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안 들어와도 된다!
(79/97)
79화. 안 들어와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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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화. 안 들어와도 된다!
2023.04.02.
나를 발견하자 꿈같은 하얀 나라의 풍경 속의 지서준이 환하게 웃으며 양팔을 벌렸다.
이거, 꿈 아니야?
나는 눈을 비비고 다시 지서준이 서 있는 곳을 바라봤다. 잠깐 사이, 혹 이게 꿈이면 어쩌나 걱정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곳에 지서준이 서 있었다.
나는 마구 달려 지서준의 품에 안겼다.
“으헙!”
너무 빨리 달렸나.
충격이 꽤 큰지 지서준은 뒤로 몇 걸음이나 물러서고야 겨우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
“넘어질 뻔했잖아.”
“어떻게 된 거야? 오늘 오는 날 아니잖아.”
“미친 듯이 회의하고 일했지.”
만약 급하게 일정이 변경돼서 비행기 표를 바꿔야 했다면, 우리 부서에 연락이 왔을 텐데, 오늘 회사에 있을 때만 해도 그런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비행기 표는? 어떻게 구한 거야?”
연말이라 구하기도 힘들었을 텐데……. 지서준의 품에서 고개를 들어 올려다봤다. 굵직한 눈송이가 지서준의 기다린 속눈썹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고개를 털어 눈송이를 떨군 지서준이 빙긋 웃었다.
“공항에서 온종일 기다렸지. 취소 표 나올까 해서.”
맙소사.
나는 빨리 서울로 날아오고 싶어 연말로 부산한 공항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는 지서준이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안타까우면서도 사랑스러운 느낌.
나는 발을 동동 굴렀다.
“미리 말을 하지! 그럼 공항이라도 갔잖아.”
“미리 말하면 서프라이즈가 아니지.”
서프라이즈 이벤트까지 할 줄 아는 이 남자. 완벽하다.
“배고프지? 올라가자. 안에 어른들이 맛있는 음식 잔뜩 했어.”
“집으로?”
“응.”
내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지만 애매하게 미간을 찌푸린 지서준이 손을 들어 올렸다.
“아!”
이마가 번쩍했다. 꿀밤을 준 지서준이 엄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봤다.
“너랑 같이 크리스마스 보내고 싶어서 그 고생을 하고 날라왔는데, 어른들 있는 곳으로 올라가자고? 눈치가 없어도 이렇게 없어서야…….”
“아니…….”
순간 화끈한 이마에 울컥했지만, 지서준의 말에 마음이 살랑거리기 시작했다.
“나 가방 위에 있는데.”
“아주머니에게 챙겨달라고 연락해.”
“그럴……까?”
나는 코트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살짝 언 손으로 엄마에게 보낼 메시지를 타이핑했다. 눈송이가 핸드폰 액정에 앉자마자 스르르 녹아 없어졌다.
[나 서준이랑 놀러 갈 거야.]
**
“벌써 종무식이야. 나는 내년에 37살이라고.”
“저는 앞자리가 바뀐다고요.”
종무식이 열리는 대회의실로 향하는 길. 이제는 이틀밖에 남지 않은 올해에 대한 미련을 뚝뚝 흘리는 나와 이 과장님.
“정훈 씨는 좋겠어. 아직도 20대지?”
“저도 이제 곧입니다.”
“안 돼. 정훈 씨라도 20대에 남아줘. 나는 이미 글렀어.”
내 말에 자기 영역이 아니라며 의기소침하게 대답하는 우리 팀의 막내였다. 회의실로 들어가니, 연말이라 그런지 유난히 시끌벅적한 분위기였다.
“그나저나, 이번에 최우수 팀이 바이오 제1 연구팀이라며?”
“역시, 에이스팀이네요.”
저쪽 구석에서 대화하고 있는 바이오 연구팀이 보였다. 그들은 많은 사원 틈에서 단연 돋보였는데 그 이유는 2m 거구의 팀장님과 그 옆에 반짝이고 있는 지서준의 탓이었다.
“언제봐도 돋보여.”
내 옆에서 이 과장님이 팔짱을 끼고 지서준을 바라봤다.
“존 팀장님 때문에 더 눈에 띄는 것 같죠?”
“지서준 연구원은 무슨 운동을 하나?”
“헬스클럽 다녀요.”
“자기는?”
“저는 숨쉬기 운동이요.”
무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이 과장님이 내게 하이 파이브 하자며 손을 내밀었다. 동지애였다.
“남자친구 따라서 운동해보지. 이제 30살 되면 체력이 하루가 다르게 달라져요.”
“안 그래도 지서준이 매일 같이 운동하자고 유혹은 하는데……. 그런 유혹에는 제가 강한 편이라서요.”
그렇게 운동의 필요성은 아주 잘 알고 있으나, 영 마음먹기가 힘든 우리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나갈 무렵. 종무식이 시작되었다.
“올해도 S.T 가족 여러분들의 힘으로 잘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올해에는 많은 일이…….”
