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6화. 지키고 싶은 마음. (92/97)


외전 6화. 지키고 싶은 마음.
2023.05.17.



 
문다율과의 연애는 좋았다. 우리는 우리 두 사람의 문제보다 외부에서의 문제 때문에 시끄러웠지, 문다율과 나만 놓고 보면 다른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그런 연애였다.

같이 있어도, 같이 있고 싶고, 보고 싶어도 보고 싶은 그런 연애였다.


“워크숍이라기보다는 놀러 간다. 그게 더 어울리지 않나요?”

장우석 씨가 워크숍으로 가는 버스 옆, 잔뜩 쌓여 있는 술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그러더니 팔짱을 끼곤 나를 돌아보았다.


“그나저나, 수석님은 안 가실 것 같았는데요.”

나도 그럴 줄 알았다. 가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가지 않으려 했었다. 문다율이 자신의 멘토와 멘티. 둘 다 없으니 워크숍에 가지 않을 것 같다더니 갑자기 말을 바꾸기 전까지 말이다.
 


“으……. 인사팀 인원이 부족하다고 도와달라고 팀장님이 직접 말씀하시는데, 어떻게 안 가겠다고 말을 해.”

 
가기 싫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몸까지 떨어대며 울부짖던 문다율은 방실방실 웃으며 인사팀 직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완벽한 사회인이었다.

입기 싫다던 회사 점퍼까지 입고 이리 뛰고 저리 뛰어다니는 문다율을 보고 있으니 회사원의 무게가 저런 것인가 싶었다.

자기 일도 아닌데, 저렇게 열심히 뛰어다닐 일인가.

가만히 분주한 문다율을 바라보던 내 다리가 저절로 그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너는 멘토가 누구야?”

“내 멘토는 육아휴직 중.”

“멘티는?”

“멘티는 빠른 퇴사.”

이미 알고 있던 질문을 하고, 알고 있던 답을 받았다.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어서 꺼지라며 눈짓하는 문다율의 눈빛에도 오늘따라 떨어지기 싫어 뭉그적거리는데, 누군가 문다율에게 일을 시켰다.

기분 나쁜 표정.

어렸을 적부터 타인의 시선에 예민했던 나는 사람들의 감정을 쉽게 알아차리곤 했다. 그런 레이더망에 인사팀 김 과장이라는 사람의 끈적하고 더러운 시선이 걸렸다.

정확하게는 알 수 없었다. 문다율과 나와는 전혀 접점이 없는 사람. 이유는 모르겠으나, 좋지 않은 감정만은 확실했다.


“이번, 최우수 팀은 당연히! 저희 테크 쪽에서 나오지 않겠습니까?”

“무슨 소리! 이번에 바이오도 꽤 큰 성과를 올렸다고!”

“하하. 그래도 이번 뉴질랜드 회사와 계약 건은 못 따라오죠.”

날이 어두워지자 경쟁하듯 술을 마시던 사람들은 얼큰하게 취해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쏟아냈다. 80% 이상은 쓸데없는 이야기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도 끝이 없었다.

나는 거품이 가득한 맥주가 담긴 종이컵 끝자락을 만지작거리며 빨리 시간이 지나가길 바라며 다음 주 주말에는 문다율과 무엇을 하고 놀지 생각했다.


“No! My Team is the bset! You Know that?”

술이 들어가자 영어로 말하기 시작한 팀장님은 머리카락이 얼마 남지 않은 테크팀의 수장인 테크 연구소장님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말려야 하지 않을까요?”

이경훈 연구원이 불안한 눈빛으로 내게 말했으나, 저 거구를 누가 말릴까. 나는 어깨를 올렸다 내리곤 눈으로 열심히 문다율을 쫓았다.

문다율은 참 바빴다. 여기저기서 심부름을 하던 문다율은 여유가 찾아왔는지 구석에 인사팀 직원과 앉아 대화하고 있었다.

내일 돌아가는 대로 데리고 마사지라도 받으러 가야 할 것 같아 핸드폰을 들어 마사지숍을 찾았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는 앉아 있던 자리에 문다율은 없었다.


“어딜 간 거야.”

“네?”

내 혼잣말에 옆에 있던 이경훈 연구원이 물었다. 나는 고개를 돌리고 다시 문다율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인사팀 김 과장이라는 사람도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깨달았다.


“어? 어디 가세요?”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나는 자리를 빠져나왔다. 왁자지껄한 홀에서 빠져나오니 복도는 사람 하나 없이 조용하기만 했다.


“어딜 간 거야…….”

전화라도 해볼까 싶어 핸드폰을 들었다.


“꺅!”

그때 들려온 비명. 작지만 확실했다. 분명히 이 근처였다. 닫혀 있는 문을 벌컥 열었다.


“젠장.”

