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4화. 메리지 블루에는 바다. (84/97)


84화. 메리지 블루에는 바다.
2023.04.19.



“회의는 회의고, 사랑은 사랑이지. 일과 사랑을 동시에 잡는 사람이 되어보는 건 어때?”

“그렇게 불붙여놓고 항상 먼저 도망가는 사람이 누구더라.”

지서준의 말에 유혹의 몸짓을 멈췄다.

에이. 내가 좋아하는 운동도 오늘은 텄다. 밍밍한 닭가슴살을 우걱우걱 씹고 있자 지서준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너무 스트레스받지 말자. 서로 행복하려고 결혼하는 건데, 이렇게 너 스트레스 받는 거 보니까 내가 힘들어.”

“힘들어?”

나는 힘들다는 지서준의 말에 무언가 툭 끊기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네가 일 많으니까 내가 대부분 혼자 결정하고 알아보는데, 뭐가 힘들어?”

멈춰. 아니야. 문다율 거기서 그만해.

뇌 속 구석으로 몰린 이성이 나를 말렸다. 하지만 나는 그 작은 이성을 발로 뻥 차버렸다. 멀리 날아가는 이성을 바라보며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내 입이 주절주절 내뱉기 시작했다.


“문다율.”

지서준이 진정하라는 듯 나를 지그시 불렀다. 그러나 망아지처럼 날뛰는 내 주둥이는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내가 이뻐 보이고 싶어서 그래! 다이어트 힘들어서 그래? 그러게, 너보고 누가 같이 식단 조절해 달랬어?”

씩씩거리는 나를 보며 지서준이 나를 달래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잡지 마!”

“아직 안 잡았어.”

“우씨. 너, 닭가슴살 먹지 마. 너는 치킨 시켜 먹어.”

나를 잡으려는 지서준의 팔을 뿌리치고 남아 있는 닭가슴살을 모두 내 입으로 집어넣었다. 지서준의 몫까지.


“나눙 강다!”

뛰쳐나온 닭가슴살이 허공을 날랐다. 씹던 닭가슴살 파편에 지서준이 흠칫 놀라며 뒷걸음질 치는 것이 보였다.

그런 지서준을 남기고 가방을 들고 오피스텔에서 나왔다. 엘리베이터가 닫히기 전. 지서준이 급하게 현관문을 열고 나오는 것이 보였지만, 나는 잽싸게 닫힘 버튼을 눌러댔다.

엘리베이터 안, 층을 나타내는 숫자가 내려가는 것을 보자 눈물이 핑 돌았다. 눈물을 삼키며 입 안에 가득 든 닭가슴살을 열심히도 씹어댔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하고, 문이 열렸다. 엘리베이터를 내리며 꿀꺽 닭가슴살을 목으로 넘기는 순간, 핸드폰 진동이 울리는 것이 느껴졌다.

지서준이었다.

나는 연락처를 열고 고주연과 도이라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나랑 놀고 싶은 사람 어딨니.]

 

 

**



“너 메리지 블루야?”

“그게 뭐야?”

“결혼 전 느끼는 우울감이나 불안감? 뭐 그런 거.”

빨대를 이빨로 자근자근 씹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가? 곰곰이 생각해보니 요즘 들어 짜증도 나고 괜스레 불안해져 지서준과 엄마에게 꽤 투덜거렸던 기억들이 스쳤다.


“내가 보기에 그렇게 잘 맞춰주는 예비 신랑도 없는 것 같은데, 너는 뭐가 문제야.”

“넌 내 친군데 내 편 안 들어주냐?”

“나이가 몇 갠데 편 가르기야. 그리고 네가 잘한 게 뭐가 있어. 같이 다이어트 식단까지 해주는 남자친구가 흔한 줄 알아?”

“힘들다고 하니까…….”

“너는 힘들다고 말 안 해?”

나는 고주연과 도이라의 말에 그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모두 맞는 말이었다.


“결혼 준비 힘들지. 내 주변 사람들도 결혼 준비하다가 많이 싸우더라.”

“내 인생에 큰 전환점인데, 쉬울 리가 있냐. 그리고 돈이 한두 푼 나가?”

“사과해야겠지?”

“당연하지!”

나는 주섬주섬 내 가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어제 지서준이 내 가방을 털어서 그런 것인지 깨끗하게 정돈된 가방에서 핸드폰을 찾는 건 쉬웠다.


“어? 나 핸드폰 배터리 나갔다.”

“얘가 요즘 진짜 정신이 없나 보네.”

