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11화. 끝나지 않은 이야기. (97/97)


외전 11화. 끝나지 않은 이야기.
2023.06.04.



 
선물이 찾아오고 4년이 흘렀다.

선물은 나에게 식욕과 잠을 가져다주었다. 일명 먹덧. 먹덧은 아이를 낳으러 병원에 가기 직전까지 계속됐었다.

그 덕분인지 아주 건강한 선물이 태어났다.


“엄마. 나 안 가꺼야.”

“안 가긴 어딜 안가.”

“아니. 아니야. 나 오늘 아빠랑 가치 회사 갈래.”

어린이집에 보내기 위해 옷을 입히는 내내 나는 딸아이와 입씨름을 벌여야 했다. 처음 옹알이할 때만 해도 언제 말문이 트여 나와 대화를 나눌까 손꼽아 기다렸건만, 입이 트여도 너무 잘 트였다.


“아빠 회사는 박사님만 가는 거야.”

“엄마도 가자나. 엄마 박타님 아니라고 할머니가 그래떠.”

아무튼, 우리 엄마가 문제였다.


“그래. 박사님 아니어도 갈 수 있는데, 적어도 대학은 나와야 하거든?”

“대학이 몬데? 나도 대학 나올래!”

아직 출근 시간까지 시간적 여유가 있었지만, 이렇게 아이가 떼를 쓰는 날이면 항상 아슬아슬하게 회사에 도착하곤 했었다.


“서우. 아빠랑 회사 가고 싶어?”

아침을 만들던 지서준이 아이 방으로 고개를 내밀고 활짝 웃었다.


“아빠! 터우 아빠랑 회사 갈래. 어리니집 안 가꺼야!”

“지서우! 옷 입히는데, 가만히 안 있을래?”

누구를 닮았는지 아주 고집이 쇠고집이었다.

내 딸은 올해 모두 혀를 내두른다는 미운 4살이었다. 또래 아이들보다 말이 빨라 문장 구사력이 뛰어난 서우는 제 아빠와 판박이처럼 태어나 산부인과를 들썩이게 했다.

내 속으로 낳은 자식이 맞나 싶을 정도로 예쁜 아이였다. 열심히 일한 지서준의 DNA에 흡족했던 것도 잠시. 지서우를 본 모든 사람은 외모는 아빤데, 알맹이는 엄마라 말했다.

나를 닮은 예쁜 딸을 보고 싶어 했던 시아버지와 지서준은 매우 안타까워하다가도, 서우의 애교에 누구보다 약했다.

우리 엄마는…….
 


“그래. 내가 절에 가서 그렇게 빌고 또 빌었잖아. 너 닮은 애 나왔으면 좋겠다. 그래야 네가 엄마의 노고를 알지.”

 
그랬었다.

엄마의 간절한 기도에 부처님도 감동했는지, 가끔 나는 나와 똑같이 행동하는 지서우를 보고 흠칫흠칫 놀랄 때가 많았다.


“음. 오늘 아빠는 회사에 가도 서우랑 놀아줄 수 없는데, 괜찮아?”

지서준의 말에 딸의 눈이 시무룩해졌다.


“서우 오늘 어린이집 다녀오고, 주말에 한강 가서 아빠랑 자전거 타러 가자.”

“자전거? 마니 탈거야?”

“응. 많이 타자. 약속.”

나는 아침부터 달달한 지 씨 부녀를 바라보다 지서준에게 서우 옷을 넘기곤 부엌으로 향했다. 아침 담당 지서준은 오늘도 완벽했다.

적당히 익은 토스트와 신선한 샐러드. 나는 토스트를 한입 베어 물며 능숙하게 아이의 옷을 입히는 지서준을 바라봤다.

아이가 다칠까 봐 잘 안지도 못했던 사람이 저렇게 육아에 능숙해질 수 있었던 건 피나는 노력 덕분이었다.

