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결혼 준비는 어려워.
(83/97)
83화. 결혼 준비는 어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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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화. 결혼 준비는 어려워.
2023.04.16.
“저 왔어요.”
오늘은 집이 아닌 병원으로 퇴근했다. 병실에 들어가니 아저씨, 지서준, 그리고 우리 엄마까지 아줌마가 누워 있는 침대를 빙 둘러싸고 앉아 있었다.
“며느리 왔어!”
승호 아저씨는 날 발견하자마자 벌떡 일어나 반겼다.
“저 사람은 앞서가도 너무 앞서가.”
침대에 누워 있다가 내가 오자 몸을 일으킨 윤희 아줌마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나 아줌마의 얼굴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오늘 주치의 선생님은 뭐래요?”
“괜찮대! 다행이지 뭐야!”
내 질문에 엄마가 경쾌하게 대답했다. 지서준의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 보였다.
“아줌마 병원에서 나가면 할 일이 태산이야. 너희들 결혼 준비 시작해야지.”
“급하게 하지 않으셔도 돼요.”
가방을 내려놓으며 말하자 아저씨가 팔짱을 끼고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걱정하지 말아라. 이 아저씨가 준비해 놓은 게 있지.”
비장한 표정으로 저벅저벅 구석으로 걸어갔다. 작은 옷장 문을 열어 그곳에서 가방을 꺼내 뒤적이던 아저씨가 서류뭉치를 내게 건넸다.
“이게 뭐예요?”
“너희 사귄다고 했을 때부터 모아두었던 자료들이야.”
아저씨의 말에 파일을 열어 종이들을 훑어봤다.
“엄청나네.”
옆에서 고개를 쭉 빼고 종이에 적힌 것들을 읽던 엄마가 말했다. 엄마의 말대로 정말 엄청났다.
집 반경 몇 킬로미터 내 괜찮은 예식장들은 전부 모여 있는 것 같았다. 홀의 내부의 사진까지 첨부되어 깔끔하게 정리된 자료들이었다.
파일명은 무려 [버킷리스트. 애들 시집·장가 잘 보내기]였다.
“이것 들 다 어디서 구하신 거예요?”
“퇴근 후에 틈틈이 정리해봤지. 인기 있는 홀들은 1년 전에 예약하는 곳들도 많다고!”
아저씨가 내게 서류를 뺏어가 한 장을 빼 나와 지서준에게 보여줬다.
“이곳 참 좋지? 집에서 멀지도 않고, 얼마 전에 리모델링해서 깔끔하다고 하더라! 음식도 괜찮대. 전화해 보니 최대한 빨리 상담받으러 오라고 하던데?”
유명 대기업 부장님으로 계시다 아줌마가 암으로 판정을 받자 일을 그만두고 중소기업 임원으로 계신 아저씨. 일이 한가해졌다고 하더니 정말이었나보다.
“재능 낭비 아니에요?”
지서준이 아저씨의 자료들을 후루룩 훑어보며 말했다.
“재능 낭비라니. 이걸 하기 위해 회사에서 갈고닦은 실력이라고.”
엄마와 윤희 아줌마는 아저씨를 보며 혀를 찼다.
“그나저나, 너희 정말 결혼식은 언제 하려고?”
“아직 얘기를 안 해봐서…….”
사실, 지서준에게 프러포즈 받고 정신이 없었다. 힘들게 구한 호텔 방에서 잠도 못 자고 나와 지서준의 오피스텔로 간 뒤, 아줌마의 소식에 헐레벌떡 응급실로 달려갔다.
그러니, 앞으로 계획을 의논할 여유 따윈 없었다.
나와 지서준을 바라보던 아줌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천히 생각해. 너희 아직 어려. 이 사람 성화에 휘둘릴 필요 없어. 너희 둘이 충분히 상의해 보고 어른들한테 얘기해줘. 알겠지?”
“네.”
다음 날, 아줌마는 무사히 퇴원했다. 퇴원하고 처음으로 찾아간 아줌마는 기가 질린 표정으로 지서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앞으로 조심해야 할 것들을 냉장고를 비롯해 이곳저곳 포스트잇으로 붙여 놓고 그도 모자라 아줌마를 앉혀 놓고 몇 번이나 잔소리하고 있었다.
“다율아.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얘랑 결혼하는 거 다시 생각해봐.”
지서준은 그런 아줌마를 보고 펄쩍 뛰며 내 귀를 막으려 들었다. 그렇게 조금은 왁자지껄한 연초가 지나가고 있었다.
**
“기대된다. 이경훈 연구원님 예비 신부.”
“그러게.”
이경훈 연구원님이 얼마 전 청첩장을 돌렸다. 결혼식은 2월 말이었다. 너무 서두르는 것 아니냐는 내 말에 얼굴을 붉히며 예비 신부의 배가 불러오기 전에 식을 올리고 싶다고 말했다.
이경훈 연구원과 약속한 장소에 도착했다. 직원의 안내로 예약한 방으로 들어갔다. 방문이 열리니 이미 그곳에는 바이오 제1 연구팀 직원들이 도착해 있었다.
