니었다.
내 팔을 닦고 있는 지서준의 손에 힘이 빠졌다.
“빡빡 닦아라. 그렇게 닦아서 때가 빠지겠어?”
“……팔 올려.”
“겨, 겨드랑이는 안돼.”
그렇게 한참 실랑이를 벌이는데 병원 문이 드르륵 열리더니 엄마와 윤희 아줌마가 들어왔다.
“이제 살아났네. 살아났어.”
지서준의 팔을 물고 있는 날 발견하더니 엄마가 말했다.
“흐흡. 그래도 다율이 저렇게 서준이 팔 물고 있는 모습 보니까 나는 안심 돼서 좋기만 한데. 왜.”
아줌마는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찍었다. 엄마가 옆에서 아줌마를 달래며 그만 울라고 다독였다.
“울지 마세요. 네?”
나는 지서준 팔에 묻은 내 침을 닦아내며 아줌마를 달랬다. 아줌마는 여전히 훌쩍이며 자리에 앉았다.
“다율이 언제면 퇴원할 것 같아?”
“다음 주면 가능하대. 주치의 선생님만 보면 나가고 싶다고 징징대서 죽겠어! 내가.”
몸이 조금 회복되고 나서부터 갑갑한 병원이 목을 죄듯 답답했다. 빨리 퇴원하고 싶다는 말에 주변에서 모두 반대해 의사 선생님이 권고하는 날까지 꾹 참고 버티고 있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주치의 선생님이 회진 돌 때마다 내 의견을 말했는데, 그걸 징징댄다고 표현하다니……. 역시 우리 엄마였다.
“오늘은 들어가 서준아. 아줌마가 여기 있을게.”
“아니에요. 내일은 일요일이잖아요. 제가 있을게요.”
어제 회사에서 끝나자마자 병원으로 달려온 지서준이었다. 저 커다란 몸을 작은 보호자 침대에 구겨 자는 모습이 보기 싫어 집에 가라고 했는데도 도통 말을 듣지 않았다.
“윤희 아줌마. 서준이 데리고 가요. 얘 여기서 오늘 하루 더 자면 꼽등이 되겠어요. 저 넓은 등이 굽어서는……. 우웁!”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지서준이 칫솔에 치약을 묻혀 내 입에 넣어버렸다.
“그래. 서준아. 들어가.”
우리 엄마의 권유에도 강하게 부정한 지서준. 결국, 밤이 되고 보호자 침대에 누운 건 지서준이었다.
“자?”
“아니.”
병원의 소음을 들으며 나는 이불을 만지작거렸다.
“많이 놀랐지.”
“…….”
“많이 울었어?”
“…….”
여전히 아무 대답이 없는 지서준. 나는 살짝 몸을 일으켜 보호자 침대를 보았다. 팔을 올려 눈에 올려놓고 있어 지서준이 어떤 표정을 짓는지 볼 수 없었다.
팔을 치워볼까 하다 그냥 포기하고 다시 자리에 누웠다.
“무서웠어.”
내가 자리에 눕자 입을 연 지서준. 그의 목소리에는 작은 떨림이 섞여 있었다.
“피를 흘리고 있는 널 보고, 너무 무서웠어.”
하필 다친 곳이 지서준이 있는 쪽이라 돌아누울 수도 없어 천장만 바라봐야 했다.
“그리고, 죽여버리고 싶었어. 널 이렇게 만든 사람.”
“야! 너 지금 무슨…….”
나는 지서준의 살벌한 말에 다시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눈을 가리고 있을 줄 알았는데,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큰일 날 소리를…….”
나는 끙끙거리며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내가 일어나자 지서준이 벌떡 일어나 날 부축했다.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 하지 마.”
“…….”
“빨리 대답 안 하면 다시 물어버릴 거야.”
나는 대답하지 않는 지서준의 팔을 ‘앙’ 물어버렸다. 꿈쩍도 하지 않는 지서준. 팔을 문 채 올려다보니 아픈 기색 하나 없는 지서준이 내려보고 있었다.
“아무 짓도 안 해. 네가 싫어할 거니까. 나는 이제 네가 싫어하는 건 아무것도 안 할 거야.”
지서준이 팔을 내 입에서 빼내 내 입에 묻은 침을 엄지로 닦았다.
“나는, 네가 그 사람을 벌하고 싶다면 내 모든 걸 걸고 그 사람을 벌줄 거야.”
나는 지서준의 팔에 찍힌 내 이빨 자국을 보았다.
“……내가 할 수 있는 한에서 인하 씨의 죗값을 치르게 할 거야. 그러니까, 옆에서 지켜봐 줘. 그 과정이 즐겁지만은 않을 거야. 그러니까……. 그냥 이렇게 내 옆에 있어 줘. 가끔 팔뚝도 물려주고.”
내 말에 지서준이 피식 웃었다.
“그래. 그럴게. 네가 원한다면.”
그러곤 내 머리를 쓰다듬으려 팔을 올렸다. 나는 눈을 감고 지서준이 머리를 쓰다듬길 기다렸다. 그런데 쓰다듬지 않고 다시 팔을 내리는 지서준.
“왜 안 쓰다듬어주는 거야.”
“……실밥 풀면 머리 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