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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화. 남사친과 실수는 추천합니다. (86/97)


86화. 남사친과 실수는 추천합니다.
2023.04.26.


내가 내민 엄지를 보고 머리를 긁적이던 남학생이 입을 열었다.

터미널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출발하는 버스로 올라탔다는 두 사람. 버스는 계속해서 인적이 드문 시골로 들어갔고, 눈치를 보다 급하게 내린 곳이 이곳이라 했다.


“아까 동네 어르신께 여쭤보니 두 시간 뒤에 터미널로 나가는 버스가 있대요. 그거 타면 될 것 같아요.”

똑 부러진 남학생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지서준이 자판기 커피를 권했다. 그러자 흘끔 여학생을 보던 남학생이 그럼 신세를 지겠다며 허리 숙여 인사했다.


“언니. 언니 남자친구예요?”

두 사람이 커피를 뽑으러 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여학생이 물었다.


“조만간 결혼해요.”

“우와.”

순수한 그녀의 모습에 웃음이 났다.


“이름이 뭐예요?”

“저는 해나요! 정해나. 쟤는 김산. 쟤가 형제만 있거든요? 큰형은 강, 막내는 산들. 그래서 동네에서 강산들 형제로 유명해요.”

신이나 산이를 소개하는 해나.


“해나는 산이랑 커플?”

“아니요! 절대! 어디 가서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큰일 나요.”

내 말에 펄쩍 뛰는 그녀의 모습을 보자 다시 웃음이 나왔다.


“그럼 그냥 남사친, 여사친?”

“네! 쟤랑은 유치원 때부터 친구예요. 산이랑은 절대! 절대 그런 사이 아니에요!”

나는 왜 그녀의 강한 부정이 좋아하는 마음을 감추기 위한 방어로 보이는 걸까. 마냥 귀엽기만 한 모습에 내가 배시시 웃자 다시 한번 절대 아니라고 강조하는 해나였다.


“두 분은 어떻게 만나신 거예요?”

내 표정을 보던 해나 학생이 급하게 화제 전환을 했다.


“해나랑 산이 학생이랑 비슷한데……. 근데 우리는 그것보다도 훨씬 전에. 그러니까 태어났을 때부터 친구였어요.”

“대박.”

투명한 그녀의 반응에 나는 다시 웃음이 터졌다.


“그런데, 어떻게 두 분이 결혼하게 된 거예요?”

“흠…….”

어떻게 이 순진한 정해나 학생에게 설명해야 하나. 나는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아. 그렇구나.”

갑자기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했다는 해나.


“그, 그런 반응은 뭐죠?”

“요즘은 초등학생들도 알 건 다 알거든요?”

나는 입이 쩍 벌어졌다.


“언니가 덮쳤어요?”

해나의 질문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멋있는 언니네요. 연예인급으로 잘생기긴 했네요. 언니 남친.”

나는 아직도 입을 다물지 못하고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그래도……. 김산이 조금 더 잘생겼네.”

아니! 그건 아니지! 우리 서준이가 어디서 꿀리는 외모가 아니거늘. 내가 막 해나 학생에게 따지려는 순간 두 사람이 커피를 들고 돌아왔다.


“잘 마시겠습니다.”

해사하게 웃으며 해나 학생이 지서준에게 인사했다.

나는 어른이다. 그래. 올해 30살 먹어서 내 남자친구가 더 잘생겼다며 고등학생과 싸울 필요는 없지.

나는 그렇게 차분히 내 마음을 가라앉혔다.

나와 해나 학생 옆에 자리 잡은 두 사람과 잠깐 대화를 나눴다.

산이 학생은 이과 학생으로 지서준에게 이것저것 질문하며 눈을 반짝였고, 그런 산이 학생을 기특해하며 알 수 없는 이론들을 설명해 주는 지서준도 조금은 신나 보였다.

나는 그 옆에서 해나 학생에게 요즘 학생들이 쓰는 말들을 배웠다. 너무나 다른 대화 주제였지만, 나도 나 나름대로 유익한 시간이었다.

회사에 가면 이 과장님에게도 알려줘야지. 몇 가지를 핸드폰에 메모하며 혼자 킥킥거리는데, 지서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터미널까지 데려다주지 않아도 돼?”

“네. 저희는 조금만 더 있다가 갈게요.”

지서준과 산이 학생은 급격히 친해져 연락처까지 주고받았다. 터미널까지 데려다준다는 지서준의 설득에 해나를 바라보며 조금 더 바람 쐬다 들어가겠다는 산이 학생이었다.

둘이 있네. 뭐가 있어.

내 표정에 다시 아니라고 가슴 부근에서 엑스자를 만드는 해나.


“다음에 기회 되면 또 보자.”

“네. 오늘 정말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결혼 축하드려요!”

그렇게 그들을 두고 차가 있는 주차장으로 돌아가는 길.


“산이 학생이 해나 학생 좋아하는 거 맞지?”

내 말에 너 같이 눈치 없는 사람이 어떻게 그걸 알아차렸냐는 듯 지서준이 날 내려다보았다.


