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호랑이 굴에 제 발로 기어들어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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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호랑이 굴에 제 발로 기어들어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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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호랑이 굴에 제 발로 기어들어 가기>
2023.06.01.
취이이익!
냄비에서 물이 넘쳐 아래로 떨어졌다. 그리고 활활 타오르는 불에 닿기도 전에 허연 수증기로 변해 공중으로 날아갔다.
나는 그 어마어마한 화마를 보며 벌벌 떨었다.
정말, 내가 저기로 들어간다고? 안 돼. 사람 살려!
“다 끓었습니다, 이드리쉬 님.”
“이제 저걸 잡아 와.”
“옙!”
얇실한 대답과 함께, 왜소한 남자가 나에게 저벅저벅 다가왔다. 내 머리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지고, 커다란 손이 나를 콱 눌러 잡았다.
끄악!
나는 짧은 팔다리를 허우적거렸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순식간에 나는 도련님이라 불린 남자의 코앞에 있었다.
금색의 동공이 확장했다가 다시 세로로 길쭉하게 줄어들었다. 온몸의 털이 쭈뼛 섰다. 남자가 비소 가득한 입을 열었다.
“이걸 구워서 오늘 내 식탁에 내어라.”
사형 집행 명령이 떨어졌다.
‘안 돼! 살려 줘! 나 사람이야! 사람이라고! 나 죽이면 살인이야!’
안간힘을 썼지만, 끓는 물이 성큼성큼 빠르게 다가왔다.
‘하, 젠장. 나 또 단명하는구나. 그것도 펄펄 끓는 물에 삶아지면서.’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 * *
그러니까 나는 한번 죽었었다.
이 세상이 아니라 다른 세상에서.
어렸을 때부터 앓았던 병이 있었다. 희망을 잃지 않고 몇 차례 수술도 시도했지만, 그저 고통만 가중될 뿐이었다. 최후의 몇 년은 병원에 누워 고통을 견디며 소설 오디오북을 듣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그래서 죽음이 찾아온 순간엔 오히려 기뻤다. 더는 아프지 않아도 되고, 병원에 있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내 손을 잡고 오열하던 가족에겐 조금 미안했지만, 어쩌면 그들도 내가 이렇게 얼른 떠나는 게 더 좋은 일일 거다. 평생 나를 돌본다고 고생했잖아.
혹시나 다음 생이 있다면 제발 아프지만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아주 긴 시간을 눈을 감고 있던 것 같기도 하고, 찰나의 순간 같기도 했다.
그러니까 그 말은, 내가 다시 눈을 떴다는 거다.
가장 먼저 알아차린 건, 위화감이 들 정도로 거대한 숲의 풀들도, 전에는 본 적 없는 낯선 모양의 나무들도 아니었다.
‘어? 이상하다. 몸이 왜 아프지 않지? 꿈을 꾸는 건가, 아니면 죽어서 그런가? 여기 저승이야? 천국?’
나는 홀린 듯 몸을 움직여 키만큼 높은 큰 풀들을 지나쳐 걸었다. 발걸음이 이끈 곳은 맑은 물이 졸졸 흐르는 계곡이었다.
흐르는 물을 보니 목이 말랐다.
‘죽었는데도 목이 마를 수가 있나?’
생각과 동시에 본능적으로 물가로 손을 뻗었다.
아니, 그랬다고 생각했는데…….
‘으, 으악. 이게 뭐야!’
손 대신 정체불명의 길쭉한 게 보였다.
‘손이 아니야!’
손가락이 있어야 할 곳엔 작고 뾰족한, 흙이 묻어 있는 발톱이 네 개 달려 있었다. 분홍색의 통통한 손은 힘 줄 때마다 조금씩 움직거렸다.
‘내 손이 발이 되었어! 그것도 아주 작고 하찮은 발이!’
발이 된 손을 더듬고 싶었는데 손이 없어서 더듬을 수가 없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저승에 오면 모두 이런 태초의 모습이 되는 거야?’
경악하며 물가로 성큼 가까이 다가섰다.
내가 일으킨 바람에 잠시 흔들리던 물 표면이 금세 멈췄다. 그리고 그에 우거진 나무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거울처럼 선명하게 비쳤다.
명화 한 폭 같은 물그림자 가운데 내가 있었다.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요정의 신발처럼 길고 뾰족한 코가 경박하게 들썩였다. 컴퓨터용 사인펜으로 콕콕 찍어 놓은 듯 까맣고 작은 눈은 눈치 없이 맑게 반짝였다.