유난히 길고 길었던 대표님의 인사말이 끝나고, 올해를 마무리하는 상과 상금 수여식이 이어졌다.
최우수 팀인 바이오 제1팀의 수장. 존 팀장이 단상에 오르니 유난히 더 커 보였다. 그의 유쾌한 수상 세리머니에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종무식이 끝이 나고, 사무실로 돌아가려는데 지서준이 날 붙잡았다.
“오늘 끝나고 약속 없지?”
“응. 그렇지?”
그때 뒤에서 커다란 존이 다가왔다.
“잘됐다! 같이 가요. 같이.”
“네?”
지서준이 머리가 아픈 듯이 한 손으로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우리 오늘 이 돈으로 회식합니다. 회식!”
조금 전 받았던 상금 봉투를 내 앞에서 흔들었다.
“오늘은 진짜 비싼 거 먹을 겁니다. 같이 가요.”
“네? 아. 저는…….”
무슨 염치로 그 회식에 낀다는 말인가. 나는 거절의 말을 하려 막 입을 열었다.
“거절은 노노입니다. 소고기입니다. 오늘은 한우!”
나에게 한우라는 아주 매혹적인 카드를 꺼냈다. 이 엘리트 팀장님은 협상까지 잘했다. 옆에서 그저 무언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서 있던 지서준이 말했다.
“부담스러우면 오지 않아도…….”
“문 대리님. 오늘 1인에 5만 원이 넘는 식당으로 간대요.”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던 이경훈 연구원님이 말을 보탰다.
“갈게요! 저 갈게요!”
**
“지서준 표정은 왜 저런대요? 오늘 안 좋은 일 있었어요?”
나는 바이오 제1 팀에 껴 회식에 가는 길. 마냥 좋지만은 않은 지서준의 표정에 옆에 서 있던 이경훈 연구원님에게 속삭였다.
“원래, 늘 저런 표정 아닌가요?”
진지한 표정으로 묻는 이경훈 연구원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주 자세히 봐야 알 수 있거든요? 요기, 요기가 꾸깃꾸깃하면 기분이 좋지 않은 거고, 이쪽이 세 줄 이상 그어지면 정말 기분이 나쁜 거고, 또…….”
나는 내 이마의 미간을 검지로 콕콕 찌르며 자세히 설명했다. 앞서가던 장우석 씨도 내 설명에 흥미가 생겼는지 뒤를 돌아봤다.
“문다율. 이리 와.”
갑자기 내 팔을 잡더니 자기 쪽으로 끌고 가는 지서준이었다.
“지 수석님은 은근히 질투가 많다니까요.”
장우석 씨가 투덜거리든 말든 나를 안쪽으로 밀어 그들과 거리를 만들었다.
“내가 같이 회식 가는 거 싫어?”
“그게 아니고…….”
“우리가 놀려서 그래요. 문 대리님이랑 같이 있을 때 수석님은 꽤 다른 사람 같거든요. 그래서 팀장님이랑 저희가 좀 놀렸더니……. 질투도 많고 속도 좁은…….”
“장우석 씨. 그 입을…….”
장우석 씨의 말에 이경훈 연구원이 서둘러 입을 막았다.
“하하. 지 수석님 사랑꾼이라는 말이 하고 싶은 거죠? 네?”
입이 막혀 있어 장우석 씨가 뭐라고 열심히 말했지만, 뭘 말하고 싶은 건지 알 수 없었다.
외관도 고급스러운 한우 전문점. 직원이 다가와 고기에 대한 설명과 함께 전문적인 손길로 고기를 알맞게 구워냈다.
“남이 고기 구워주는 거 좋아합니다.”
한국 사람이 다 된 존 팀장님.
“큼. 흠. 저 중대 발표를 할까 합니다.”
모두 고기에 열중하는 그때, 이경훈 연구원님이 팀원들을 집중시켰다.
“제가……. 제가 아빠가 된답니다!”
“푸흐흡. 컵. 콜록. 콜록.”
장우석 씨가 먹던 물을 뿜었다.
“장우석 씨…….”
낮다 못해 한없이 싸늘한 지서준의 목소리에 서둘러 티슈를 뽑아 여기저기 닦기 시작했다.
“F……father?”
“Yes. I am a father.”
폭탄과도 같은 발언에 지서준을 제외한 모두가 놀랐다.
“여자친구 있었습니까? 네? 배신이에요!”
그중 가장 많이 놀란 사람은 장우석 씨였다. 장우석 씨는 이경훈 연구원님을 붙잡고 마구 흔들어댔다.
“아, 머, 멀미 나요. 멀미.”
커다란 장우석 씨의 손에 흔들거리는 이경훈 연구원님은 꼭 종이 인형 같았다.
“경훈. 그럼 이제 결혼?”
이런 놀라운 소식에도 여전히 고기에 가는 젓가락질을 멈추지 않는 존 팀장님.
“네. 여자친구 배가 부르기 전에 서둘러 하려고요. 여기 계신 분들은 꼭 다 오셔야 해요!”
청첩장이 나오면 여자친구와 함께 식사 자리를 만들겠다는 이경훈 연구원님의 표정은 굉장히 행복해 보였다.
