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7화. 손에 잡은 모래알과 같이.
(93/97)
외전 7화. 손에 잡은 모래알과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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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7화. 손에 잡은 모래알과 같이.
2023.05.21.
-야! 너 어디야?
“회사.”
-다행이다! 너 빨리 여기로 와볼래? 문다율이랑 술을 마시다가 헤어지려고 하는데, 한……뭐라고 했지? 아! 한태이! 그 사람 발견하더니 얘가 냅다 뒤쫓아가지 뭐야. 아무래도 너한테…….
나는 도이라의 설명이 끝나기도 전 자리에서 일어나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서둘러 버튼을 눌렀지만, 오늘따라 느리기만 한 엘리베이터가 10층에서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젠장!”
나는 비상구 쪽으로 향해 달려갔다.
‘탕탕탕.’
조용한 회사 비상구는 내가 뛰어 내려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순식간에 도착한 회사 주차장. 사원증을 태그했지만 느긋하기만 한 자동문을 껑충 뛰어넘었다.
차 문을 거칠게 열어 시동을 켰다. 급하게 핸들을 꺾자 지하 주차장은 ‘끼기긱’하는 타이어 소리가 가득했다.
운전하는 내내 내 머릿속에는 안 좋은 생각들이 쉴새 없이 차올랐다. 워크숍 갔던 날, 벌벌 떨고 있었던 문다율의 모습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렸다. 나도 모르게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다행히 퇴근 시간을 비껴간 도로는 한적했다. 도이라가 말했던 장소에 얼추 도착하자 나는 길가에 차를 세웠다.
“도이라. 아까 헤어졌던 곳이 어디라고?”
차에서 내리자마자 도이라에게 전화를 걸어 위치를 확인했다. 도이라가 말한 곳으로 달려가 살폈지만, 문다율과 한태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생각해. 생각해 지서준. 그들이 어디로 갔을 것 같아. 그때 지나가던 사람들의 말이 선명하게 귀로 들어왔다.
“아까 어떤 남자가 여자 손목 붙들고 저쪽으로 가던데……. 신고 안 해도 되나?”
“에이. 둘이 연인사이면 괜히 복잡해져.”
나는 서둘러 그들을 붙잡았다.
“그 사람들, 지금 어디로 갔습니까?”
갑작스럽게 붙들린 그 사람들은 눈을 크게 뜨고 당황한 것도 잠시,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조금 전 저쪽으로 갔다며 알려줬다.
알려준 장소로 달려가며 문다율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안내 음성만 들릴 뿐이었다.
거친 숨이 나올 때쯤 작은 공원의 가제보 밑, 한태이와 문다율의 모습이 보였다.
“저 새끼가…….”
나는 곧장 달려가 한태이의 멱살을 붙잡았다. 내게 멱살이 붙잡힌 채 추억의 재현이냐며 능글맞게 웃는 한태이의 매끈한 낯짝에 주먹을 내리꽂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순찰하던 경찰인지, 아니면 누군가 신고를 했는지 경찰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능글맞은 한태이의 변명에 주의를 주고 떠난 경찰들. 경찰들의 덕분에 나는 조금 이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문다율을 카페로 보냈다. 더는 나 때문에 이런 더러운 꼴을 보여주기 싫었다. 가기 싫은 기색이 역력한 문다율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한태이가 말했다.
“눈물겨운 사랑이네.”
한태이는 한쪽 입꼬리를 비틀었다.
“내가 문다율 건드리지 말라고 했지?”
“내가 건든 거 아니거든? 내 뒤를 밟은 건 문다율이야.”
표정을 보아하니 한태이가 거짓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나를 가만히 보던 한태이가 입을 열었다.
“진짜 많이 좋아하는가 보네. 지서준.”
“헛소리하지 말고, 왜 다율이랑 있었던 건지 말해.”
“하!”
어이가 없다는 듯 눈을 찡그린 한태이가 거칠게 머리를 헝클이더니 가제보 밑 벤치에 앉아 주머니에서 담배 하나를 꺼냈다.
“너도 하나 필래?”
내가 아무런 답도 하지 않자, 고개를 끄덕이곤 입에 문 담배 끝에 불을 붙였다.
“뭐, 내가 아무 잘못이 없는 건 아니야.”
회사 인사팀의 유나라 씨와 우연히 알게 된 일, 그러다 또 우연히 나와 함께 일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말끝에 회사에 소문을 조장하게 만든 것이 이 자식 머리에서 나왔다는 말을 들었을 때, 다시 거칠게 한태이의 멱살을 잡았다.