“그래서? 그래서 넌 뭐라고 말해줬어?”

“내가 조언을 해줬을 거로 생각해?”

“무슨 자판기 커피 뽑는 데 10분이나 걸리니? 척하면 척이지.”

많이 발전했다며 머리를 쓰다듬는 지서준.


“빨리 말해줘. 모라고 했어?”

“실수는 추천하지 않습니다.”

“뭐?”

차 앞 지서준이 걸음을 멈췄다.


“실수로 하룻밤을 보내고 시작하지 말라고 나처럼. 네 마음을 제대로 들여다보고 제대로 고백하라고. 너의 고백이 네가 좋아하는 여자에게 그것마저 예쁜 기억으로 남게.”

지서준이 내 얼굴을 잡아 이마에 입술을 댔다.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너에게 세상에서 가장 근사한 고백을 하고 싶어. 사랑해.”

나는 말없이 지서준의 얼굴을 잡아당겨 거센 입맞춤으로 지서준의 사랑 고백에 대답했다.

집에 도착해 푹 자고 나니 벌써 깊은 밤이었다. 밤을 지나 새벽의 문턱. 말똥말똥해진 눈으로 다시 잠을 청해봤지만, 다시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화장대에 앉았다.
 


“근데, 정말 고등학생한테 그런 말을 했단 말이야?”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 지서준의 말을 곱씹으니 얼굴이 화끈대고 민망했다. 요즘 애들이 빠르다곤 해도 그건 아니지 않나.
 


“아니. 내가 정말 그랬을 거로 생각해?”

 
그저 마음을 다해 고백하면 된다고 조언했다는 지서준. 자신이 후회하고 하고 싶었던 고백을 산에게 조언했다고 했다.

나는 지서준의 말을 떠올리며 가장 밑 서랍을 열었다. 낡아서 잘 열리지 않는 서랍 문을 여니 지서준이 프러포즈할 때 받았던 편지가 눈에 들어왔다.

몇 번이나 읽어도 질리지 않는 초등학교 시절 지서준의 일기장.

그러다 문득, 지서준의 말이 떠올랐다.
 


“실수는 추천하지 않습니다.”

 
비록 술 먹고 실수로 지서준과 하룻밤을 보내게 됐지만, 그로 인해 우리가 친구에서 연인이 되었다. 지서준의 말대로 누군가에게 연인으로 시작하는 방법으로 추천할만한 방법은 아니었다.

그렇게 시작한 걸 후회하고 있는 듯한 지서준.

나는 집 구석구석을 뒤져 옛날에 사둔 편지지 한 장을 찾아냈다. 그리고 한 글자 한 글자씩 편지를 꾹꾹 눌러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흘러넘치는 감정들을 주워 가장 예쁜 마음만 골라 적었다. 어느새 꽉 채워진 편지지.

나는 내가 쓴 편지를 몇 번이나 읽었다.

잘 썼네.

조금은 촌스러운 편지지, 나는 그 편지지를 정성스럽게 접어 봉투에 넣었다.

**

정말로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회사 일도 바빴고, 준비해야 할 건 왜 이렇게 많은지.

웨딩 플래너의 말대로 결혼 전까지 절대로 넉넉한 시간이 아니었다.

지서준도 최선을 다해 도와줬지만, 지서준이 해야 할 일, 내가 해야 할 일은 분명했다.

청첩장을 나눠주는 건 생각보다 쉬웠다. 우리 두 사람의 인간관계가 참 좁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지서준의 친구보다 내 친구가 한 명 더 많았다는 것.

가장 힘들었던 건 결혼사진 촬영이었다.


“신부님이 살짝 뒤로 갈까요? 아니, 신랑분은 가만히 계시고. 같이 뒤로 가면 신부 얼굴이 더 커 보이잖아요. 신랑분! 신부님 좀 지켜줘요.”

작은 지서준의 얼굴이 평범한 내 얼굴 사이즈를 대두로 만들었고, 그 틈새를 줄이고자 포토그래퍼가 꽤 애를 먹었다.

온종일 쫄쫄 굶고 촬영이 끝나자 허겁지겁 먹은 음식이 탈이 났었다. 그 바람에 2㎏이나 빠져 헤실헤실 웃던 나를 엄마는 미친 여자 바라보듯 바라봤었다.

그렇게 내가 위로 크는 성장이 멈춘 뒤 인생 최저 몸무게로 웨딩홀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오늘은 바로 결혼식 전날.

지서준은 바로 옆 동, 본가에서 머물고 있었다.


[잠깐 볼래?]

[일찍 잔다며.]

내일 화장 잘 받으려면 일찍 잔다고 지서준에게 얘기했었지만, 나에겐 아직 전하지 못한 편지가 있었다.


[잠깐 나와.]

나는 싸우고 바닷가에 다녀온 후 지서준을 향하는 넘실대는 내 마음을 주체 못 해 쓴 촌스러운 편지지를 고이고이 주머니에 넣었다.

공동 현관문이 열리고 밖으로 나가니 이제는 제법 후텁지근한 바람이 불어왔다.

