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남사친과 실수는 추천하지 않습니다.
(85/97)
85화. 남사친과 실수는 추천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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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화. 남사친과 실수는 추천하지 않습니다.
2023.04.23.
향긋한 커피와 들려오는 바닷소리. 차분해지는 마음에 나는 다시 한번 지서준에게 사과하려 입을 열었다.
“내가 많이 예민했지.”
“아니.”
“솔직히 말해.”
“……조금?”
솔직하게 말하래서 솔직하게 대답하곤 슬쩍 내 눈치를 보는 지서준. 그 모습이 귀엽기도, 미안하기도 했다.
“이리 가까이 와.”
나는 지서준을 가까이 잡아당겨 팔짱을 꼈다. 예전보다 더 두툼해진 팔뚝을 꼭 끌어안았다.
“미안해.”
“자꾸 미안하다고 하네.”
조심스럽게 커피잔을 내려놓은 지서준이 내 어깨를 감쌌다.
“그럴 수 있지. 나도 예민해질 때도 있는데 뭐. 그런데 뭐 하나만 부탁해도 될까?”
“뭐?”
내 머리 위에 지서준이 본인의 머리를 얹었다. 이리 가볍나. 목에 힘준 거 아닌가? 눈을 옆으로 굴려 지서준의 기다란 목을 바라보니 실해 보이는 목젖이 보였다.
‘꿀꺽.’
“배고파?”
“아, 아니.”
나도 모르게 삼킨 침이 크게 들렸나 보다.
“부탁한다는 게 뭐야.”
목젖을 보고 엉큼한 생각을 했다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 잽싸게 물었다.
“아무리 나한테 화가 나도 핸드폰은 꺼 놓지 마.”
“그건……. 배터리가 다 된 줄 몰랐어. 미안해.”
“배터리 확인도 자주자주 하고.”
“응.”
나는 찬 바람에 알맞게 식어 버린 커피를 한 모금했다. 식었어도 여전히 맛있는 커피. 잔잔한 파도에 귀를 기울이다 갑자기 궁금증이 일었다.
“근데, 지서준. 나 언제부터 좋아했어?”
너무 늦은 질문일지 모르겠지만, 이 생각은 꽤 오래전부터 문득문득 떠올랐다.
무심하기만 했던 지서준이 직진남에서 다정한 남자친구가 되고 나의 예비신랑이 되기까지 참 많은 일이 있었다. 그동안 많이 안다고 생각했던 지서준의 새로운 모습도 참 많이 발견했더랬지.
“한국에 돌아와서 너 처음 본 날.”
“뭐?”
나는 지서준의 말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어 지서준을 바라봤다.
“집에 딱 들어서는 순간, 네가 있는데 반가운 걸 넘어서 다른 감정이 생기는 거야. 나도 얼마나 당황했는지 알아?”
왜 부끄러워하는 거야. 귀엽게.
귀 끝이 붉어진 지서준이 귀가 홧홧한지 자신의 귀를 잡아당겼다.
“왜? 무슨 감정?”
“몰라. 안 가르쳐줄 거야.”
새침한 매력까지. 이놈이 가지지 못한 매력이 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진짜 말 안 해줄 거야?”
“앞으로 네가 날 많이 사랑하고 있구나. 그렇게 느낄 때마다 하나씩 오픈할래.”
뭐. 결혼하면, 남는 게 시간이니 천천히 알아가 볼 수 있겠지. 나는 빠르게 커피잔을 바닥에 내려놓고 지서준을 와락 껴안았다.
“안 되겠다. 너 이제 그만 예뻐져. 결혼식 때 다들 너만 보면 어떻게 해. 화려한 드레스는 내가 입는데 스포트라이트는 네가 다 받겠네. 너는 이제 다이어트 끝! 나만 할 거야.”
“하하. 알았어. 이제 치킨은 나만 먹을게.”
그렇게 우리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아침에는 국밥이지.”
이야기를 나누다 차에서 2시간쯤 눈을 붙였다. 한껏 쭈그리고 자느라 몸이 쑤셔 눈을 떴더니 이미 해는 두둥실 떠올라 찬란하게 바다를 비추고 있었다.
해가 뜬 바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우렁차게 들렸다. 밥이라도 먹고 서울로 출발해야 할 것 같아 곤히 자고 있는 지서준을 깨워 근처 국밥집으로 들어갔다.
