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화. 또 다른 이야기의 시작: 서준이가 보는 세계.
(87/97)
외전 1화. 또 다른 이야기의 시작: 서준이가 보는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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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1화. 또 다른 이야기의 시작: 서준이가 보는 세계.
2023.04.30.
한국으로 부칠 마지막 짐의 테이핑을 마치니 밤 9시를 넘겼다.
지금쯤이면 한창 일하고 있으려나.
핸드폰을 들어 메시지를 입력했다.
[나 서울 간다.]
메시지를 보내놓고 새로 바뀐 프로필 사진에 눈이 갔다. 분위기 좋은 카페에 앉아 커피를 앞에 두고 환히 웃고 있는 문다율.
“즐거워 보이네.”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내가 간다. 조금만 기다려라.”
핸드폰을 내려놓고 한껏 어지럽혀진 방 안을 둘러봤다. 이곳으로 이사 온 지 3년. 나름 정들었던 곳인데 짐이 빠져나가고 휑한 방을 보니 허전할 법도 한데 지금은 빨리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싣고 싶을 뿐이었다.
대충 정리를 마치고 핸드폰을 들어 메시지가 도착했는지 확인했다.
“어쭈. 씹어?”
[씹어?]
막, 문다율에게 메시지를 보냈을 때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
“이 밤에 누구야.”
매너 없는 초인종 소리에 불쑥 짜증이 일었다.
「누구세요.」
「나야! 데이브.」
「데이브? 지금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함께 일했던 연구원 동료였다. 서둘러 문을 여니 데이브가 맥주를 양손 가득 들고 환히 웃으며 서 있었다.
「마지막으로 맥주 한 잔은 해야지.」
문이 열리자마자 능청스러운 웃음을 보이며 집으로 들어오는 데이브.
「지금 몇 시인 줄 알아?」
「팍팍하게 굴지 말라고. 지금까지 연구실에 처박혀 있다가 겨우 빠져나온 거니까.」
데이브는 내 짜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부엌으로 가 식탁 위에 맥주를 올려놓았다.
「짐 정리해서 먹을 것도 없어.」
「괜찮아.」
어깨를 으쓱 올렸다 내리며 데이브는 맥주캔 하나를 나에게 던졌다. 그러곤 맥주캔을 따더니 꿀꺽꿀꺽 잘도 마신다.
그 모습을 보니 나도 조금 갈증이 나는 것 같았다.
「한국 가니까 좋아?」
「응.」
한 캔을 모조리 입에 털어 넣은 데이브가 새로운 맥주캔으로 손을 뻗으며 물었다.
「왜. 한국에 애인이라도 있는 거야?」
「애인? 애인은 무슨…….」
「그 왜, 사진에서 준 옆에 항상 있던 그 여자 있잖아. 애인 아니야?」
「그냥 친구거든?」
「남자 여자 사이에 친구가 어딨어.」
어디 있긴 어디 있나. 여기 있지.
문다율이 친구가 아니면 뭐란 말인가. 만약 지금 데이브의 말을 문다율이 들었다면 펄쩍 뛰었겠지. 예상되는 모습에 다시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런 나를 입에 캔을 붙인 채 눈을 가늘게 뜨고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데이브.
「왜? 뭐?」
내 말에 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데이브가 팔짱을 꼈다.
「그냥……. 너도 모르는 게 있구나 싶어서.」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지. 평소에도 나를 놀리기 좋아했던 데이브를 보며 나는 경계를 시작했다.
「내가 이별의 선물로 준에게 좋은 것 하나 가르쳐주지.」
데이브가 자신의 가슴을 탕탕 두드렸다.
「겁쟁이는 사랑을 드러낼 능력이 없다. 사랑은 용기 있는 자의 특권이다.」
「뭐야. 간디의 말이잖아.」
「알고 있군. 겁쟁이 친구.」
씩 웃는 데이브의 수염에는 맥주 거품이 묻어 있었다. 나는 물티슈를 뽑아 데이브에게 건넸다. 유난을 떤다며 중얼거린 데이브는 소매로 거품을 슥 닦아내더니 내가 건넨 물티슈로 코를 풀었다.
더러운 놈.
내 표정을 보고 씩 웃던 데이브가 입을 열었다.
「이번 연구만 끝나면 한국에 놀러 갈 테니 기다려라.」
「2년은 넘게 걸리겠군.」
「그때는 여자친구도 함께 봤으면 좋겠네.」
나는 데이브의 말을 한쪽 귀로 흘리며 남아 있는 맥주를 입에 털어 넣었다.
**
어젯밤 늦게까지 술을 마신 데이브는 아쉽다며 훌쩍이기 시작했고, 나는 그를 재빨리 집 밖으로 내쫓아야 했다. 안 그러면 새벽까지 데이브에게 시달릴 것이 뻔했다.