그리고 머리 위엔…….
‘으아아아아악! 이게 뭐야!’
경악하자 머리와 등에서 가시가 일제히 위로 빳빳이 일어섰다. 살아 있는 밤송이가 따로 없었다.
나 이 동물 뭔지 알아……. 그거잖아. 이름이 뭐더라. 똥 싸는 선인장인데.
맞아! 고슴도치!
……나 고슴도치로 환생했나 봐.
* * *
처음엔 매우 절망했다.
전생에서 평생 투병하다가 젊은 나이에 요절한 것도 슬픈데, 이젠 고슴도치?
하지만 그렇다고 멍하니 시간만 보낼 수는 없었다.
일단 배가 고팠다.
나는 돌아다니며 먹음직스러운 열매를 몇 개 주워 먹었다.
‘오? 맛있네?’
새콤달콤한 맛에 눈이 번쩍 뜨였다.
투병을 할 적엔 제대로 된 음식을 먹을 수도, 미각을 느낄 수도 없었으니 실로 오랜만에 느끼는 감각이었다.
나는 홀린 듯 먹고 또 먹었다.
배가 터질 듯 빵빵해지고서야 벌렁 드러누웠다. 처음으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새소리가 들리는 우거진 숲과 하늘을 주홍빛으로 물들이는 붉은 해, 그리고 맑고 신선한 공기.
‘이게 얼마 만에 보는 하늘이지?’
바람이 불었다. 빵빵해진 분홍 배 위의 가는 솜털이 하늘하늘 흔들렸다.
순간 울컥 눈물이 났다.
‘나 살아 있다. 아프지 않고.’
그래. 고슴도치면 뭐 어떤가. 사지 건강한데!
나는 그 순간, 세상에서 최고로 행복한 고슴도치가 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고슴도치의 삶엔 한 가지 무시할 수 없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다. 그걸 깨달은 건, 행복 도치로 산 지 한 달이 넘어갈 때 즈음이었다.
어디선가 사람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에 온 이후 처음이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나뭇잎 뒤에 숨어 몸을 웅크렸다. 소리가 가까워지더니 작은 체구의 두 사람이 나를 지나쳐 걸었다.
“그 소문 정말이야?”
낯선 언어였지만,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목소리 낮춰. 이거 극비라니까? 그들이 살아 있다는 게 알려지면 우리 종족도 죽은 목숨이야.”
“이 깊은 숲에서 누가 듣는다고. 그래서 그게 정말이냐니까?”
“그래! 우리 형들이 그 집에서 일하잖아. 원래 그 집 작은도련님 숨이 아예 끊어졌었어. ‘그것’ 아니었으면 진작 죽었을걸. 산 생물이 그걸 달여 마시면 수명이 50년은 더 늘어난다고 했어.”
잠깐만, 수명?
머리를 얻어맞은 듯했다.
‘왜 지금껏 그 생각을 못 했지? 고슴도치 수명이 얼마나 돼? 10년 정도 사나? 10살이면 초등학교 3학년이잖아? 너무 적어.’
심지어 현재 자신의 나이도 몰랐다.
혹시 내가 이미 9살이라면? 수명의 끝이 코앞까지 닥쳤다면!
‘말도 안 돼. 이대로 죽을 수는 없어. 이제 막 고슴도치로 행복하게 살리라 다짐했는데, 줬다가 뺏기 있냐고요.’
나는 그들의 뒤를 슬금슬금 쫓았다.
“그 저택이 어디에 있는데?”
“서쪽으로 쭉 가서 붉은 절벽 아래를 보면……. 잠깐만. 그걸 왜 물어보는데?”
“우리 ‘그거’ 훔쳐서 팔자.”
아. 그게 뭔데요. 같이 좀 압시다.
“끔찍한 소리 하지 마. 도대체 백호의 수염을 어떻게 몰래 훔쳐? 그 집 주인들한테 들키면……. 어휴. 당장 너구리 통구이가 될걸.”
백호의 수염?
……여러모로 믿기지 않는 말이었다. 여기가 무슨 소설 속도 아니고.
하지만 벼랑 끝에 몰린 자가 무엇을 마다하겠는가.
‘그래. 죽었다가 고슴도치로 환생하는 일도 있는데, 수명을 늘려 주는 백호 수염이라고 없으라는 법 있나?’
