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5화. 결심을 한다는 것.
(91/97)
외전 5화. 결심을 한다는 것.
(91/97)
외전 5화. 결심을 한다는 것.
2023.05.14.
결과적으로 나는 내 첫 고백에 대한 대답은 듣지 못했다. 그러나 고백한 것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고백하고 얼마 후, 고기를 사준다고 문다율을 꼬셨다. 쉽게 낚인 문다율을 만날 생각에 퇴근을 서둘렀다. 그러나 연락도 없이 나타난 올리비아 때문에 결국, 아무 식당이나 들어가야 했다.
올리비아는 나와 문다율의 혼을 쏙 빼놓고 사라졌다.
함께 감자탕을 먹다 올리비아가 결혼한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문다율은 많이 놀란 눈치였다.
미리 말해줄 걸 그랬나.
혼란스러워하는 문다율과 아무래도 대화가 필요한 것 같아, 가까운 작은 카페로 들어갔다.
잔뜩 몰려오던 먹구름이 몸을 부풀리더니 결국에는 굵은 빗방울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올리비아와 선배, 그리고 나의 관계를 설명하면서도, 한 번도 누군가에게 이해받고 싶거나, 이해받으려 노력한 적은 없었지만, 지금은 문다율이 이해해 줬으면 하는 마음에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내 설명에도 별다른 반응 없이 고개만 끄덕이며 듣던 문다율은 쏟아지는 소나기를 한참을 바라봤다.
얼마나 애가 타던지…….
저 작은 머리통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당장 아무 말이라도 내뱉어야 할 것 같아 막 입을 연 순간.
“야. 지서준.”
문다율이 나를 불렀다.
“응?”
“우리 사귀자.”
문다율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전혀 상상도 못 했던 말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문다율에게 몇 번이고 물었다. 혹시, 감자탕을 먹으며 나 몰래 소주라도 한잔한 건 아닌지, 합리적인 의심까지 들었다.
“그러면 손잡아도 돼?”
몇 번이고 되묻자 답답한 듯 작은 손을 꼭 움켜쥐는 문다율. 그런 다율이의 손을 보자 그 손을 꽉 잡고 싶었다.
한 대 때릴 것처럼 눈을 부릅뜨며 주먹을 움켜쥐었던 문다율이 피식 웃음을 흘리곤 고개를 끄덕였다.
문다율의 손이 내 손안에 들어왔다.
그전에도 수도 없이 잡아 본 손이었지만, 오늘은 달랐다. 살짝 손끝이 차가운 문다율의 손이 내 손안에 감춰졌다.
“손이 이렇게 작았던가?”
“작나? 한 번도 그런 생각 해본 적 없어서.”
응. 작아. 그래서 언제든 내 손에서 쉽게 빠져나갈 것 같아. 그래서 불안한데, 또 행복해.
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말을 삼키며, 나는 다율이의 손을 잡은 내 손에 힘이 들어가려는 것을 간신히 참아야 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문다율은 오늘도 참 예쁘게 웃었다.
**
문다율과 함께했던 휴가에서 돌아온 첫날.
나를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우리 팀 막내. 그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모니터에 눈을 고정했다.
“Mr Ji. 오늘 더 잘생겼어. 좋은 일 있어?”
뒤늦게 출근한 팀장님이 가방을 내려놓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좋은 일이 있냐 물으며 왜 인상은 찌푸리는지.
“아니요. 그런 일 없습니다.”
“No way.”
역시나 의심스러운 눈으로 나를 보기 시작하는 팀장님의 시선이 막내의 시선과 합쳐졌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잠깐, 커피 좀 마시고 오겠습니다.”
아무렇지 않은 척 탕비실로 향하는 길. 다른 부서에 갔다가 막 사무실로 들어오는 이경훈 연구원이 나를 발견했다.
“어? 지 수석님 어디 가세요?”
“네.”
팀장님과 막내에게 붙잡힐까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부웅.’
탕비실에 있는 캡슐커피 머신에 캡슐을 넣고 커피 추출 버튼을 눌렀다. 꽤 커다란 소리가 들리며 향긋한 냄새를 풍기는 커피가 쪼르르 내려오기 시작했다.
아무튼, 이상하게 눈치는 빠른 팀원들이었다.
나는 핸드폰을 들어 문다율에게 메시지를 전송했다.
[괜찮아?]
돌아오는 길, 유난히 피곤해하던 문다율이 눈에 아른거렸다.