옷을 다 입은 지서우가 지서준의 손을 잡고 부엌으로 나와 제 자리에 앉았다. 오렌지 주스가 담긴 물통을 들고 빨대로 쪽 빨아올리는 아이는 제 아빠를 보며 싱긋싱긋 웃어댔다.


“할머니들 말씀 잘 듣고.”

“알고 이떠.”

알고 있긴. 나는 코웃음을 치며 지서우를 바라봤다.


“또 할머니들 졸라서 마트 가기만 해봐.”

할머니들을 요리조리 구워삶아 마트로 데려가 원하는 장난감을 얻어내는 데 탁월한 능력을 가진 지서우였다. 나는 딸아이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리는 모습을 보다가 한마디 더 얹었다.


“할아버지들도 안 돼.”

서우는 내 말에 입을 삐죽이더니 지서준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아빠는 엄마가 왜 조아?”

지서준은 서우의 질문에 마시던 커피를 내려놓았다.


“아빠는 엄마의 모든 게 좋은데?”

나는 아주 흡족한 대답에 입술을 씰룩였다. 내가 지서준을 향해 오른쪽 눈을 찡긋거렸다. 그러나 지서준은 내 윙크를 야멸차게 튕겨버리곤 사랑이 가득 담긴 눈으로 서우를 바라봤다.


“서우야. 빨리 밥 먹자. 어린이집 늦겠다.”

서우는 지서준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입을 삐쭉였다. 그러다 요즘 서우가 푹 빠져 있는 캐릭터가 그려진 접시 위에 빵을 들어 올렸다. 그러곤 한입 가득 베어 물었다.


“아빠! 꼭 터우랑 자전거 타야 해! 알게찌!”

“응. 약속했잖아. 그리고 서우야. 아빠가 밥 먹을 때는 꼭꼭 씹고, 꿀꺽 삼키고 말하는 거라고 했지?”

“웅!”

나와 지서준은 출근 준비를 마치고 서우와 함께 집을 나섰다. 헤어짐이 애달파 몇 번이고 뽀뽀를 주고받는 부녀를 떼어놓고 어린이집 선생님에게로 향했다.


“서우 안녕. 서우 어머님.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선생님.”

“오늘은 어머님이 오셨네요. 아버님은 바쁘신가 봐요.”

어린이집에서도 지서준은 아주 유명했다. 잘생긴 아빠로.


“네. 바쁜가 봐요.”

선생님들과 학부모들의 열렬한 시선을 부담스러워하는 지서준 대신, 아이의 등원 담당은 나였다. 정말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겨 먼저 출근하지 않는 이상 항상 내가 함께했다.


“서우 잘 부탁드립니다.”

서우가 대충 나에게 손을 흔들고는 선생님 손을 붙잡고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확인한 나는 지서준의 차가 서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지서준. 나야, 지서우야.”

“아침부터 그렇게 유치하게 굴면 좋아?”

“네가 서우 보는 눈빛이랑 날 보는 눈빛이 달라서 하는 말이잖아.”

함께 출근하기 위해 차에 올라탄 나는 내가 생각해도 유치한 질문을 던졌다.


“서우는 우리 딸이야.”

“알지.”

“아는데, 그런 질문을 해?”

어이가 없다는 듯 웃는 지서준. 나는 나이가 들수록 더 잘생겨지는 내 남편을 보고 있자니 더 심통을 부리고 싶었다.


“지서우한테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하고 물으면 1초도 망설이지 않고 아빠가 좋다고 말하잖아.”

“그야, 네가 항상 엄하게 혼내니까.”

“나까지 오냐오냐하면 지서우 버릇은 누가 고칠래?”

빨간불에 멈춰선 지서준이 천천히 차를 세웠다. 그러곤 내게 몸을 기울이더니 내 볼에 입을 맞췄다.


“뽀뽀로 때우기는.”

나는 히죽 웃으며 지서준이 아침에 내린 커피가 담긴 텀블러를 들어 올렸다.


“우리, 둘째 가지는 게 어때?”

“둘째?”

“나 아들 낳고 싶어. 지서준. 우리 아들 낳자.”