허름한 간판과 외관. 미닫이 은색 철문. 이곳은 맛집이 틀림없었다.
이상한 맛집 찾는 기준이라며 지서준이 툴툴거렸지만, 딱히 이곳 말고는 문을 연 가게가 없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할아버지는 TV를 시청하고 계셨고, 할머니는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며 손님을 맞았다.
가게 정 중앙. 언제부터 놓여 있었는지 모르는 녹슨 난로 위에 주전자가 입김을 뿜어내고 있었다.
너무 이른 시간이었던 걸까. 좁은 가게에는 젊은 커플 말고는 손님이 없었다.
“사장님. 여기 국밥 두 그릇이요.”
음식을 주문하고 지서준이 물컵에 물을 따랐다. 그냥 맹물이 아닌, 고소한 보리차. 역시, 이 집은 맛집이 틀림없었다. 잔뜩 기대에 차 보리차를 홀짝이는데 바로 뒤에 앉은 커플의 대화가 들려왔다.
“다시는 집 나갈 생각하지 마.”
“…….”
“대답 안 하지?”
대화를 엿듣고자 한 건 아니었지만, 열린 귀에 자연스럽게 들어오는 대화 내용에 나도 모르게 그들을 흘긋 바라보았다.
고등학생? 자세히 보니 솜털이 보송보송한 아이들이었다. 많이 쳐봤자 20대 초반. 그러나 내 눈에는 아무리 봐도 그들은 고등학생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나저나 집을 나왔다고?
고등학생 때 집 나왔던 흑역사가 다시금 떠올랐다. 아니나 다를까 지서준도 그들의 대화가 들렸는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아마 같은 생각을 한 거겠지.
“여자애가 겁도 없이……. 부모님 걱정할 건 생각도 안 해?”
“엄마 아빠는 나 걱정 안 해.”
“그게 무슨! 하……. 너 아직도 초딩이야?”
“그럼 너는 유딩이야?”
“너랑 말싸움하는 내 입만 아프지.”
저들의 대화에 고등학교 때 티격태격하던 우리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다시 그들을 흘긋 바라봤다. 여자는 뒷모습만 보였고, 그녀 앞에서 열심히 설교하고 있는 남자만 보였다.
물론, 여자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모습이었다. 뒷모습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잘생겼네.”
내 말에 열심히 김치를 자르던 지서준이 나를 바라봤다.
“너 말고. 잘생긴 사람이 이 세상에 너 하나야?”
내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 웃던 지서준은 다시 먹기 좋게 김치 자르는 일을 계속했다.
“대화 엿듣는 거 너무 예의 없는 거 아니야?”
지서준이 내게 작게 말했다. 그나저나 엿듣다니! 그저 작은 국밥집 안에 가까운 자리라 잘 들렸던 것뿐인데…….
조금은 억울했지만, 지서준의 말에도 일리가 있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이제 막 나온 국밥에 집중했다.
역시, 내 예상은 맞았다.
깊은 국물에 인심 가득한 건더기. 이런 국밥집을 찾은 나를 칭찬해 주고 싶었다.
그들은 밥 먹는 내내 종알종알 대화했지만, 나는 최대한 그들에게 신경을 쓰지 않으려 노력했다. 입은 국밥을 먹기 바빴지만, 귀는 바쁠 일은 없었기에 자꾸만 들려오는 그들의 대화를 듣지 않으려 노력해야 했다.
어느새 그 커플이 밥을 다 먹었는지 주섬주섬 짐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16,000원이요.”
“네. 잠시만요.”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남자가 당황하기 시작하며 열심히 가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뭐야. 너 지갑 없어?”
“아니, 있었는데……. 잠깐만. 이상하다.”
저 가방 안을 저렇게 뒤졌는데도 나오지 않는 건 지갑이 없다는 거겠지. 역시나 몇 번 같은 곳을 뒤적이던 남자가 엄청 곤란한 표정으로 할머니께 물었다.
“저 혹시 인터넷뱅킹 되나요?”
“그게 뭐야! 우리는 그거 모르는데? 돈 없어? 아니, 돈도 없이 밥을 먹어?”
“아. 그게 아니고……. 제가 분명 지갑이 있는 줄 알았거든요? 자, 잠시만요. 다시 찾아볼게요.”
“뭐야. 잘 찾아봐.”
정말로 한적한 시골, 그것도 한참 구석에 있는 허름한 국밥집.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운영하시는 듯한 이 국밥집은 아무래도 인터넷뱅킹으로 계산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딱 보니, 학생들인 것 같은데, 그냥 보내 줘.”
