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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3화. 나는 깨달았고, 너는 지금 모를 뿐이다. (89/97)


외전 3화. 나는 깨달았고, 너는 지금 모를 뿐이다.
2023.05.07.



“야. 일어나. 야!”

설핏 잠들었는데 날 깨우는 문다율의 목소리가 들렸다. 왕왕 울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일어났다.

문다율이 갑자기 내 몸 위로 이불을 덮어주더니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어, 어떻게 된 거야. 내가…… 왜, 왜 너랑…….”

설마, 기억을 못 하는 건가. 기억이 나지 않냐 물었더니 절망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져 오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아슬아슬하게 이불로 가린 문다율의 몸이 눈에 들어왔다.

미친놈.

찬물로 머리도, 몸도 식혀야 할 것 같았다. 무거운 몸을 일으켜 욕실로 향했다. 그렇게 나는 한동안 차가운 물로 뜨거워진 머리와 몸을 식혀야 했다.

이가 달달 떨릴 때까지 몸을 식히고 나왔건만, 옷도 안 입고 나왔다며 소리를 질러댄다. 억울한 마음에 내가 옷이 어디 있느냐 소리를 질렀다.

그랬더니 문다율은 턱에 호두를 만들곤 부들부들 떨더니 이불을 휙 뒤집어쓰곤 흐느끼기 시작했다.

도대체 왜 우는 거냐. 잡아먹힌 건 난데.

억지로 이불을 잡아당겼다. 잠깐 사이에 문다율의 눈은 벌겋게 부어 있고 코는 꽉 막혀 있었다.


“네가 같이 자 달라고 매달렸으면서 왜 우는 건데.”

문다율은 내 질문에 세상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나에게 자신은 그럴 리가 없다, 거짓말하지 말라며 부들부들 떨었다. 차근차근 문다율이 나를 잡아먹기 위해 했던 일련의 과정들을 설명했다.

정말로 기억이 나지 않는 듯 내가 설명할 때마다 문다율의 동공은 세차게 흔들렸다.

문다율 술 마실 때마다, 남자들한테 이런 거 아니야?

갑자기 화가 치밀기 시작했다.


“너 여태까지 술 먹고 다니면서 남자들한테 그러고 다녔어?”

내 말에 억울한 듯 빽 소리를 지르며 이런 적은 처음이라고 했다. 그 말에 마음속에 치밀어오르던 불기둥이 사르르 사라졌다.

다시 울먹이기 시작한 문다율.

커다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기 시작하는 걸 보니 일단, 빨리 이곳부터 벗어나야 할 것 같다.


 

**



“서준이 왔니?”

“아직 안 주무셨어요?”

“잠이 안 와서. 늦게 들어오네? 지금까지 다율이랑 있었던 거야?”

12시가 넘은 시각. 잠들지 않고 나를 기다리던 엄마가 내게 물었다.


“네? 네…….”

왜인지 엄마와 눈을 마주칠 수 없어 서둘러 욕실로 향했다.


“저 씻고 바로 잘게요. 엄마도 들어가서 주무세요.”

“그래. 알았어.”

아쉬운 표정의 엄마가 안방으로 들어갔다. 아마, 내가 들어오면 어떤 집을 구했는지 이것저것 물어보고 싶으셨던 것 같았다. 그러나 오늘은 빨리 침대에 눕고 싶었다.

간단하게 씻고, 침대에 누웠다.

떠난 지 10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익숙한 천장이 내 눈에 들어왔다.

택시에서 내려 불편하게 걷던 문다율.


“좀 자제할 걸 그랬나.”

시작은 문다율이 했으나, 끝까지 괴롭힌 건 나였다. 그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생각들. 그 생각들의 마지막은 훌쩍이던 문다율이었다.
 


“그, 그래. 내가 너한테 하자고 졸랐다고 쳐. 그러면 네가 거부하면 됐잖아.”

 
문다율의 말이 맞았다. 그러나 나는 거부하지 않았다.

나는 지금까지 유혹에 약한 사람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약하지 않다. 만약 내가 그런 사람이었다면, 고등학교는 물론이고, 대학교 때도 졸업이나 할 수 있었을까.

문다율의 유혹은 어찌 보면 귀여운 수준이었다.

