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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내 가시를 만지지 마세요!> (2/15)


2화 <내 가시를 만지지 마세요!>
2023.06.02.


‘제발 깨지 마세요. 당신의 숙면을 기원합니다.’

가까이서 본 백호는 멀리서 보던 것보다 몇 배는 더 무서웠다.

거대한 머리통엔 윤기가 흐르는 털이 북슬북슬했다.

몸에 이어 머리와 볼까지 이어지는 검은 줄무늬는 하나하나가 나를 바라보는 매서운 눈 같았다. 내 몸통만 한 커다란 코 옆으론 내 목표물인 흰 수염이 위풍당당하게 펼쳐졌다.

‘좋아. 빠르게 처리하고 사라지면 들키지 않을 수 있어. 딱 세 개. 세 개만 부탁드려요. 죄송.’

나는 숨을 들이마시곤, 그것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문득, 털에 파묻힌 발톱을 보았을 땐 자기도 모르게 가시를 파르르 떨었다. 당장이라도 저 발톱이 나를 덮칠 거 같아 정신이 아찔했다.

그래도 멈추면 안 돼.

가까스로 불안을 떨쳐 내고는 수염을 향해 더 다가갔다. 목표가 지척이었다!

‘근데 수염을 어떻게 잘라가지?’

생각해 보니 가위도, 칼도 없었다. 그걸 쓸 수 있는 손도 없었고.

나는 결국 내 유일한 무기라고 할 수 있는 이빨을 사용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것을 사용하기 위해선……. 저 북슬북슬 거리는 볼 털에 내 얼굴을 파묻어야 했다.

나는 최대한 숨을 참고, 얼굴을 수염뿌리 가까이 가져갔다.

그러자 간지러운지, 호랑이의 얼굴이 느릿하게 움직거렸다.

와씨. 심장이 갓 잡힌 생선처럼 펄떡펄떡 뛰어서 입 밖으로 당장 튀어나올 거 같았다.

나는 호랑이의 얼굴에 얼굴을 붙인 채, 호랑이의 움직임이 멈출 때까지 다시 기다렸다. 그러곤 잠잠해지자마자 다시 입을 놀렸다.

잘근잘근.

호랑이 놈. 수염도 얼마나 굵은지 잘 잘리지도 않았다.

턱이 떨어져라. 열심히 씹었다. 그리고 대망의 첫 수염이 툭. 하고 떨어졌다.

와! 내 수명 늘어난다!

무사히 성공하자 나는 좀 더 과감해졌다. 아까보다 깊은 곳에 있는 수염을 향해 다시 한번 얼굴을 밀어 넣었다.

그 순간, 호랑이의 뺨 털이 영 좋지 못한 곳을 찔렀다. 바로 건포도같이 생긴 작고 소중한 내 콧구멍.

작기도 참 작은데 어쩜 거기로 딱 들어갔을까.

에흐, 간지러워. 흐으.

“……치! 치! …… 치!”

나는 그대로 굳었다가 천천히 눈을 떴다. 눈앞에 매서운 눈동자가 번득였다. 샛노란 눈동자는 크게 확장했다가 다시 세로로 길쭉해졌다. 소름 끼치게 움직이던 동공이 정확히 고슴도치의 얼굴에 고정되며 멈췄다.

“그르르르.”

호랑이의 살기 가득한 경고음이 천지를 울렸다. 소리와 함께 붉은 잇몸과 무시무시한 이빨이 나를 향해 번득였다.

허흐윽.

극도의 공포심에, 그대로 눈앞이 캄캄해졌다.

* * *

그렇게 기절한 후, 눈을 뜨니 저 냄비 앞이었다. 호랑이에게 한입에 삼켜지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지만, 그렇다고 낙관적으로 볼 만한 상황도 아니었다.

삶은 고슴도치가 되기 직전이었으니까.

“이드리쉬 님. 이자도 정찰병일까요? 이번 달만 벌써 몇 번째인지, 조만간 거주지를 옮겨야겠어요.”

정찰병은 무슨. 어떤 정신 나간 사람이 고슴도치에게 정찰병을 맡깁니까? 정찰을 하면 뭐해, 말을 못하는데.

“아니, 옮기지 않는다.”

“옮기지 않아요? 하긴, 이런 사소한 일로 집까지 옮기는 것도 이상하긴 합니다. 이 고슴도치 심지어 결계를 뚫고 들어왔어요. 그런 걸 보면 정말 야생동물인 거 같기도 해요.”

조그만 남자는 혼자 종알종알 이야기했다.