“어서 와요!”
거구의 팀장님이 기다란 팔을 번쩍 들어 올려 우리를 반겼다.
“저희가 늦었나 봐요.”
“아니요. 딱 맞게 오셨어요.”
이경훈 연구원님은 항상 웃는 얼굴이었는데, 오늘에서야 그냥 웃는 모습과 행복한 모습은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이쪽은 저와 결혼할 이수경이에요.”
“안녕하세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그녀의 인상은 참 단아했다. 수줍게 웃으며 인사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각자 자기소개와 인사가 끝나자 모두 자리에 앉았다. 곧 결혼을 앞둔 커플은 소곤소곤 대화하며 서로를 챙겼다.
“어? 문 대리님. 손에 그거 뭐예요?”
열심히 고기를 구우며 수경 씨 앞접시에 나르기 바빴던 이경훈 연구원님이 집게로 내 왼손을 가리켰다.
“아. 이건…….”
오늘 두 예비부부를 축하하는 자리. 주인공들에게 온전한 스포트라이트를 주려고 했던 내 계획은 그렇게 쉽게 무산이 됐다. 빼고 온다는 걸 이제는 익숙해져 버린 반지에 깜빡 잊고 말았다.
“설마! 지 수석님, 프러포즈하셨어요?”
옆에서 무아지경으로 갈빗대를 뜯고 있던 장우석 씨의 눈이 댕그래졌다.
“네. 제가 프러포즈했습니다.”
“Oh, my…….”
조금 걱정했던 것과는 다르게 수경 씨를 비롯해 바이오 1팀 전원이 자기 일처럼 축하해줬다.
“우리 팀에 이제 솔로는 Mr.장이랑 저예요. 힘내요!”
“저보단 팀장님이 더 급하시죠.”
“나는 천천히 해요.”
팀장님과 장우석 씨가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바라보던 이경훈 연구원님이 비어 있는 지서준의 맥주잔에 맥주를 채웠다.
“결혼은 제가 선배님인 거 아시죠? 혹시 물어볼 일 있으시면 물어보세요! 제가 친절히 가르쳐드리죠.”
이경훈 연구원님의 너스레에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자주 물어볼지도 몰라요. 귀찮아하지만 마세요.”
이경훈 연구원님과 수경 씨의 러브스토리는 흥미진진했다. 초등학교 동창회에 나간 이경훈 씨는 오래전 짝꿍인 수경 씨가 자꾸 눈에 들어왔다고 했다. 물론, 수경 씨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고…….
“자꾸 쳐다보길래 또 무슨 장난을 치고 싶어서 저러나 불안했어요.”
어렸을 적 말도 안 되게 개구쟁이였던 이경훈 연구원님은 수경 씨도 꽤 괴롭혔다고 했다.
“좋아해서 괴롭힌 거 아니에요?”
“그러면 경훈이는 우리 반 여자애들을 다 좋아했던 거예요.”
“아…….”
수경 씨의 말에 멋쩍어하며 뒤통수를 긁적이는 이경훈 연구원님이 중얼거렸다.
“제가 좀 짓궂긴 했죠.”
옆에서 귀 기울여 듣던 존 팀장님이 짓궂다는 뜻을 물었고, 지서준이 친절하게 영어로 설명했다. 그러자 먹던 숟가락을 테이블 위에 탁하고 내려놨다.
“좋아하는 여자를 괴롭히는 건 겁쟁이입니다.”
내가 만나 본 이래로 가장 진지한 존 팀장님.
“경훈! 겁쟁이입니까?”
급발진하는 팀장님을 말리는 장우석 씨와 이경훈 연구원님,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익은 고기를 후후 불어 나에게 건네는 지서준의 모습이 꼭 시트콤 같았다.
그 후 호감이 생긴 이경훈 연구원님이 수경 씨에게 가까이 다가가려 했지만, 그녀의 철벽은 생각보다 단단하고 높았다고 했다.
“메시지 하나 보내기가 얼마나 힘들었던 줄 아세요?”
이경훈 연구원님이 과거의 본인을 동정했다.
“사내 체육대회 기억하세요? 집에 가는 길에 우연히 만났잖아요.”
이경훈 연구원님의 말에 그날 일이 떠올랐다. 지서준을 만나러 가는 길, 집까지 데려다준다며 질척거리는 이경훈 연구원님을 간신히 떼어 놓았었지.
“아. 그날…….”
“그날 문 대리님에게 고민 상담 좀 하려고 했었는데. 꼭! 대로변에서 내려야 하신다고……. 사실 저는 그때 알아차렸죠.”
“뭐, 뭘요?”
“두 분이 사귄다는 사실을.”
나와 지서준은 서로를 바라봤다.
그날, 이경훈 연구원님의 차에서 내렸다고 질투한 지서준의 모습이 떠올라 웃음이 났다.
“그럼, 경훈 선배는 미리 알고 있었던 거예요? 배신자.”
“배신자.”