그런데, 그 귀여운 유혹에 나는 쉽게 넘어갔다. 아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는 표현이 맞았다. 술을 마셨지만, 취하지 않았다. 그러니 술은 핑계가 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문다율은 나에게 친구가 아닌 여자였나.

그 질문에 대해 확실하게 대답할 수 있는 것은 하나였다.

어젯밤. 나에게 문다율은 여자였다. 내가 절대로 거부할 수 없는 여자.

**

아무래도 문다율과 이야기해야 할 것 같아 회사 근처까지 찾아갔었다.

날 만나고 어쩔 줄 모르는 문다율을 보고 튀어나온 말.
 


“우리 만나 보는 건 어때?”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에 문다율은 나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 자신을 여자로 좋아하지 않으니 사귀지 않겠다 했다. 달라지는 것 없이 평소와 같이 지내면 된다고 했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문다율과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몇 번이나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대로 문다율을 똑같이 대할 수 있느냐고, 친구처럼 지낼 수 있느냐고.

대답은 NO였다.

익숙한 침대에 누워 손가락으로 허공에 ‘NO’를 그렸다. 그 뒤 ‘WHY’라는 글자를 그리다 말고 가슴 부근에 손을 얹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작게 웅크리고 있던 마음이 움트기 시작했다.


“나, 좋아하나?”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터져 나온 말 한마디에 움트기 시작한 마음에 작은 어린잎 하나가 ‘퐁’ 피어나더니, 다른 잎을 피우고 줄기를 뻗기 시작했다.

무서운 속도로 퍼져나가는 마음에 가슴이 저릿저릿했다.


 


“진짜냐.”

나도 몰랐던 내 마음을 자각하자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언제, 도대체 언제부터 이 마음에 씨앗이 깊게 자리 잡았던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마른세수하는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서준아.”

“아. 네. 엄마.”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과일 먹으라고……. 어머! 너 얼굴이 왜 이렇게 빨개? 열 있는 거 아니니? 응?”

엄마는 내 얼굴을 보더니, 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들어와 내 이마를 만졌다.


“열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감기 기운 있는 거 아니야?”

“그런 거 아니에요. 괜찮아요.”

괜찮다는 말에도 걱정을 멈추지 못한 엄마의 성화에 결국, 약을 먹고 일찍 침대에 누워야 했다.

**

나는 곧 이사해야 했다. 이사 가기 전, 미리 세탁해 둘 옷들을 들고 세탁소로 향했다.


“이게 얼마 만이야! 저기 107동 사는 총각 맞지?”

“네. 안녕하세요.”

“미국으로 학교 갔다더니, 언제 한국 온 거야?”

이 자리를 오랫동안 지켜온 세탁소. 사장님이 나를 기억하고 계시는지 반갑게 맞아주셨다.


“그 항상 붙어 다니던…… 눈 동그랗고! 그 애도 잘 지내는 거지?”

“네.”

“둘이 참 보기 좋았는데, 아직 둘이 임자 없으면 결혼해.”

사장님의 말에 나는 그저 웃어넘기고 세탁소를 나왔다.

결혼.

결혼과 문다율. 이색적인 조합에 가슴 한편이 살랑거렸다. 이상한 느낌에 가슴 부근을 손바닥으로 꾹꾹 누르며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손목에 찬 시계를 보니 문다율과 약속한 시각이 얼마 남지 않았다. 괜스레 발걸음이 빨라졌다. 그러다 문득 시선을 돌린 곳, 그곳에 문다율이 있었다.


“쟤 저기서 뭐 하는 거야.”

중학생 이후로 가지 않았던 놀이터. 그곳에서 동네 고등학생들한테 빙 둘러싸인 문다율이었다.


“지서준!”

문다율이 날 발견하자 잽싸게 뛰어와 뒤로 숨었다. 바닥에 떨어진 문다율의 지갑과 굴러다니는 가방과 쓰레기들.

설마, 삥 뜯기는 중이었나.


“너 지금 고등학생들한테 삥 뜯기는 중이었어?”

내 팔을 꼭 붙들고 있는 문다율의 커다란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차 있었다.

물론, 문다율이 만만해 보일 수 있다. 그런데, 저렇게 무리 지어 몰려와서 애 하나 잡는 건 아니지.