그를 내쫓고 쓰러지다시피 잠이 들었다.
어젯밤 커튼을 치고 자지 않았는지 따가운 햇빛이 눈을 찔렀다. 눈 부신 햇살에 눈을 떠 베개 옆 핸드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젠장.
30분 뒤면 택배회사에서 짐을 가지러 올 시간이었다.
서둘러 일어나 욕실로 뛰어 들어갔다. 씻고 나와보니 어느새 택배기사가 집에 도착해 초인종을 누르고 있었다.
미국을 떠나게 되어서야 제시간에 받아보는 서비스였다.
「잘 부탁합니다.」
「네. 걱정 마세요.」
비행기에 싣고 갈 짐을 제외한 모든 짐을 보내고 텅 빈 집을 마지막으로 점검 후 집을 나섰다.
택시를 타고 공항에 도착해 체크인을 마치고 내가 탈 비행기 게이트 앞에 자리를 잡았다.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고모 댁에서 하루 머물고 가기로 되어 있어 미국 국내선 비행기를 기다리는 중, 비행기가 1시간 딜레이 되었다는 소식이 전광판에 떴다.
“이제는 딜레이 안 되는 게 이상하다.”
주위를 둘러보니 작은 카페가 눈에 띄었다. 비행기 연착 소식에 한 사람, 두 사람 줄을 서기 시작했다. 나도 그 줄 끄트머리에 섰다. 따뜻한 저지방 라테를 한 잔 들고 비어 있는 자리를 확인했다.
모든 자리는 차 있었다. 그냥 커피만 들고 나갈까 하다가 4인 좌석에 혼자 앉아 있는 사람을 발견했다.
「같이 앉아도 될까요?」
내가 묻자 노신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흔쾌히 허락했다.
자리에 앉아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많은 메시지가 와 있었다. 친구들과 대학 동기들, 회사 동료들이었다. 하나하나 메시지를 확인하고 답장하다가 문득, 문다율이 내 메시지를 씹었다는 것이 떠올랐다.
서둘러 SNS에 들어가 보니 뒤늦게 문다율에게 메시지 하나가 와 있었다.
[오늘 너무 바빴어. 미안해. 서울에는 언제 오는데?]
나는 라테를 한 모금 마시고 문다율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내일 출발.]
메시지를 보내고 나니 문다율과 만난 지 꽤 오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으로 유학 오고 난 이후, 지금까지 간단히 메시지나 전화만 주고받았지, 만난 적은 없었다.
군대에 있을 때도 타이핑해서 프린트한 편지만 달랑 보냈을 뿐이었다.
“그동안 피한 건가?”
에이. 설마. 피할 이유가 없었다. 문다율 때문에 오히려 더 피곤했던 건 나였다. 걔가 친 사고 수습을 하느라 애먹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제는 많이 어른스러워졌으려나.
어른스러워진 건 좋은데, 또 그 모습을 보면 왠지 서운할 것만 같았다. SNS에 들어가 문다율의 계정을 눌렀다.
여행 가서 찍은 사진들, 맛있는 음식 사진, 명품 가방 사진, 디저트 사진이 줄줄이 나왔다. 드문드문 문다율의 셀카도 있었는데 화장도 하고 이제는 제법 사회인 티가 났다.
얘 데리고 뭐 하고 놀아야 하나. 그런 생각에 빠져 있는데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어디에 가나요?」
대각선 건너 자리에 앉아 있던 노신사가 물었다.
「샌프란시스코에 갔다가 고국으로 돌아갑니다.」
「그렇군요. 하하. 어디서 왔어요?」
「한국에서 왔습니다.」
「그렇군요. 나도 한국에 가본 적이 있어요. 아주 좋은 나라였어요.」
노신사는 한국 여행을 갔을 때 있었던 좋았던 이야기를 하나씩 꺼냈다. 외국에 나오면 모두 애국자가 된다고 하지 않던가. 언제 들어도 좋은 모국의 칭찬이었다.
「고향으로 돌아가서 그렇게 기분이 좋아 보였던 거군요. 굉장히 멋지게 웃고 있었어요.」
노신사가 자신의 입꼬리를 톡톡 두드렸다.
내가 웃고 있었나? 나도 슬며시 내 입꼬리를 만졌다.
그때 방송에서 내가 탈 샌프란시스코행 비행기의 게이트가 오픈되었다는 방송이 들려왔다.
「음……. 이만 가봐야겠군요. 좋은 여행이 되세요.」
「그래요. 당신도 안전하게 한국까지 가길 바랄게요.」
노신사에게 인사를 하고 비행기를 타기 위해 줄을 섰다.
내가 웃고 있었나.
다시 입꼬리를 매만지며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내가 꽤 설레어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게 설레는 걸까.