이드리쉬? 저 남자의 이름인가?

어딘가 익숙했다. 분명 아는 이름 같았다.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아서 다음 대화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럼 저 짐승의 정체를 확인해 보지.”

“좋습니다. 자고로 고전적인 방법이 가장 잘 통하는 법입니다요. 자, 준비되었어요. 물이 다 끓었습니다.”

“이제 저걸 가져와.”

남자가 나를 향해 걸어왔다. 안 돼!

나는 구석에 머리를 콕 박고 웅크렸다. 하지만 그러기 무섭게 그는 나를 콱 눌러 잡아 이드리쉬라고 불린 남자에게 끌고 갔다.

이드리쉬의 금색 동공이 확장했다가 세로로 길쭉하게 줄어들었다. 기시감이 들었다.

이 소름 끼치는 감각. 살기. 공포심.

‘이건……!’

그 무시무시한 백호의 눈과 꼭 같았다.

그러고 보면 눈뿐이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흐트러진 흰 머리칼과 창백한 피부, 그리고 완벽한 대칭을 이루는 진한 이목구비도 아까의 백호를 연상시켰다. 소름이 끼쳤다.

나, 나르시시즘?

자신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자신과 꼭 닮은 반려동물을 데려와 키우게 된 걸까? 그거 참 이상한걸.

“이걸 삶은 뒤 노릇노릇하게 구워서 오늘 내 식탁에 내어라.”

“쉬익!”

끔찍한 말을 들어도, 나같이 힘없는 소동물이 할 수 있는 공격은 몸에 가시를 세우는 것뿐이었다.

“정말 드시려고요? 전 또 그냥 고문용인 줄 알았는데요. 사실 고슴도치가 손질이 얼마나 오래 걸리는지, 그에 비하면 영 효율이 좋지 못해서…….”

이드리쉬가 작은 체구의 남자에게 매서운 눈빛을 날렸다.

“아, 예예. 지금 그게 문제는 아니겠지요. 분부대로 할게요. 이놈의 입입. 요망한 입!”

남자는 덧니를 드러내며 멋쩍게 웃었다. 그러다 자신의 입을 통통한 손으로 찰싹찰싹 때렸다.

‘아냐, 저 사람 말이 맞아. 나 맛없어요!’

필사적으로 버둥거렸지만 시시각각 냄비의 끓는 물이 가까워졌다. 뜨거운 수증기가 배털에 와 닿았다. 나는 조금이라도 멀어지기 위해 짧은 다리를 오므렸다. 역부족이었다. 천천히 물이 가까워졌다. 내 뒷발 끝이 물에 닿았다. 뜨거운 감각보단 공포가 먼저였다.

고슴도치 살려! 사람 살려!

그때였다.

“잠깐.”

잠깐이래! 멈춰! 스탑잇!

이드리쉬가 다시 나를 집어 들었다. 조각 같은 얼굴이 한 치 앞으로 가까워졌다. 난 숨을 식식 몰아쉬며 몸을 둥글게 말았다. 팔다리와 머리가 배 속으로 쏘옥 숨었다. 그러곤 눈만 살짝 들어 그를 살폈다.

“이건 내가 데려가서 좀 더 확인하겠다.”

“아, 네네. 그렇게 하세요. 필요한 거 있으면 명하시고요. 칼이라든가, 인두라든가.”

저 사람이 못하는 말이 없네. 칼이랑 인두는 뭐하게요?

“다 가져와.”

말을 듣던 고슴도치가 끽! 소리를 질렀다.

“다 가져와.”

이봐욧!

이드리쉬는 나를 꽉 움켜잡고는 밖으로 나왔다.

거기엔 낡고 녹슨 새장이 있었다. 나를 안에 집어넣으려다가, 잠시 멈추고 다시 나를 찬찬히 살폈다.

“흠.”

이제야 이드리쉬의 얼굴이 제대로 보였다.

사람의 것 같지 않은 은색 머리칼과 그것만큼이나 흰 피부, 고양잇과의 그것 같은 노란 눈. 태산 같은 덩치 등 특이한 점을 많이 가지고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본다면 제법 봐줄 만한 얼굴이었다. 아니, 사실은 봐줄 만한 정도가 아니라 끝내줬다.

물론 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이 잘생기든 말든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정체를 밝혀. 고슴도치.”

정체는 무슨. 그냥 평범한 수염 도둑이에요. 고슴도치가 정체를 숨겨 봤자 뭐가 있겠어요…….

속으로 불만을 꿍얼거리며 몸을 더욱 말았다.