“너 이 새끼…….”
멱살을 잡으며 떨어진 담배꽁초가 바닥에 떨어졌다. 여전히 불이 붙어 있는 담배는 바닥에 떨어지며 불꽃을 떨어트렸다.
“너는 지금도 참, 잘난 놈이더라. 나는 그게 또 왜 이렇게 싫은 건지.”
“미친놈.”
멱살 잡은 내 손에 더욱 강하게 힘이 들어갔다. 그러자 한태이는 숨이 막히는지 얼굴이 벌겋게 물들어갔다.
고통스러울 텐데도, 참 뻔뻔하게 내 눈을 피하지도 않고 바라보는 한태이. 나는 그때 머리에 찬물이 쏟아진 것처럼 머릿속이 차가워졌다.
“나는 네가 중학교 때 나한테 왜 그랬는지 더는 궁금하지도 않고, 너에 대한 아무런 감정도 남아 있지 않아.”
나는 한태이의 멱살을 놓으며 말했다.
“너는 더는 친구도, 뭣도 아니니까. 그런데!”
한태이는 내가 멱살을 놓자 숨이 쉬어지는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다율이는 건들지 마. 다율이 건들면, 네가 가진 모든 것을 망가트릴 거야. 지금 가진 것, 미래에 가질 것, 희박한 확률이지만 가질 수도 있는 것들 모두.”
“네가……. 하. 네가 퍽이나.”
“궁금해? 내가 할 수 있는지, 없는지.”
내 눈을 본 한태이가 흠칫 놀라며 몸을 굳혔다. 나는 그런 한태이를 두고 등을 돌렸다.
“너는! 너는 항상 모든 게 쉬운 놈이지! 인기도, 공부도, 따뜻하고 다정한 부모님도! 너를 위해 모든 내 던질 수 있는 친구도! 나는 죽어라 하고 노력해도 얻을까 말까 한 것들을 너는! 뭐가 그렇게 쉬운데! 이 재수 없는 새끼야! 으악!”
한태이가 뒤에서 소리를 지르며 발악했다.
그 뒤, 내 경고가 먹혀들었는지, 아니면 더는 나를 괴롭히는 것에 흥미를 잃었는지 한태이는 나와 다율이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감자를 캐야 했다. 똘이 그것을. 코를 찌르는 악취에 남아 있던 잠도 달아났다. 아침에 준 사료를 다 먹어 치운 똘이가 내 발밑으로 다가오더니 꼬리로 발을 휘감았다.
“네 주인은 그렇게 출장이 잦아서 널 어떻게 키우니.”
남준모는 유명 잡지회사에서 일하고 있다. 해외 패션위크 취재를 맡게 되었다며 약 한 달간 내 오피스텔에 머물게 된 똘이는 적응이 빨랐다.
털을 치우는 것은 꽤 귀찮은 일이었으나, 이렇게 한 번씩 애교를 부리는 똘이를 볼 때면 왜 문다율이 그렇게 ‘똘이 장군님’ 하며 쫓아다니는지 조금은 알 수 있었다.
문다율은 생각보다 똑 부러졌다.
피하는 인사팀 유나라 씨를 찾아가 당당하게 사과를 요구했다. 그리고 사과를 받아 냈다.
내 다리 사이에서 ‘애옹’거리며 얼굴을 비비는 똘이를 안아 올렸다. 부드러운 털을 만지며, 우연히 듣게 되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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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조그마한 계집애 하나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된 거 아니야. 괜히 그 여자 말을 들어서는……. 내가 미쳤지.”
핸드폰을 붙잡고 비상계단으로 향하던 김 과장을 본 것은 정말 우연이었다.
‘7998.’
백인하 씨가 올라탔던 차량의 번호. 그 차의 주인 김 과장. 찝찝했던 단편의 정보들이 떠올랐다.
나도 모르게 그를 뒤쫓았다.
“트래블 플랜팀에 문다율 옆에 항상 붙어 다니는 그 왜! 아. 미치겠다. 이번에 징계 제대로 떨어질 것 같은데……. 그냥 사표 낼까?"
다른 사람이 들어오며 대화는 더 이상 들을 수 없었지만 이로써 확실해졌다. 백인하 씨는 김 과장과 관련이 되어 있다.