TV를 보던 할아버지가 할머니에게 말하자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홱 노려봤다.
“잠깐만.”
얼마 남지 않은 국밥. 나는 먹던 숟가락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에게 다가갔다.
“할머니 16,000원이요? 이분들 먹은 거랑 저희 것까지 한꺼번에 계산할게요.”
나는 지갑에 있는 오만 원짜리 지폐를 내밀었다.
그제야 할아버지와 젊은 커플을 노려보던 할머니의 표정이 풀리며 내가 내민 지폐를 받았다.
“젊은 사람들이 정신을 어디에다 두고 댕기는 거야.”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허리를 숙이며 ‘죄송합니다.’와 ‘감사합니다.’를 연달아서 하던 두 사람은 내가 괜찮다고 하는데도 굳이 내 계좌를 물었다.
단호한 남자의 표정에 나는 내 계좌를 불렀고 조금 뒤 16,000원이 입금되었다는 문자메시지가 내 핸드폰에 찍혔다.
그 순간 왜 어린 지서준이 떠오르는 건지. 나는 그들에게 돈이 들어온 메시지를 보여주었다.
“돈, 들어 왔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마지막까지 예의 있게 인사하고 나서는 두 사람. 그들이 나가는 모습을 보다 내 자리로 돌아왔다.
“저 사람들 당황했겠네.”
“응. 요즘 현금 들고 다니는 사람 많이 없지.”
“잘했네. 문다율.”
지서준이 나를 칭찬하며 김치를 내 숟가락 위에 올렸다. 칭찬받은 나는 싱긋 웃으며 김치가 올라간 국밥을 입을 크게 벌려 입에 넣었다.
남은 것까지 다 먹고 나서 우리는 국밥집을 나섰다.
오랜만의 포식으로 배가 뽈똑 튀어나왔다. 왜 다 먹고 나서 갑자기 다이어트 생각이 드는 건지. 움직여야겠다는 생각에 낡은 자판기에서 커피 한 잔을 뽑아 잠시 걷기로 했다.
“어? 아까 그 커플이네?”
“그렇네.”
바닷가를 따라 이어진 도로. 얕은 절벽을 가로막는 돌로 만든 가드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이 보였다.
“저 두 사람. 고등학생이다?”
“어떻게 알아?”
“아까 가방 뒤질 때 교과서랑 문제집 나오더라.”
참 열심히도 관찰했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지서준.
“두 사람 보니까 우리 옛날 생각나지 않아?”
“내가 더 잘생겼지.”
아까 내가 했던 말에 꽁해 있던 건지 생전 자랑한 적 없던 외모를 자랑했다. 반박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현실에 씁쓸해져 나는 말없이 커피를 홀짝였다.
그때, 그 두 사람 중 여학생이 우릴 발견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꾸뻑 인사했다. 요즘 저렇게 인사성이 밝은 친구들이 있었던가.
돈이나 뺏지 않으면 다행이지. 다시 떠오르는 놀이터 사건이 떠올라 나는 살짝 몸이 떨렸다.
“또 뵙네요. 아까는 정말 감사했습니다.”
“아니요. 돈까지 부쳐줬는데요. 뭘. 그나저나 둘이 여행하러 온 거예요?”
내가 묻자 뭘 그런 걸 묻냐며 팔꿈치로 나를 쿡 찍는 지서준.
“아니요. 얘가 가출해서 붙잡으러 왔어요.”
“야!”
남학생이 말하자 여학생이 얼굴을 붉히며 잽싸게 입을 막으려 했다.
“그렇구나. 나도 고등학교 때 가출한 적 있었는데. 하하하.”
내가 크게 웃으며 말하자 지서준이 옆에서 자랑이냐며 혀를 찼다. 그래도 내 말에 경계가 많이 풀렸는지 여학생이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말했다.
“그냥, 답답해서 나온 거예요. 가출할 생각은 아니었다고요.”
그 모습을 가만히 보던 지서준이 남학생에게 말했다.
“여기서 집까지 갈 돈은 있어요?”
“아. 다행히 버스카드는 있어서요. 괜찮을 것 같아요. 터미널 근처로 가면 편의점에서 현금인출 하면 될 것 같아요.”
참 똑똑하고, 지서준 같은 답변이었다. 나는 남학생을 향해 엄지를 추켜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