나는 구박하는 고주연을 무시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카페 사장님께 핸드폰 충전기를 빌렸다. 충전기에 꽂아놓고 다시 자리로 돌아오는데 도이라가 날 급하게 불렀다.


“지서준 전화 왔다!”

내게 넘겨진 도이라의 핸드폰. 도이라의 액정에는 [잘생긴 왕재수]라고 적혀 있었다. 내가 도이라를 흘기자 조만간 바꾸겠다며 내게 어서 전화를 받으라고 재촉했다.


“여보……세요.”

“문다율? 문다율 맞지?”

“응…….”

“왜 전화는 안 받아? 어디야?”

“핸드폰 배터리 나갔어. 지금은 애들이랑 같이 카페에 있어.”

“하…….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집에 전화하니까 너 안 왔다고 그러지, 고주연은 전화도 안 받지.”

“미안…….”

“잠깐 도이라 좀 바꿔봐.”

나는 핸드폰을 도이라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도이라가 자신을 가리켰다.


“나?”

“응. 지서준이 전화 받으래.”

“뭐야. 갑자기 불안하게…….”

떨떠름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건네받은 도이라가 조심스럽게 귓가로 가져갔다.


“응? 어. 응……. 괜찮아. 응. 뭐? 그때까지? 아. 알았어. 응.”

한참을 응응거리다 전화를 끊은 도이라.


“지서준이 뭐래?”

고주연이 바짝 귀를 가져대 댔지만, 내용은 자세히 듣지 못했는지 도이라에게 물었다.


“얘 붙들고 있으래. 회의만 끝나면 바로 온다고.”

붙들려 있던 건 내가 아니라 도이라와 고주연이었다. 생각보다 늦어지는 지서준에 우리는 자리를 옮겼다.


“너는 술도 마시지 않을 거면서 술집에는 왜 오자고 해!”

호프집. 내가 좋아하는 안주들을 깔아놓고 나는 그저 강냉이만 씹어대고 있었다.


“대리만족? 일종에 먹방을 보는 심리랄까. 어서 마셔. 맥주 미지근해지겠다. 알지? 맥주 미지근해지면 맛없는 거. 빨리빨리 목구멍을 열어라. 이것들아.”

내가 좋아하는 안주와 시원한 생맥주를 시킨 나는 그저 맹물에 강냉이만 먹으며 그들을 구경한 지 1시간 반 정도가 지났다.

딸랑거리는 방울 소리와 함께 지서준이 안으로 들어왔다.

어두운 호프집 조명에도 잘생긴 놈.

저벅저벅 걸어오는 내 예비 신랑에게 도이라와 고주연이 인사했다.


“야. 쟤 왜 저렇게 몸이 좋아졌어? 어?”

도이라가 내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문다율 너는 치킨 먹고 쟤는 닭가슴살만 먹었니?”

도이라의 계속되는 말에 내가 노려보자 내 눈을 피하며 아직도 차가워 보이는 생맥주를 꼴깍꼴깍 마셔댔다.

가까이 다가온 지서준. 나를 잠시 바라보던 그가 도이라와 고주연에게 말했다.


“고맙다. 도이라, 고주연.”

“그럼, 이걸로 너희 결혼 선물 퉁?”

고주연이 먹다 만 닭다리로 생맥주잔을 튕겼다.


“너, 내 주먹에 퉁 하고 맞아 볼래?”

“아니. 농담이지 농담. 하하.”

분명 첫 번째로 결혼하는 친구에게 TV를 선물하기로 했던 우리 세 사람이었다. 사실, 내가 첫 번째로 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는 두 친구였다.

고주연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는 내 옆에 지서준이 살포시 앉았다. 달려왔는지 조금은 숨차 보이는 지서준이 내 앞에 놓인 물을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다 마셨어?”

호프집에 들어와서 조심스럽게 나를 흘끔거리던 지서준이 물었다. 테이블 위에는 누가 봐도 많이 남아 있는 맥주와 치킨이 있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조급해 보이는 지서준의 태도에 도이라가 미친 사람처럼 웃었다.


“진짜 지서준 이런 모습을 우리가 볼 줄 알았냐. 문다율 때문에 희귀영상 보는 것 같네.”

눈물까지 흘리며 지서준을 보고 웃는 도이라는 고주연에게 허벅지가 꼬집히자 겨우 웃음을 멈출 수 있었다.


“가. 우리끼리 더 마시지 뭐. 문다율 데리고 가도 된다.”

도이라의 허벅지를 꼬집던 고주연이 지서준에게 말했다. 고주연의 말이 끝나자마자 지서준이 내 팔을 잡았다.