그 사실을 문다율에게도 넌지시 알렸지만, 믿고 싶어 하지 않던 문다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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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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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옹.”
생각에 잠겨 있던 나는 똘이의 울음소리에 번뜩 정신이 들었다. 이제 슬슬 씻지 않으면 안 되는 시간이 되었다.
“오늘 네 팬 한 명 데리고 올 테니까, 집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알겠지? 소파 뜯지 말고, 사다 준 스크래쳐나 열심히 뜯어. 알았지?”
“야옹.”
정말로 알아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똘이 장군이 대답했고, 나는 흡족한 얼굴로 욕실로 들어섰다.
출근하기 위해 현관문을 나서는 나를 붙잡고 갸릉거리는 똘이 덕분에 평소보다 조금 늦은 출근이었다.
회사 건물이 가까워졌을 무렵.
‘끼익.’
차가 브레이크를 밟는 거친 소리와 함께 무언가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후 몇몇 사람들의 짧은 비명이 들렸고, 사고가 난 곳으로 사람들이 몰려가기 시작했다.
평소와 같으면 그냥 지나쳤을 소동이었다. 그러다 하얗게 질려버린 백인하 씨의 얼굴을 보고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고장 난 로봇처럼 뻣뻣하게 고개가 돌아갔다. 모여 있던 사람들 틈 사이로 비친 바닥에 떨궈진 팔이 유독 자세하게 보였다.
나도 모르게 움직였다. 나를 발견한 사람들이 조금씩 자리를 비켰다. 길이 난 자리. 그곳에서 나는 피를 흘린 채 바닥에 쓰러져 있는 문다율을 발견했다.
‘삐익.’
날카로운 이명이 귀에서 울려 퍼졌다. 시간이 멈춘 듯 모든 것이 정지된 것 같았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날카로운 기계 소리만이 내 귓가에서 멈추지 않았다. 문다율의 눈이 서서히 감기는 순간. 모든 시간이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했다.
“문다율!”
그제야 나는 쓰러져 있는 여자친구에게로 달려갈 수 있었다.
손에 느껴지는 따뜻하고 끈적이는 액체가 내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와 차가운 아스팔트 위로 뚝뚝 떨어졌다.
“누, 누가 구급차 좀 불러주세요! 119. 누가 좀 119를…….”
나는 멈출 기세도 없이 자꾸만 흘러나오는 붉은 피를 보며 절규했다.
그 뒤는 필름이 끊긴 것처럼 뜨문뜨문 기억이 날 뿐이다. 한참을 울부짖었고, 구급차에 함께 올라탄 나는 병원에 도착할 때까지 차가운 문다율의 손을 붙잡고 기도했을 뿐이었다.
그 뒤 응급실로 들어가자 달려온 의사들이 문다율을 살폈다. 그 후, 응급수술을 받기 위해 수술실로 들어갔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절망의 늪에서 간신히 고개를 내밀 수 있었던 건, 급하게 달려온 문다율의 부모님 덕분이었다.
“괜찮아. 괜찮아. 서준아.”
본인들도 놀라셨을 텐데, 애써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며 내 등을 토닥이는 아주머니와 아저씨를 보니 막혔던 숨통이 트였다.
“그렇게 심각한 거 아니라니까……. 그러니까 우리 너무 걱정하지 말고 지켜보자. 우리 다율이가 다른 건 몰라도 끈질긴 건 있잖아. 종종 앓기는 하지만, 애가 뼈대도 굵고 약해 빠진 애는 아니야. 알지?”
수술실 앞 모니터에는 [만 28세 문*율]이라는 글자가 박혀 있었다. 그 글자를 응시하며 아줌마는 계속해서 내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괜찮을 거야.”
자신에게 하는 말 같기도, 내게 하는 말 같기도, 신에게 하는 말 같기도 한 위로와 같은 바람은 ‘수술 중’이라는 글자가 사라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수술실 문이 열리고, 문다율의 수술을 집도한 의사가 나왔다.
“출혈량이 생각보다 많아서 급하게 응급수술을 들어갔는데, 다행히 다친 부위가 위험한 부위는 아니었습니다. 수술 과정도 좋았고, 잘 마쳤습니다. 회복실에서 깨어나면 집중 치료실로 갈 겁니다. 그 후 경과를 지켜보고 일반병실로 옮기죠.”
의사의 말에 그제야 온몸에 피가 도는 것 같았다. 아주머니는 연신 감사하다며 인사를 하며 울음을 터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