만에 하나 그들의 말이 진실이라면 이건 나에게 절호의 기회였다.
단명하지 않을 기회! 세계 최고 장수 고슴도치가 될 기회!
그들이 말하는 백호가 정말 흰 호랑이인지, 은유적인 표현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뭐 가 보면 알게 되겠지.
나는 사람들이 일렀던 방향대로 걷기 시작했다.
깊은 숲을 헤매며 일주일을 걸었다. 지쳐서 가시 세울 힘도 없어질 무렵, 눈앞에 백호의 저택이 보였다.
‘크다…….’
저택은 한눈에 다 담기지 않았다. 하지만 크기만 크지, 겉보기엔 반쯤 무너져 가는 듯 허름했다. 을씨년스럽게 우거진 나무 사이에 묻혀, 더욱 기괴한 느낌을 주었다.
‘너무 음산해. 이러다 정말 고슴도치 통구이가 되진 않겠지?’
저택 주변을 돌다가, 쥐구멍을 찾아 안으로 쏙 들어갔다. 막상 저택 안으로 들어서자 나는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와……. 와……! 엄청 화려하잖아?’
별천지였다.
도둑질하러 왔다는 것도 잠시 잊고, 멈춰 서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바닥과 벽의 새하얀 대리석은 흠집 없이 매끄러웠다. 천장은 고슴도치 1,200마리를 데려와 위로 쌓아도 닿지 않을 듯 높았고, 그 천장에 구름처럼 매달린 거대한 천사 모양의 대리석 조각상은 저택 내부 전체를 아울러 살피는 듯했다. 그 주변으론 촘촘한 횃불이 공간을 채웠다. 꼭 천국을 걷는 듯했다.
양옆엔 백호 조각상이 줄지어 서 있었는데, 어찌나 진짜 같은지, 보기만 해도 네 다리가 호달달 떨렸다. 특히 눈에 박힌 큰 보석은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반짝여서 꼭 나를 주시하는 거 같았다.
‘금방이라도 날 잡아먹을 것 같아.’
하지만 거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어서 ‘그것’을 찾아서 훔쳐야 한다!
넓디넓은 저택을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가끔씩 지나다니는 사용인들의 눈을 피하느라 쉽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고슴도치는 백호를 찾아냈다.
3층, 가장 중앙에 위치한 방.
달빛이 정면으로 비춰드는 곳에 바로 그것이 있었다.
‘지, 진짜 호랑이야.’
거대한 동물의 하얀 털이 그 달만큼 찬란하게 빛났다. 꼭 전설 속에 나오는 영물을 보는 듯했다.
거대한 짐승은 눈을 감고 천천히 숨을 쉬었다. 편안하게 풀어진 모습인데도 엄청난 위압감이 들었다. 여태껏 망설인 적 없던 다리가 저절로 뻣뻣하게 굳었다.
더 다가가면 죽을 거라고, 그러니 어서 도망치라고 본능이 소리쳤다.
‘아니지. 저기 수염이 코앞인데 어딜 도망가. 일주일도 넘게 걸었다고.’
이 저택에 오기까지 험난했던 나날들을 떠올렸다. 날짐승을 만난 기억, 탈수 직전 내린 빗물을 받아 마신 기억, 고된 일정에 가시가 후두두 빠진 기억!
‘여기서 포기할 거면 애초에 오지도 않았어.’
용기를 내어 얼어붙은 앞발을 움직였다. 한 걸음을 내디디니 그다음은 좀 더 수월했다. 나는 끙끙거리며 침대로 기어 올라갔다.
‘근데 무슨 호랑이가 침대에서 자? 그것도 제일 좋은 방에서?’
혹시 주인이 근처에 있는 건 아닌가 두리번거렸지만, 호랑이를 빼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애완, 아니 반려 호랑이를 얼마나 아끼기에 이런 지극한 대접을 하는 것일까? 생각 있으면 반려 호랑이 대신 반려 고슴도치를 키우는 건 어떤지 물어보고 싶다.
배변도 잘 가리고 애교도 잘 부릴 수 있는데. 앉아, 손, 돌아 모두 다 가능합니다. 이 시대의 진정한 반려동물은 고슴도치……!
어느새 백호와 가까워졌다. 나는 잡념을 비워 냈다.
백호가 눈을 뜨고, 발을 뻗으면 닿을 거리였다. 식은땀으로 배가 축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