회식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집까지 데려다주겠다는 지서준과 함께 어렸을 때부터 함께 걸어오던 길을 걷고 있었다. 달라진 게 있다면, 서로 빈틈없이 맞잡고 있는 손이랄까.
“너는 알고 있었어?”
“이경훈 연구원 결혼?”
“응. 너만 안 놀라는 것 같아서.”
“알고 있었어.”
“의외네? 이경훈 연구원님이 너한테만 털어놓은 거야?”
“우연히 나한테 걸렸어.”
그래. 그쪽이 훨씬 자연스러웠다.
“이경훈 연구원님, 행복해 보였어. 그렇지?”
깜짝 결혼을 발표하며 행복해 보이던 이경훈 연구원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자 나도 기분이 좋아져 지서준의 손을 잡고 있던 손을 앞뒤로 흔들었다.
“응.”
“여자친구분 소개받을 때 나도 나가도 되나?”
“응.”
“기대된다. 그렇지?”
대답 없이 물끄러미 날 내려다보는 지서준.
“왜?”
“넌…….”
“응?”
“아니다. 춥다. 빨리 가자.”
“뭐야. 할 말 있었던 거 아니야?”
그러나 상한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물어버린 지서준이었다.
**
-앞으로 10분 뒤면 올해가 마무리됩니다. 시청자분들은 어떤 한 해를 보내셨을까요.
TV에서는 멋진 아이돌들의 무대가 펼쳐졌다. 이제는 누가 누군지 모르는 아이돌의 세계. 괜스레 서글퍼져 채널을 돌렸다.
다른 채널을 틀어보니 제야의 종소리를 듣기 위해 몰려든 인파 속에서 상황을 전달하고 있는 리포터의 모습이 보였다.
핸드폰 시계를 보니 이제 남은 시간은 9분.
올해의 마지막.
모든 해마다 마지막은 있다. 12월 31일.
그러나 오늘은 유난히 특별하게 느껴졌다. 20대의 마지막이라서 그런가. 아님, 지금은 누구보다 더 가까운 사이가 된 지서준 때문일까.
그래서 오늘이 기대됐다.
제야의 종소리를 듣고, 바로 동해로 쏘는 거야. 떠오르는 이글거리는 태양을 보며, 같이 맞이하는 30대는 어떨지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거지.
그렇게 계획했었다. 그런데…….
“맥주 더 마실 사람 있어요?”
“나 줘요. 서준 아빠.”
“이 사람이! 작작 마셔!”
“아니, 나 이제 한 캔밖에 안 마셨어…….”
억울한 아빠의 표정에 엄마가 물었다.
“그럼, 이건 다 누가 마신 거야?”
순간 10쌍의 눈이 나에게로 향했다.
내 손에는 이제 조금밖에 남지 않은 맥주캔이 찰랑거렸다.
“이 지지배가……. 너 몇 캔이나 마신 거야?”
그때 냉장고에서 시원한 맥주캔을 들고 오던 승호 아저씨가 껄껄 웃었다.
“이런 날은 고삐를 풀어줘야죠.”
“얘는 고삐 채워진 날이 별로 없는 애예요.”
옆에서 엄마의 반박에 나는 그저 맥주캔을 기울였다.
“얘, 지금 서준이랑 단둘이 여행 가려다가 우리한테 붙잡혀서 시위하는 거예요.”
“아니에요. 아줌마.”
나 대신 지서준이 대신 대답했다.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러 가겠다는 우리의 계획에 차질이 생긴 건 엄마 때문이었다. 막 나가기 직전, 엄마가 화장실에서 소리를 질렀다.
“다율아! 화장실 문이 안 열린다!”
“뭐? 왜?”
나는 현관문을 나서려다 말고 화장실 문고리를 돌렸다.
‘덜컥덜컥.’
소리만 요란스럽게 들리지, 열릴 생각을 하지 않는 문.
“안에서 잘 당겨봐!”
“아오……. 안 돼!”
코트까지 벗어가며 힘을 써 봤지만, 화장실 문은 전혀 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빠. 어디야. 화장실 문이 안 열려.”
-아빠 지금 승호 아저씨랑 회 사서 올라가는 중이야. 3시간 정도 걸릴 것 같은데?
문고리와 씨름을 했으나 문은 열리지 않았다. 결국, 아빠와 아저씨가 돌아올 때까지 나는 나갈 수 없었고, 지서준과의 약속은 깨져버렸다.
“내가 갇히고 싶어서 갇혔나.”
그렇게 엄마가 투덜거리는 사이. 새해를 알리는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
5. 4. 3. 2. 1.
-Happy New Year.
TV에서 들려오는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며 우리는 서로에게 새해 덕담을 했다. 그러다 지서준과 눈이 마주쳤다.
“잠깐 밖에 나가서 걷고 올래?”
그러자 승호 아저씨가 말했다.
“둘이 안 들어와도 된다! 하하하.”
아저씨의 웃음소리가 거실에 쩌렁쩌렁하게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