그건 아니었다.
미국에서의 생활은 나름대로 만족하고 있었고, 만약 엄마가 아프지 않았다면 한국으로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설레는 이유는…….
「좌석 확인해 드리겠습니다.」
「아. 네. 여기 있습니다.」
스튜어디스가 좌석을 확인하겠다는 말에 나는 생각에서 빠져나왔다. 내 자리로 가 앉아 벨트를 매고 조금 뒤, 곧 비행기가 출발한다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비행기가 서서히 움직이기 위해 소리를 높였다.
덜컹덜컹 움직이던 비행기가 비행을 위해 활주로의 끝에 닿았다. 굉음을 내며 달리기 시작하는 비행기는 어느새 하늘로 떠오르며 바퀴를 감췄다.
그렇게, 나는 한국으로 가기 위해 미국을 떠났다.
**
“아버지!”
공항까지 마중 나오겠다는 부모님을 설득했다. 공항에서 집 앞까지 가는 버스도 많은데 굳이 나오시지 말라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공항버스가 도착하는 곳에 아버지가 나와 계셨다.
“왔구나!”
오랜만에 보는 아버지는 얼굴에 주름이 더 늘어나 있었다. 덥석 나를 안은 아버지가 등을 두드리며 잘 왔다며 크게 웃으셨다.
“나오시지 마시라니까요. 여기서도 그냥 택시 타고 들어가면 되는데.”
“아버지도 차 있는데 뭘. 그리고 여기라도 안 나가면 네 엄마가 가만히 있을 것 같으냐.”
아버지의 말에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트렁크에 짐을 싣고 집으로 향하는 길. 운전대를 잡은 아버지는 신이나 이것저것 말씀하시기 시작했다.
“오늘 너 오기만을 네 엄마가 얼마나 기다린 줄 알아? 일주일 전부터 식단 짜고, 재료 준비하고……. 말도 마라.”
“그랬어요?”
“그럼. 네 방 청소도 깨끗이 해두고, 이불도 싹 빨아놓고, 매일 매일 환기하고. 하하.”
“고모님이 안부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그래. 내년에는 네 엄마랑 같이 미국 들어가야지.”
집까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차가 막히기 시작했다. 주말인데도 차로 꽉 들어찬 대로를 보며 정말 서울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아. 집에 다율이 엄마랑 다율이 와 있어.”
“문다율이요?”
“응. 너희도 꽤 오랜만에 만나는 거지?”
문다율이 와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오늘은 주말이니 아마 늦은 시간에 일어나 아줌마와 엄마의 등쌀에 못 이겨 와 있겠지.
“다율이가 얼마나 예뻐졌는지 알아?”
“예뻐 봤자 문다율이겠죠.”
아버지가 여전히 너는 보는 눈이 없다며 타박을 했다. 그렇게 잔소리의 1절이 끝나갈 무렵, 아파트가 보이기 시작했다.
“짐 다 내렸지?”
차를 주차하고 짐을 내려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기다렸다. 그러다 무언가 허전한 느낌에 주머니를 뒤져보니 핸드폰이 없었다.
“아버지. 저 핸드폰 두고 내렸나 봐요. 차 키 좀 주세요.”
“으이구. 잘 챙기지. 이 짐은 내가 가지고 올라갈 테니 핸드폰 찾아서 올라와.”
“네.”
아버지를 먼저 보내고 차에 돌아가 보니 보조석에 핸드폰이 떨어져 있었다. 뒷주머니에서 빠진 모양이었다.
핸드폰을 들고 집으로 올라가는 길.
엘리베이터가 한층 한층 올라갈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삐삐삐삐삑.’
도어록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고 들어가자 엄마와 아주머니가 보였다.
“다녀왔습니다.”
“어머! 우리 서준이 왔구나.”
“안녕하세요. 아주머니. 엄마, 다녀왔어요.”
“그래. 어서 와. 오는데 힘들었지?”
“아니요. 그렇지도 않았어요.”
아주머니와 엄마의 격한 환영 인사가 이어졌다. 오랜만에 보는 아주머니는 여전했고, 엄마는 조금 야위어 있었다. 가슴 한쪽이 찌르르 울렸다.
그때, 어른들 뒤로 문다율이 보였다.
‘쿵.’
어머니의 야윈 모습에 가슴 한쪽 찌르르하던 기분이 사라지고 어느 순간 무언가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분명 문다율인데……. 문다율 같지 않은 기분.
나는 애써 그 기분을 무시하며 문다율에게 걸어갔다.
“오랜만이네?”
문다율은 모를 것이다. 내가 이때 얼마나 애써서 인사를 건넸는지.
하긴, 나도 몰랐다.
이때가 29년 우정이 사랑으로 바뀌는 시작점이었는 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