하지만 이드리쉬는 그런 나를 용납할 수 없다는 듯, 가시 사이로 난 틈새를 손가락으로 쑤셔 넣었다.

거기 얼굴이야! 웁!

이드리쉬는 그게 무슨 부위인지 자각하지 못한 모양이었지만 내 얼굴은 막무가내로 문질러지고 있었다.

나는 정신을 못 차리다가 웅크린 몸을 풀었다. 그러자 이드리쉬는 이번엔 내 뒷다리 하나를 잡고 쭉 늘렸다.

“참 괴상하게 생겼군. 등은 가시투성이고 배엔 솜털이 가득하다니.”

이드리쉬는 내 배를 쿡 찔렀다.

쿡. 쿡쿡.

어쩐지 손가락이 멈추지 않고 계속 내 뱃살을 만졌다.

안 되겠다. 내 숨겨 놓은 비장의 무기를 꺼낼 때가 온 것 같군.

나는 그의 손가락을 콱 깨물었다.

앞니 두 개가 깊은 자국을 남겼고, 핏방울이 몽글몽글 솟았다.

봤나? 비록 큰 상처는 아니지만 아주 깊은 상처다. 아마 오늘 밤엔 손가락이 아파서 잠을 설치게 될걸? 쌤통이다.

하지만 고통에 몸부림치며 나를 놓아 버릴 거라는 내 예상과 달리, 이드리쉬는 나를 관찰하기 바빴다.

……녀석 제법 참을성이 좋은 모양이군.

그러다 문득, 이드리쉬의 손이 멈췄다.

어딜 보는 거지?

나는 그의 시선을 따라 먼 곳을 보았다.

“저게 뭐지? 대왕 고슴도치인 거 같은데. 밤송이. 네 엄마가 너 데리러 왔나 보다.”

엄마? 나 엄마 없는데.

나도 고개를 쭉 펴고 숲 쪽을 열심히 살폈다. 코도 빠르게 위아래로 실룩였다. 하지만 울창한 풀과 나무뿐, 다른 고슴도치는 없었다.

아무것도 없잖아.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이드리쉬를 본 순간, 배에서 식은땀이 삐질 흘렀다.

이드리쉬는 사악하게 웃었다.

“이것 봐. 너 내 말 다 알아듣지?”

아, 아니요. 전혀요.

나는 순진한 척 눈을 끔뻑거렸다.

“아까부터 내 말에 하나하나 반응하더군. 보통의 고슴도치라면 사람의 말을 알아들을 리가 없잖아. 그 말은 즉, 넌…….”

설마 이걸 보고 내가 갑자기 고슴도치 몸에 들어온 사람이란 걸 알아차리는 건 아니겠지?

에이, 설마. 그건 상상력이 너무 뛰어나잖아.

“너는 분명 수인이다.”

수인?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순간이었다.

이드리쉬의 얼굴이 괴이하게 움직였다.

동공이 크게 벌어지는가 싶더니 얼굴 위로 검은 줄무늬가 돋아났다.

눈은 더 매섭게 커졌고, 코도 짐승의 것처럼 크고 둥글어졌다. 그리고 머리 위엔, 흰색의 뾰족한 두 귀가 돋아났다.

이, 이게 뭐야.

머리가 핑핑 돌았다.

그가 변하기 전에 ‘수인’이라는 말을 해 줘서 다행이지, 아니면 진짜 놀라 기절했을 거다.

이제야 모두 이해가 갔다. 이 저택을 백호의 저택이라고 하는 이유와 나를 두고 정체를 밝히라고 닦달한 것.

그르르르.

기절하기 전에 들은 것과 똑같은 소리였다. 정신을 단단히 붙잡아 기절하는 건 간신히 막았지만, 공포심에 사지가 오그라들었다. 네 다리가 강풍 앞의 모기 다리처럼 달달 떨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백호의 검은 줄무늬가 다시 사그라들었다. 귀도 다시 사라졌다. 다시 잘생긴 얼굴이 나타났다. 그는 잔뜩 인상을 썼다.

“이게 뭐야. 설마…….”

그가 내 엉덩이를 유심히 보았다. 어머 어딜 보세요.

“너 지금 내 손에 오줌 싼 거야?”

어머나.

이드리쉬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그의 얼굴에 경멸이 가득 찼다. 그는 내던지듯 나를 새장에 가두었다.

“이 괘씸한 것이 제풀에 지쳐 수인화할 때까지 가둬 두고 물 한 모금 주지 말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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