[이제 괜찮아.]
괜찮을 리가 없는데……. 그때, 탕비실로 막 들어오는 옆 팀 박 팀장님이 날 발견하곤 피곤한 얼굴로 손을 들어 인사했다. 인사를 꾸벅한 난 막 내려온 커피를 보다 박 팀장님을 불렀다.
“박 팀장님. 커피 드시러 오신 거예요?”
“네? 아. 네.”
내가 말을 걸자 ‘네가 오늘 무슨 바람이 불어서 내게 말을 다 건네냐.’는 표정으로 날 경계했다.
“이거 드세요.”
“이, 이걸 왜…….”
더욱 경계의 날을 세우는 박 팀장님의 손에 내가 마시려던 커피를 건네고 탕비실을 나왔다.
회사에서 가장 가까운 편의점으로 가 피로 해소에 좋은 음료 하나를 샀다. 그대로 문다율이 있는 층으로 갈까 하다가 부담스러워하던 표정이 떠올랐다.
“싫어하겠지.”
어떻게 전해줘야 하나 고민하는데, 복도에서 우연히 이경훈 연구원을 만났다.
“지 수석님. 왜 여기……. 아. 편의점 다녀오셨구나. 휴가 다녀오시더니 피곤하신가 봐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싱글싱글 웃는 이경훈 연구원의 손에는 서류 봉투가 들려 있었다.
“어디 가세요?”
“네? 아. 트래블 플랜팀에 가려고요. 이번 벨기에 출장 때문에 드려야 할 서류가 있어서.”
럭키.
나는 애써 웃음을 감추고 이경훈 연구원을 바라봤다.
“이거, 문다율한테 전해주실래요?”
“네?”
내가 내민 음료를 바라보며 눈썹을 올리는 이경훈 연구원을 보며 나는 그의 비어 있는 손에 음료를 쥐여줬다.
“부탁합니다.”
“아. 네.”
나는 그렇게 홀가분한 마음으로 사무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름 비밀 연애도 괜찮다고.
**
문다율과 사귀고 얼마 후부터 수상한 메시지가 오곤 했다.
[안녕하세요. 저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처음은 정중한 말씨로 인사를 건네왔고, 나 또한 정중하게 어떻게 내 번호를 알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연락하지 말아달라 메시지를 보냈다. 그것이 잘못되었던 걸까.
그다음부터는 아주 집요하게 문자를 보내기 시작했다.
[문자 읽은 거 다 알아요.]
[한 번만 만나주세요.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잖아요.]
[자요?]
계속되는 문자에 나는 그 번호를 차단하기로 했다. 그랬더니 주위를 맴돌기 시작하는 이상한 여자.
경찰에 신고라도 해야 할까 했지만, 이 정도로는 어떠한 처벌도 내릴 수 없다는 답변만 들었다.
무시하자.
그러면 언젠간 지쳐 떨어지겠지. 그렇게 생각했다.
무섭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예전에도 이런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이렇게 노골적으로 자신을 드러내며 쫓아다니는 여자는 없었다.
결국, 문다율과 데이트하는 날에도 그 여자는 모습을 드러냈다.
[그 여자 누구예요?]
번호를 바꿨는지, 데이트하는 중간 이상한 여자에게서 문자가 도착했다.
불안했다. 혹 문다율에게 해코지라도 하는 것은 아닐까. 최대한 내 선에서 해결하고 싶었다. 하지만 꼭 이럴 때는 문다율이 금방 알아채곤 했다. 평소에는 눈치라고는 애초에 아주머니의 뱃속에 두고 나온 것 같은 문다율인데 말이다.
협박 메시지까지 모조리 읽은 문다율은 거칠게 욕을 내뱉었다. 당장이라도 경찰서로 쫓아가거나 그 여자를 찾아내 요절을 내겠다며 길길이 날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침착한 모습을 보인 문다율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태풍이 오기 전의 고요함이었다.
경찰서에 있다는 문다율의 연락을 받고 무슨 정신으로 그곳까지 달려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몇 가지 절차를 마치고 경찰서를 나와 걸었다.
겁도 없이 그 여자를 찾아간 문다율에게도 화가 났지만, 나에게 더 화가 났다. 얼마나 내가 못 미더웠으면 문다율이 그 여자를 찾아갔을까. 내가 확실하게 이 일을 마무리 지었다면 문다율이 경찰서 올 일은 없지 않았을까. 나랑 사귀지 않았다면…….