이곳이 아니었다. 서둘러 다른 곳으로 달려 나갔다. 바로 옆, 또 다른 문을 열었을 때, 그 순간 내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김 과장이라는 개X끼 밑에 깔려 울고 있는 문다율만이 보였다. 그 뒤로는 사실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내 손은 이미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고, 그 피의 주인인 김 과장은 눈가와 입가, 그리고 코피가 터져 몸을 한껏 웅크린 채 벌벌 떨며 눈을 감고 있었다.

그 모습에 다시 손이 올라갔다. 그러나 더 때리지 못했다.


“하지 마. 하지 말라고.”

울먹이는 문다율의 목소리에 그럴 수 없었다. 나를 말리려 자리에서 일어나던 문다율은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주저앉았다. 나는 문다율에게 다가갔다. 헝클어진 옷을 정리해주려다 손에 묻은 더러운 피를 보고 내 옷을 벗어 문다율을 감쌌다.

벌벌 떨리는 몸을 끌어안았지만,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이 더러운 곳에서 벗어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사람들이 없는 한적한 곳으로 문다율을 데리고 나왔다. 다행히 조금 진정이 됐는지 자신은 괜찮다며 간신히 입꼬리를 올려 웃는 문다율. 그 모습에 죄책감이 물밀듯 밀려왔다.

조금 더, 빨리 찾았어야 했다. 아니, 애초에 문다율에게 시선을 거두는 것이 아니었다. 그랬더라면…….

문다율을 안고 서울로 돌아가는 택시 안. 어깨에 기대 잠든 문다율을 보고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여야 했다. 지킨다 했지만 지키지 못했던 나를 향한 분노를.

**

월요일 출근길. 사람들은 자신들의 호기심을 감추지 않았다. 노골적이었고, 무례했으나 일일이 반응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것도 안 물어보시네요.”

함께 회사 식당에서 팀원들과 식사하며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분위기에 먼저 입을 연 것은 나였다.


“솔직히, 좀 배신감은 느껴지는데요.”

“큼! 흠! 오늘 국이 짜네.”

막내 장우석 씨가 입을 열었을 때, 이경훈 연구원과 팀장님이 헛기침하며 막내의 입을 막으려 했으나 장우석 씨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두 분이 사귄다고 말 좀 해주시지. 저는 그것도 모르고 찬형이 형 칭찬을 그렇게 했잖아요. 저를 얼마나 밉게 보셨을까.”

“그건…….”

“네. 알아요. 회사에서 소문나봤자 좋을 것 하나 없다는 거. 그래도 배신감은 저도 어쩔 수가 없네요.”

정찬형 연구원과 같은 학교를 졸업한 장우석 씨는 문다율과 정찬형 연구원 사이에 스캔들이 터졌을 때, 그가 꽤 괜찮은 사람이라며 칭찬을 줄줄 늘어놓았었다. 덩치에 맞지 않게 새초롬한 표정을 지으며 국을 입에 넣은 장우석 씨가,


“국 안 짠데요?”

라며 이경훈 연구원을 바라봤다.

좋은 사람들.

좋은 조건으로 이직해 왔음에도 유난히 시끄러운 회사 분위기와 부담스러워하는 문다율 때문에 다시 이직해야 하나 고민했지만, 이 사람들 때문에 그러고 싶지 않았다.

조금은 어색한 한국말을 열심히 하는 팀장님도, 눈치가 빠르고 사람들 사귀길 좋아하는 이경훈 연구원도, 눈치는 없지만, 착하고 매력적인 막내도 좋았다.


“감사합니다.”

나는 나직이 감사하다는 말을 내뱉곤 마저 식사하기 시작했다.


“그럼, 오늘 커피는 Mr. Ji가 사는 거야.”

나는 팀장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점심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우리는 사내 카페로 올라갔다. 비싼 음료와 디저트까지 먹기로 했던 막내는 툴툴거렸지만, 우리 팀 누구도 귀담아듣지 않았다.

우리 팀이 막 카페에 도착했을 때, 평소와는 조금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몰려들었다. 정확히는 우리 팀이 아닌 나에게로. 그들을 무시하며 카운터로 가 주문을 하기 위해 메뉴판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허이. 지서준 연구원. 오늘 회사에 오니까 아주 스타가 됐던데. 아니, 원래 스타였던가?”

다른 팀의 수석 연구원인 시기원 연구원이 말을 걸어왔다. 말을 걸었다기보다는 시비를 건 것이 더 맞았으나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아 그저 가볍게 인사하고 다시 메뉴판을 보기 시작했다.


“트래블 플랜팀 누구랑 사귄다며? 그 사람 다른 연구원이랑 사귀는 거 아니었나? 여우라고 소문났던데, 괜히 물린 거 아니야?”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은 것은 오로지 내 일에 관련된 것만이라는 걸 이 사람은 모르는 듯했다.


“아. 뭘 그렇게 쳐다봐. 무섭게. 김 과장 얼굴을 아주 묵사발로 만들어놨더구먼. 얼굴은 안 그렇게 생겼는데, 운동했어요?”