“가자.”

“어? 어딜…….”

“일어나.”

나는 지서준의 성화에 가방을 들고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을 흔드는 고마운 두 친구에게 인사하고 호프집을 나섰다.


“타.”

호프집 근처 주차장. 지서준의 차가 있었다.


“어디 가는 지 말 안 해줘?”

묵묵부답.

나는 지서준에게 묻기를 포기하고 차에 올랐다. 내가 탄 걸 확인하자 지서준이 차 시동을 켜고 안전벨트를 맸다.


“바다 보러 가자.”

“지금?”

“응.”

차가 부드럽게 앞으로 나아갔다. 점점 서울 외곽으로 빠지는 길이 나타나고 어느 순간 지서준의 차는 고속도로에 올라탔다.

서울을 벗어나자 차는 막힘이 없었다. 부드럽게 나가는 차 안.


“회의는 잘했어?”

“응. 좀 급하게 끝내긴 했지만, 잘 마무리했어.”

“바다는 갑자기 왜?”

“내일 토요일이잖아. 가서 바람 좀 쐬고 오자.”

평소와 같은 지서준의 모습에 몇 시간 전 그에게 짜증을 부리고 나온 내 모습이 부끄러웠다.


“미안해. 아까 짜증 내서.”

“그럴 수도 있지.”

지서준이 앞에 시선을 고정한 채 내 머리를 헝클였다.


“오늘 바다 보고 답답한 거 훌훌 털고 오자. 가서 맛있는 것도 먹고.”

그렇게 달리기를 2시간. 중간에 휴게소에 들러 화장실을 간 것 말고는 계속해서 달렸다. 늦은 밤이라 컴컴한 고속도로에는 지서준의 차만 열심히 내달리고 있었다.

한적한 바닷가.

이 계절의 바다는 바람이 거세고 추울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바람이 많이 불지 않았다. 적당한 바람이 짠 내를 싣고 왔다.

아직 겨울이 남아 있는 계절. 겨울과 봄의 경계에 있는 계절은 설렘과 아쉬움을 느끼게 했다.

바다가 잘 보이는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컴컴하기만 할 줄 알았던 바다는 고기를 잡는 어부들의 빛으로 반짝였다.


“좋다!”

잔잔한 바다. 그 위에 새벽의 피곤함 따윈 잊은 듯한 어선들의 모습. 구름 사이에 비치는 달빛에 꼭 다른 세계에 온 것 같았다.

차 트렁크를 열어 나란히 앉아 바닷바람을 만끽했다.


“커피 마실래?”

“커피? 여기 근처에 편의점이 있어?”

아무리 둘러봐도 상가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데 어디서 커피를 구한다는 건지. 지서준이 트렁크 뒤에 있던 짐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짜잔.”

지서준의 가방에는 작은 랜턴과 이소 가스통, 버너 등 캠핑 도구들이 있었다.


“너랑 캠핑 가려고 조금씩 모으고 있었지. 저번에 좋아했잖아.”

능숙한 동작으로 이것저것 만지던 지서준. 트렁크 안에 예쁜 랜턴까지 걸리자 분위기가 더욱 깊어졌다.


“이경훈 씨도 그러더라. 수경 씨도 엄청 예민했대. 그래서 싸우기도 많이 했다고 하더라.”

2주 전 결혼한 이경훈 연구원님은 훤해진 얼굴로 여전히 S.T 회사를 돌아다니며 마당발 역할을 해내고 있었다.

그의 결혼식에는 꽤 많은 회사원이 참석했다. 우리 회사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의 친구로 보이는 사람들도 많았다. 하객들로 북적북적한 결혼식이었다.

이경훈 연구원님의 결혼식 하객 중 여자 하객들이 자꾸만 지서준을 흘끔대서 옆에 꼭 붙어 있었더랬지.


“수경 씨도 예민했대?”

“응. 그래서 그런지, 이경훈 씨가 결혼 임박해서는 빨리 결혼식 치르고 싶다고 징징거렸어.”

“뭐 때문에 싸웠는데?”

“음……. 그건 나도 기억이 안 난다. 워낙 여러 가지가 있어서.”

커피 물이 다 끓었는지 작은 주전자 주둥이에서 수증기가 뿜어져 나왔다.


“손 조심해.”

“응.”

지서준의 가방에는 예쁜 컵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인스턴트커피가 담긴 컵에 뜨거운 물을 쪼르르 부었다.


“자.”

인스턴트커피인데도 향이 듬뿍 올라왔다. 파도 소리와 커피. 너무나 완벽한 조화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