“서우 낳고 힘들어했잖아.”

나는 지서준의 반응에 놀랐다. 솔직히 내가 둘째를 가지자고 하면 지서준이 좋아할 줄 알았다.

지서준은 둘째를 낳자는 말에 고개를 저었다.


“너 힘들어서 안 돼. 아들 낳는다는 보장도 없고. 그리고 지금 서우도 엄마랑 장모님이 봐주시는데, 둘째까지 맡기는 건 힘드셔서 안 돼.”

“그때는 베이비시터 구하면 되잖아.”

“남한테 아이 맡기기 싫다고 했으면서.”

“둘째까지 생기면 어쩔 수 없으니까…….”

나는 회사에 도착하기 전까지 지서준에게 둘째를 낳자고 했지만, 지서준은 완강했다.

나는 완강한 지서준을 무너뜨릴 방법을 고민하고 고민했다. 그러나 논리와 말싸움으로는 지서준을 이길 능력이 부족했다.

그렇다면 방법은 단 하나였다.


“서우는?”

“오늘 서우 엄마 집에서 잔대.”

“장모님이랑?”

“응. 어머님도 같이.”

평소보다 일찍 퇴근한 지서준이 운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밤 8시가 조금 넘긴 시각. 자신이 들어오자마자 우다다 달려와 안겨야 할 서우가 없자 서운한 표정을 지으며 욕실로 들어섰다.

나는 욕실 앞에서 손을 닦고 있는 지서준을 보며 그윽한 목소리로 물었다.


“오늘 피곤한가?”

“아니. 괜찮은데?”

나는 씨익 웃으며 수건으로 손에 묻은 물기를 닦아내는 지서준을 끌고 부엌으로 향했다.


“이게…… 다 뭐야.”

“뭐긴. 요즘 야근도 자주 하고, 일찍 퇴근하는 날이면 집에 와서 서우랑도 놀아주고, 주말에도 잘 못 쉬니까 내가 걱정돼서 그러지.”

“……걱정되는 거 맞아?”

식탁 위에 차려진 장어덮밥, 장어탕, 장어구이, 장어 초밥을 보던 지서준이 물었다.


“당연하지! 자. 앉아.”

나는 지서준을 끌어 의자에 앉히고 싱크대 서랍을 열어 제주도에서 사 온 예쁜 소주잔을 들고 왔다.


“그건 왜 꺼내?”

“이런 좋은 음식에 술이 빠져서야……. 내가, 너 그렇게 가르쳤어?”

나는 냉장고에서 복분자주를 꺼내 식탁에 올려놓았다.


“요즘 내가 부족했어?”

“부족하긴, 항상 넘치지.”

“근데 왜?”

“일단 먹자. 응? 운동하고 와서 허기지잖아.”

나는 소주잔에 복분자주를 졸졸졸 따랐다. 아름다운 빛깔을 뽐내는 복분자주는 달큰한 향을 풍기며 얼른 자신을 마셔주기를 유혹했다.


“자. 짠 하자.”

불안한 눈빛을 보낸 지서준은 이내 내 저의를 파내기를 포기하고 복분자주를 들이켰다.


“이거 안주로 먹어.”

나는 그렇게 지서준에게 보양식을 가득 먹였다.

식사를 마치고 대충 정리하고 방으로 들어가자 지서준이 침대에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은 채 이불로 아슬아슬하게 가리고 누워 있었다.


“이걸 원한 거지?”

그래. 그걸 원하긴 했는데…….

나는 조금 겁이 나기 시작했다. 금요일에 먹일 걸 그랬나. 오늘 밤 무리하면 내일 일하기 힘들 텐데……. 그러나 지서준의 요염한 자태에 나도 모르게 홀린 듯 침대로 다가섰다.


“서우도 없으니까 오늘 원하는 걸 말씀해 보시죠. 문다율 씨.”

“……뭘 그런 걸 묻고 그래.”