나는 고등학생 무리를 쭉 훑어봤다. 그냥 겁만 조금 주면 도망갈 것 같았다.


“나는 법적인 절차를 아주 좋아해. 내가 아깝게 에너지를 쏟지 않아도, 경찰, 변호사, 검사, 판사들이 일을 해결하거든.”

시에서 설치한 CCTV를 가리키며 핸드폰으로 신고하는 척을 하자 도망가는 고등학생들. 그 모습을 입 벌리고 보던 문다율이 정말로 경찰에 신고한 거냐며 눈을 깜빡였다.

거짓말이었다는 말에 쟤들이 때리면 어쩔 뻔했냐 중얼거리고는 가방에 소지품을 하나씩 넣는 문다율이었다.

그러고 보니, 왜 쟤가 지금 여기 있는 걸까.

나를 피한 건가.

왜 지금 여기 있냐는 물음에 슬쩍 내 눈을 피하는 문다율이었다.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그네를 타러 왔다고 거짓말하는 문다율. 그네도 못 타는 겁쟁이 주제에 왜 그런 거짓말을 하는지. 괘씸한 생각에 무서워할 걸 뻔히 알면서도 문다율을 그네에 태웠다.

높지도 않은 곳에서 그네를 떨어트렸는데도 사색이 되어버린 문다율.


“너 왜 나 피하는데?”

“안 피했는데?”

“그네 한 번 더 탈래?”

“아, 아니!”

“똑바로 말해. 너 왜 나 피하는데.”

“그, 그게…….”

내 눈은 바라보지도 못하는 문다율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도대체 뭐라고 하는 건지.


“뭐?”

“그날 밤! 기억이……. 난다고.”

목부터 귀까지 벌겋게 물든 문다율은 바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 모습이 참…… 귀여웠다.


“아무렇지도 않다며. 합의하고 잔 거니까, 예전처럼 지낼 수 있다며.”

혹시, 문다율도 내게 조금이라도 마음이 생긴 것은 아닐까. 슬금슬금 피어오르는 기대감에 퉁명스레 말했다.


“그때는…… 솔직히 말하면 다 기억이 안 났어.”

혹시 했던 마음은 역시나였다. 알고 있었던 문다율의 마음에 혹시나 했던 기대감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들었다. 그네 밑 작은 돌멩이를 발로 찼다. 괜한 심통이었다.


“그냥 사귀자니까?”

“너 나 안 좋아하잖아!”

찰나의 순간, 여러 생각이 머릿속을 휘저었다. 여기서 좋아한다고 말하면, 장난으로 치부하거나 도망갈 것이 뻔했다. 문다율은 그럴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할 건데? 친구도 하지 마? 아는 척도 하지 마?”

도망가는 문다율이 떠올랐다. 안 된다. 절대로.


“지금은…… 이렇게 널 보면 그냥 지서준이야. 어렸을 때부터 붙어 다니던 지서준이라고……. 그런데 그날 밤, 그러니까, 그날만 떠오르면 네가 다른 사람 같아. 그래서, 나도 잘 모르겠어. 이런 마음으로 너와 사귄다거나, 아무렇지 않게 지내는 게 맞는지도 모르겠어.”

문다율도 아무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자각을 못 했거나, 그 마음이 너무 작아 발견하지 못했거나. 분명 그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래서 문다율에게 시간을 주기로 했다. 넉넉히 3달을 주기로 했다. 말을 뱉고도 후회했다. 한 달만 줄 걸 그랬나.


“4달.”

문다율이 한 달을 더 추가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가만히 문다율을 내려다보자 3달로 하겠다 답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고등학생 때 학교가 끝나고 독서실에 들렀다가 밤늦게 함께 돌아가곤 했다. 이렇게.

분명 같은 길, 같은 사람인데 많은 것이 바뀌어 있었다.


“너는……. 내가 여자로 보여?”

문다율이 물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도망쳐버릴 겁쟁이 문문.


“그날 밤. 너는 나한테 확실히 여자였어. 그리고, 난 너랑 잔 거 후회 안 해. 너도 그랬으면 좋겠다.”

문다율은 모르게 내 마음을 던졌다. 내 마음이 문다율에게 닿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실망할 필요는 없었다.

나에게는 3달의 시간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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