팀장님과 우석 씨가 이경훈 씨를 비난하기 시작하자 이경훈 연구원님은 펄쩍 뛰며 그들에게 그럴 수밖에 없었던 본인을 변호했다.
“두 분은 어떻게 만나신 거예요? 경훈이한테 어렸을 적부터 친구였다는 말은 들었는데.”
옆에서 어떤 소동이 일어도 침착한 수경 씨.
“저랑 지서준은 갓 태어나서부터 친구였죠. 엄마랑 아줌마. 아, 그러니까 지서준의 어머니가 산부인과를 같이 다니셨거든요.”
“네? 그럼 태어났을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네요!”
수경 씨에게 우리의 역사를 짤막하게 설명했다. 그녀는 연신 반짝이는 눈빛으로 우리가 대단한 인연인 것처럼 감탄했다.
대단한 인연인가.
그녀의 눈빛 때문인지 우리의 역사를 짧게 훑어보는 동안 정말로 우리가 한편의 로맨스 영화의 주인공 같았다.
“그럼 두 분이 연인 사이가 된 계기는 뭐예요?”
계기?
나는 순간 우리의 첫날밤이 떠올랐다.
“괜찮으세요? 얼굴이…….”
화끈거리는 얼굴에 나는 연신 손부채질했다.
“갑자기 술이 올라오네요. 하하.”
다행히 내 핑계는 의심받지 않았다. 안타까운 건 내 핑계로 더는 내게 술을 권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자리가 한참 무르익을 무렵. 이경훈 연구원님이 물었다.
“그럼, 두 분 결혼식은 언제 하시는 거예요?”
“6월로 생각하고 있어요. 아직, 여유 있죠?”
“여유요?”
이경훈 연구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결혼 준비 지옥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그렇게 우리 두 사람은 본격적으로 결혼 준비에 들어갔다.
**
웨딩 플래너와 만났다. 결혼 예정 날짜까지 여유 있다고 생각했던 내 생각은 무참히 박살이 났다. 박살 난 내 계획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옆에 앉아 있던 지서준이 팔짱을 끼고 날 물끄러미 바라봤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우리 그냥 식 올리지 말까?”
내 말에 지서준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그게 무슨 말이야.”
“결혼하지 말자는 게 아니고……. 결혼식을 하지 말까? 결정할 일들이 뭐가 이렇게 많지?”
승호 아저씨가 준 자료들 말고도 웨딩 플래너가 내민 자료들도 많았다. 모두 나의 선택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난 또 결혼하지 말자고 하는 줄 알았네.”
“무슨 소리야. 내가 너랑 결혼을 왜 안 해.”
나는 지서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내 머리를 토닥이던 지서준.
“많이 힘들어? 진짜 결혼식 하지 말까?”
“아니. 할 거야.”
내가 안 한다고 한다면 어른들이 무슨 소리를 하든 하지 않을 놈이었다. 그렇기에 지서준이 저리 물을 때 답변은 신중해야 한다.
“그럼 내가 어떻게 해주면 될까? 응?”
소맥처럼 부드러운 지서준의 목소리. 맛있게 구워낸 야들야들한 소고기 같은 마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몰라.”
그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투정만 흘러나왔다. 요즘은 항상 그랬다. 결혼 준비를 시작하고 나서 이것저것 신경 쓸 것도 많아졌다.
내 결혼 소식에 축하해 주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의외로 빈정거리는 사람들도 많았다. 어쭙잖은 어부가 대어를 낚았다나 뭐라나.
땡.
전자레인지가 제 할 일을 다 했다며 소리를 냈다. 지서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전자레인지 문을 열어 내용물을 꺼냈다.
“다이어트 안 하면 안 돼?”
전자레인지에 돌린 닭가슴살을 먹기 좋게 잘라주며 지서준이 말했다.
사실, 내가 요즘 제일 스트레스를 받는 건 다이어트였다. 결혼식은 아직 시간이 있다고 해도, 결혼사진 촬영까지는 정말로 얼마 남지 않았다.
“안 돼. 예뻐 보이고 싶단 말이야.”
남들은 결혼하면 몇 번 보지도 않는 사진첩. 비싼 냄비 받침이라는 소리를 들었지만, 내 옆에 있는 놈이 누군가. 미모로는 어디 가서 빠지지 않는 남편을 두었으니 살이라도 바짝 빼야 할 것 같았다.
그러는 내 속도 모르고 치킨이나 시켜 먹자고 하고.
“너는 그냥 일반식 먹어.”
“어떻게 그래. 나 혼자.”
지서준도 본인의 닭가슴살을 가져와 내 앞에 앉았다. 그러고 보니, 내가 다이어트를 시작한 이후로 이놈의 몸이 더욱 좋아졌지.
내가 빠끔히 지서준의 가슴팍을 보고 있자 슬쩍 팔로 내 시선을 차단했다.
“오늘은 안 돼.”
“왜.”
“너 보내고 새벽에 화상 회의 있어. 회의 준비도 해야 해.”
“쳇.”
나는 아쉬운 마음에 입맛을 다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