“네. 운동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선을 넘는 놈들 패주려고 태권도, 복싱, 유도, 주짓수. 닥치는 대로 배웠습니다.”

내 대답에 움찔한 시기원 연구원이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다행히 제가 단수를 따기 전에 그만둬서요. 딱 사람 죽이기 전 만큼만 때릴 수 있습니다.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카페 안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그리고 저는 제 여자친구에 대해서 나쁘게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가끔 이성을 잃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조심하세요. 제가 조금 미친놈이거든요.”

“하하. 노, 농담도 잘하네요. 지 수석.”

“지금, 농담처럼 들리셨습니까?”

카페 직원들이 음료를 만들던 손도 멈춰버린 탓에 주위는 아주 조용했다. 시기원 연구원이 침을 넘기는 소리까지 들릴 만큼.


“함부로, 제 여자친구에 대해서 떠들지 말아 주세요.”

 

 
나는 마지막 말을 힘주어 크게 또박또박 말하며 카페 주위를 둘러봤다. 나와 눈이 마주친 사람들은 서둘러 시선을 피했다.

어버버거리는 시기원 연구원을 향해 웃음을 보이고 나는 고개를 돌려 카운터 직원에게 말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3잔이랑……. 우석 씨. 뭐라고 했죠?”

“토, 토피넛라테인데, 저지방 우유로…….”

“들으셨죠? 아메리카노 3잔이랑 그거 주세요.”

나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카페 직원에게 카드를 넘겼다.

**



“안녕하세요.”

“아. 네.”

환하게 웃으며 내게 인사한 사람은 문다율과 같은 팀의 여직원이었다. 서울 본사에 있는 자료실에서 나오는 길에 그녀가 있었다.


“어머! 이 손에 흉터 혹시 그때…….”

내 손에 있던 작은 흉터를 본 백인하 씨가 양손으로 입을 가리며 안타까워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혹시 제게 하실 말씀이…….”

“아. 그게……. 워크숍에서 있었던 일이요.”

워크숍이라는 단어에 내 몸이 민감하게 반응했다. 나도 모르게 날카로운 기운을 풍겼는지 백인하 씨가 움찔거렸다.


“그때 제가 대리님 옆에 있었더라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하고……. 너무 많이 후회했어요.”

처연하게 고개를 숙인 그녀가 작게 숨을 내쉬었다.


“미수로 그쳤지만, 대리님 많이 놀라셨던 것 같은데, 연구원님도 많이 놀라셨죠.”

“네. 걱정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아니에요! 당연히 걱정해야죠. 혹시, 제가 도울 일이 있다면 언제든지 연락해주세요.”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저는 이제 가봐야 해서요.”

“아! 네. 제가 눈치 없이 너무 붙잡고 있었네요. 그럼,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그녀를 지나쳐 복도 끝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여전히 복도에 서서 나를 보고 있는 백인하 씨는 내가 엘리베이터에 오를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이곳은 연구 자료실과 간단한 랩을 위해 마련된 곳. 일반 사무직 직원들이 오는 층이 아니었다. 그곳에서 우연히 만난 문다율의 후배.

내 본능이 경고의 신호를 울렸다.

그 후, 우연히 그녀를 또 보게 된 것은 문다율이 인사팀 김 과장을 사내 고충 처리부서에 신고한 후였다.

지방에 있는 연구소에 다녀와야 했던 날. 뒤늦게라도 보고를 하라는 팀장님의 말에 퇴근 시간이 훌쩍 지난 시각, 회사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저 여자는…….”

막 주차했을 때, 차 앞을 휙 지나친 여자는 백인하 씨였다. 평소에는 볼 수 없었던 표정의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어느 차에 올라탔다. 썬팅이 짙어 함께 있는 사람이 누군지는 알 수 없었다.


“7998.”

외우기 쉬운 차량 번호가 눈에 들어온 것은 우연이었다. 그리고 그 번호의 차량이 인사팀의 김 과장 차량이란 것은 그로부터 멀지 않은 어느 날 알게 되었다.

그녀일까.

회사에 악의적인 소문을 퍼트리고, 익명게시판에 글을 올렸던 사람. 물증은 없으나 심증이 그녀가 범인이라 말하고 있었다.

혼자 회사에 남아 익명게시판에 올라왔던 그 글을 읽고 또 읽었다.

두루뭉술하게 쓰여 있었지만, 나름 요목조목 그녀가 나와 정찬형 연구원과 만났던 일을 세세하게 적혀있었다. 꼭 옆에서 본 것처럼.

아무래도 백인하 씨에 대한 평판부터 알아봐야겠다 싶어 핸드폰을 들었을 때, 도이라에게 전화가 왔다.


“무슨 일로.”

-야! 너 어디야?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도이라가 내가 있는 위치를 물어왔다. 다급한 목소리에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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