괜히 부끄러워져 얼굴을 붉히자 지서준이 피식 웃고는 내 팔을 끌었다. 순식간에 내 위에 자리 잡은 지서준이 입술을 가져다 댔다.

결혼하고 5년이 됐지만, 여전히 나는 지서준의 키스에 약했다. 촉촉하고 조금은 뜨거운 지서준의 입술은 나를 집어삼켰다.

아득해지는 정신에 지서준의 목에 팔을 둘렀다. 내가 지서준의 목에 팔을 두르자 지서준은 더욱 나와 몸을 밀착했다.

서로의 심장 소리가 느껴질 만큼 가까운 우리. 그렇게 더욱 깊어지려는 순간.

‘띵동.’

눈치 없는 벨소리가 들렸다.


“자, 잠깐만 서준아. 누가 왔나 봐?”

“하. 누가. 우리 그냥…….”

“야! 벨소리 또 들렸다. 비켜봐.”

기다리라는 말에도 달려드는 지서준을 치우고 가운을 걸치며 거실로 향했다.


“엄마?”

-빨리 문 열어!

인터폰 화면에 엄마의 얼굴이 떠 있었다. 나는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지 불안한 마음에 서둘러 현관문을 열었다.


“엄마!”

문을 열자 서우가 내 다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서우야. 엄마. 무슨 일 있었어?”

“무슨 일은……. 갑자기 엄마랑 아빠 보고 싶다고 집에 가자고 울잖아.”

엄마의 말에 서우를 안아 들었다. 엄마의 말이 사실인지 서우의 눈가가 붉게 부어올라 있었다.


“전화하지. 나랑 서준이가 데리러 갔을 텐데.”

“전화했지! 안 받은 게 누군데. 지금 네 아빠 밑에서 기다려서 내려가 봐야 해. 얼른 들어가. 서우야. 할머니 간다.”

서우는 내 품에 얼굴을 묻곤 손만 흔들어 할머니에게 인사했다.


“장모님 오셨어?”

뒤늦게 옷을 갖춰 입고 나온 지서준이 내 품에 안긴 서우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서우가 집에 데려다 달라고 졸랐나 봐.”

서우는 제 아빠가 방에서 나오자 내 품에서 벗어나 냉큼 지서준의 품으로 옮겨갔다. 그런 서우를 안아서 토닥이던 지서준이 서우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려 하자 서우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터우는 엄마랑 아빠랑 잘래.”

서우의 말에 나와 지서준의 눈이 마주쳤다.

그날 밤, 결국 서우는 나와 지서준 사이에서 잠이 들었다. 서우가 잠이 들고도 지서준은 한참이나 뒤척였다.


“미안해.”

“뭐가.”

“장어 먹여서.”

나는 그날 밤 서우의 동생을 만들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포기를 모르는 여자였고, 그날로부터 2개월 뒤, 나는 또 다른 선물을 받았다.


“이번에는 정말 내 잘못 아니야.”

아직은 평평한 내 아랫배에 귀를 대고 있는 서우를 보며 지서준이 억울한 듯 말했다.


“그럼, 알지. 지서준 잘못 아닌 거, 내가 잘 알지.”

나는 지서준을 향해 환하게 웃어 보이며 서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엄마. 동탱이 여기 있어?”

“응. 서우 동생이 여기 있어.”

“칭기하다!”

동생이 생겼다는 말을 들은 후 내 옆에서 떨어질 줄 모르는 서우. 그런 서우를 보며 나와 지서준은 마주 보며 웃었다.

행복했다.


 
앞으로 9달 후면, 서우의 동생이 나오고 이제는 네 식구로 우리는 또 다른 행복을 맞이하겠지.

친구에서, 남편, 남편에서 아이의 아빠가 된 지서준은 여전히 잘생겼다. 그런 잘생긴 남편과 그를 닮은 예쁜 아이. 그리고 나를 닮았을지, 그를 닮았을지 모르는 뱃속의 작은 아이까지 함께한 지금.

29살, 실수에서 시작한 우리의 이야기는 해피 ‘엔딩’이 아닌, 진행 중이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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