자꾸만 나쁜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지서준.”
등 뒤에서 문다율이 날 불렀다. 그러나, 돌아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지서준, 나 아파.”
그제야 돌아본 나는 욕지기가 치밀었다. 서 있기도 힘들어 보이는 저 구두는 무엇인가. 저걸 신고 여태 날 따라온 건가. 나는 왜 그걸 몰랐던 건가.
서둘러 근처 작은 카페로 들어갔다. 음료를 주문하고 문다율만 남긴 채 카페를 나왔다. 제일 가까운 편의점으로 가 슬리퍼 하나를 사 들고 나왔다.
카페로 들어가기 전, 밖에서 보이는 문다율은 다리가 아픈지 발목을 만지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슬리퍼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문다율에게 슬리퍼를 신겨주기 위해 무릎을 꿇었다. 붉어진 발은 한눈에 봐도 아파 보였다. 무슨 생각으로 신발이라기보다 무기에 가까운 저 신발을 신고 그 여자를 찾아갔는지…….
딱 오늘 같았던 날이 있었다.
한태이 때문에 놀이터에 숨어서 꺼이꺼이 울었을 때. 그때, 날 발견한 문다율의 얼굴은 아직도 기억 속에 생생했다.
그때도, 오늘처럼 무작정 내가 다니던 남중으로 찾아와 한태이를 두들겨 팼었다. 그때, 기분이 딱 오늘과 같았다.
“앞으로는 나 지켜줄 생각 하지 마. 나는 이제 놀이터에서 질질 짜던 중학생 지서준이 아니야.”
생각해보니, 은근히 말보다 주먹이 앞서는 문다율이었다.
“만약에 내가 그런 상황이었으면 너는 어떻게 했을 거야?”
아마, 그놈은 내일 뜨는 태양을 보지 못했겠지.
내 생각을 알기라도 한 듯 자신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을 거라는 문다율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나는 너를 지킬 거야. 물론, 이렇게 무식하게 지키는 방법은 자제하도록 노력할게. 하지만 지키지 말라는 말에는 약속할 수 없어.”
지킨다.
그 말이 좋아한다는 말보다 더 무겁게 내게 다가왔다.
나는 문다율을 좋아하고, 문다율도 나를 좋아한다. 문다율은 나를 지키고, 나도 문다율을 지킨다. 같은 말은 아니었지만, 같은 말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 말은 불로 지진 것처럼 진하게 마음속에 남았다.
배고프다는 문다율의 말에 카페를 나왔다.
내 손에는 웬만한 호신 도구보다 나을 것 같은 구두가 들려 있었다. 내 손을 잡고 걷는 문다율이 걸을 때마다 슬리퍼가 질질 끌리는 소리가 들렸다.
“벌써 가을이 오는 것 같네.”
문다율의 말처럼 푸르렀던 나뭇잎들이 금세 그 기세를 잃고 색을 바꾸고 있었다. 바람도 서늘한 것이 정말로 가을의 초입이었다.
“이러다가 금방 낙엽 지고 겨울 오겠지?”
“그렇겠지?”
“그럼 우리 20대도 끝나네.”
마지막이라…….
크게 아쉬운 것 없는 20대였다. 열심히 공부했고, 열심히 일했다. 운도 좋은 편이었고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났었다. 그랬기에 그저 다른 해와 마찬가지로 1살 먹는구나. 그 생각 말고 다른 감정적인 생각은 들지 않았었다.
내 20대를 묻는 문다율.
“내 20대의 끝이 너여서 좋다.”
내 20대 인생의 대부분에 문다율은 없었다. 그 부분이 이토록 아쉽게 느껴지는 것은 내 옆에서 날 올려다보고 있는 문다율의 일부분을 내가 모른다는 이기심 때문이었다.
문다율의 대학 생활도 알지 못했고,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하던 모습도 보지 못했다.
예뻤겠지.
그러나 지금. 다행히 20대의 마지막은 문다율과 함께였다. 그것이 지금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내 말에 얼굴을 붉히는 문다율을 보고 강한 욕망이 들었다.
앞으로 다가올 30대에도 네가 있었으면 좋겠고, 그 뒤로 40대, 50대, 60대 그리고 그 후까지 너와 함께 했으면 좋겠다고.
지금 생각해보면, 이것이 내가 문다율과 결혼을 결심한 첫 계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