이 편지를 쓸 때만 해도 추웠는데, 이제는 덥다는 생각이 들다니. 시간이 정말 빠르게 흘렀다.

조금 뒤, 슬리퍼를 신고 휘적휘적 걸어 나오는 지서준이 보였다.


“잠이 안 와?”

지서준은 피곤했는지 눈에 졸음이 그득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신혼여행을 위해 연차까지 긁어모아 썼다. 그러기 위해 미리미리 해야 할 일이 많아 요즘 야근이 잦았다.

일찍 줄 걸 그랬나.

조금 후회되는 마음에 다른 말 붙이지 않고 바로 주머니에 있는 편지를 건넸다.


“이게 뭐야?”

“내 프러포즈.”

“지금 읽어 봐도 돼?”

“아니. 들어가서 누워서 읽어. 나 들어간다.”

나는 지서준에게 인사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뛰었다.


“어디 다녀와?”

“잠깐 서준이 만나고 왔어.”

“내일 지나면 이제 보기 싫어도 붙어살아야 하는 데 잠깐을 못 참고…….”

얼굴에 팩을 올려놓은 엄마는 튕길 줄도 알아야 한다며 잔소리했다. 이제 저 잔소리도 예전처럼 많이 못 듣겠지.


“엄마, 이제 그 잔소리 하고 싶어도 들어줄 사람 없어서 어째?”

“너 없으면 속 시원하고 더 좋거든?”

마음에 없는 말도 잘하는 우리 엄마.

나는 그런 엄마를 보며 핸드폰 카메라로 엄마의 모습을 담았다.

‘찰칵.’


“너 뭐야! 지금 사진 찍은 거야?”

“아니? 무슨 소리야.”

시치미 뚝 떼고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지금쯤 읽고 있으려나.

침대에 누워 눈만 남기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이제는 조금 가물가물한 편지 내용. 그러나 그 마음만큼은 변하지 않았음은 알고 있었다.

[내일이면 남편이 될 지서준에게.

안녕. 이렇게 너한테 편지를 쓰는 건 군대에 있는 너에게 쓴 이후로 처음인 것 같네.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쑥스러운지 모르겠다.

우리가 사귀기 전, 한 번도 너와 이런 사이가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기억해? 우리의 첫날밤.

비록 술 먹고 실수로 한 첫날 밤이지만, 나는 절대 후회 안 해.

그래, 사실 처음에는 후회도 많이 했는데, 지금은 절대 아니야! 아마 나는 너와 그런 일이 없었다면 끝까지 너에 대한 내 감정을 부인했겠지.

네가 고백한다고 하더라도 장난이거나 날 괴롭히려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을 거야.

바닷가에서 만난 산이와 해나를 보며 많은 생각이 들었어.

아마 우리와는 다른 방법으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겠지. 그렇지만 그 아이들이 부러운 건 아니야.

너와의 실수가 다른 길을 만들었고, 그 길을 가는 내가 나는 너무 좋고 행복해.

그러니, 우리의 첫 시작에 대해 아쉬운 마음이 있다면 빨리 버렸으면 좋겠다.

우리의 이야기는 지금부터 시작이겠지.

우리 이야기의 제목을 바꿔보자.

‘남사친과 실수는 추천하지 않습니다.’가 아니라, ‘남사친과 실수는 추천합니다.’

주인공 지서준, 문다율.

어떤 해피엔딩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 엔딩이 반드시 해피엔딩일 거라는 생각이 들어. 왜냐면 나는 해피엔딩을 좋아하니까. 그 엔딩이 기다려지는 건 나뿐만이 아니겠지.

사랑해.

너의 가장 오래된 친구이자 앞으로도 가장 오래된 친구가 될, 그리고 연인일 문다율이.]

잠에 막 빠져드는 순간,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지서준이겠지.

그렇게 나는 순식간에 잠으로 빠져들었다.

**

대부분 사람은 결혼식 전날 긴장돼서 잠도 잘 못 잤다는데, 나는 잘 자도 너무 잘 잤다.

그래서 땡땡 부은 얼굴로 거실로 나가자 엄마가 혀를 차며 냉장고 냉동칸에서 숟가락 하나를 건네며 혀를 찼다.


“너 그럴 줄 알고 엄마가 어제 넣어놨지. 빨리 마사지해.”

“응. 고마워.”

차가운 숟가락을 들고 방으로 돌아왔다. 내 짐들은 거의 빠지고 휑한 방. 나는 숟가락을 한쪽 눈에 올리며 핸드폰 잠금화면을 풀었다.

역시나, 어젯밤 눈을 감기 전 온 문자는 지서준에게 온 문자였다.


[‘남사친과 실수는 추천합니다.’의 결말은 반드시 해피엔딩입니다.]

나도 모르게 점점 입꼬리가 올라갔다.


“문다율! 너 그러다가 메이크업 숍에 갈 시간 늦겠다! 빨리 나와! 오늘도 지각할래?”

방 밖에서 들려오는 엄마의 목소리.


“나갈게!”

나는 걸터앉아 있던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나, 문다율. 지금 30년 소꿉친구 지서준과 결혼하러 갑니다.

<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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