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젠장. 빨가벗었잖아>
(3/15)
3화 <젠장. 빨가벗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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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젠장. 빨가벗었잖아>
2023.06.03.
아니……. 나도 싸고 싶어서 싼 게 아니라고. 작디작은 소동물을 붙잡고 그렇게 무섭게 그르렁거리니까…….
하지만 항변할 여지는 없었다.
나는 그대로 새장 근신형에 처해졌다. 이드리쉬가 떠나고 나자, 나 혼자만 덩그러니 남았다.
바로 앞이 숲이어서인지, 온갖 공포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휘이익. 끼익 끼익. 크르릉. 까악까악. 카아악 퉤.
마지막 건 누가 침 뱉는 소리 아냐?
아니,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지. 공포에 질려 있을 때도 아니고.
나는 어마어마한 양의 새 정보들을 정리해 나갔다.
여기는 수인들의 세상. 저 남자의 이름은 이드리쉬. 숲속에 숨어서 살아가는 백호.
이 정보들은 전부 한 가지 방향을 가리켰다.
바로 전생에 병원에 입원했을 때 들었던 오디오북 ‘똬리 속의 토끼’.
나는 희미한 기억을 더듬었다. 오디오북을 들으며 잠들기가 일쑤여서 정확한 기억이 나지는 않았지만, 대략적인 내용은 확실했다.
여주인 토끼가 뱀 수인 남주를 만나 본능과 싸워 가며 사랑을 이루어 내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당연히 이 소설에도 악역이 있었는데 그게 아무래도 바로 저 녀석인 거 같다. 저 나를 속이고 가둔 요망한 백호!
소설 속에서 백호는 왕족이었다. 하지만 호랑이 특유의 타인에게 무심한 성격 때문에 나라가 제 꼴로 돌아가지 않은 모양이다. 게다가 항의하는 수인들을 죽여 버리기까지 한다.
결국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고 결국 백호 가문은 멸문한다.
그 뒤 수인 왕국 데로드에선 뱀·독수리·늑대라는 세 가문 간의 권력 싸움이 시작된다.
그 삼파전을 끝낸 건, 멸망한 줄 알았던 백호의 재등장이었다. 그들은 세상에 복수하겠답시고 왕국 전체를 아주 초토화를 해 놓는다. 그때 우리의 남주 뱀 수인 오자르가 짜잔 하고 나타나 세상을 구원하고 결국 권력도, 사랑도 모두 가지게 되었다는 단순한 이야기이다.
이야기를 들을 때는 그저 재미있는 사랑 이야기구나 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렇게 책 속으로 들어오면 말이 또 달라지지. 심지어 백호한테 제 발로 찾아와 잡혔으니!
‘이걸 먼저 알아차렸으면 백호가 아니라 우리 선량한 남주 오자르한테 갔을 텐데. 왜 이제야 알게 된 거냐고.’
하지만 후회해서 무엇 하리. 이미 백호에게 잡힌걸.
얼른 도망칠 궁리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정말 나도 수인일 수도 있는 거지? 좋아. 사람이 되면 이 새장에서도 벗어날 수 있을 거야. 근데 의인화는 어떻게 하는 거지? 변해라! 변해라!’
이리 끙끙 저리 끙끙 온몸에 힘을 줘 보았다. 하지만 무섭도록 아무 일도 없었다.
그러길 한참, 나는 결국 새장에 널브러졌다. 힘만 들었다.
‘……그냥 희망 고문만 당하는 거 아니야? 나 그냥 진짜 순수 고슴도치 같은데.’
작은 콧구멍으로 한숨을 픽 내쉬었다.
* * *
‘목말라…….’
사람이 되어 보려 내내 애썼지만 소용없었다. 이쯤이면 나는 정말 그냥 평범한 일반 도치인 거 같다. 그리고 그런 평범한 도치가, 이 새장을 뚫고 도망칠 수 있을 리가.
긴 나날 동안 이드리쉬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나를 구경하러 오는 사용인은 있었지만, 누구도 나에게 물 한 모금 주지 않았다. 낮에는 머리 위로 내리쬐는 햇볕에 지쳐 늘어져 있다가, 새벽이 되면 철장에 붙는 이슬을 핥아 먹으며 겨우겨우 버텼다.
그렇게 사흘째 되던 날. 해가 다 저물어 어두워진 시각이었다.
“밤송이.”
나는 가시 하나 들 힘도 없어 그대로 누운 채 눈만 대록대록 굴렸다.
이제 헛것이 들리네.
그때, 철커덩 요란한 소리를 내며 새장 문이 열렸다.
뭐, 뭐야. 환청이 아니었어?
벌떡 일어나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이드리쉬가 나를 낚아챘다.
“쉬이익!”
“용케 살아 있군.”
그렇게 중얼거리곤, 이드리쉬는 진지한 얼굴로 또다시 내 가시를 뽑았다.
아악, 아파욧! 뭐 하는 짓이에요!
놀라 비명이 터져 나왔다.
확 깨물어 버린다!
이드리쉬의 손을 향해 앙앙! 입질을 했다. 하지만 꽉 잡힌 탓에 목표물에 입이 닿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드리쉬는 뽑은 가시들을 손수건에 고이 싸서 안주머니에 넣었다.
원하는 만큼 채취를 마친 건지, 이드리쉬가 다시 나를 새장으로 집어넣으려 했다.
꺼낼 땐 마음대로 했지만 집어넣을 땐 아니야.
나는 새장 문이 닫히는 순간을 노렸다.
이 틈에 재빨리 도망을 친……. 악! 머리가 문에 끼었어! 열어 줘!
이드리쉬가 문을 다시 열었다.
휴, 머리 으깨지는 줄 알았어……가 아니라 사실 연기였다! 다시 시도한다, 탈출!
밀어 넣으려는 이드리쉬와 머리를 끼워 넣어서라도 새장 문이 잠기는 것만은 막고 싶은 나의 불꽃 튀는 기 싸움이 이어지던 순간이었다.
휘융!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이드리쉬가 내 쪽을 향해 손을 뻗었다.
때리는 건가!
나는 깜짝 놀라,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펄쩍 뛰며 밤송이 모드가 되었다.
하지만 나는 곧 이드리쉬의 손에 박힌 화살을 발견했다.
분명 이드리쉬의 손은 내 코앞에 있었다. 그러니까 저 화살, 내 쪽으로 날아왔던 거야? 이드리쉬가 막아 주지 않았다면, 당장 저기에 온몸이 꿰뚫려 죽었을 거다.
다리에 힘이 쭉 풀려 그대로 주저앉았다.
아니, 정신 차리자. 누군가 화살을 날렸다면 곧 다음 화살도 날아올 수 있다는 거였다. 당연히 화살의 끝은 이드리쉬를 향할 거였지만, 혹시 아나. 조금 전처럼 조준을 영 못 하는 놈이 있을 수도.
피할 자신은 없었지만, 나는 긴장감을 끝까지 끌어올렸다. 하지만 짙게 어둠이 내린 숲에선 무엇 하나 보이는 게 없었다.
그때 이드리쉬는 이미 백호로 변해 있었다. 나 대신 맞은 화살 때문에 왼손의 하얀 털은 붉게 물들었지만, 그는 조금의 아픔도 느끼지 못하는 듯 보였다.
공기가 팽팽하게 당겨지며, 긴장감이 맴돌았다. 이드리쉬는 어둠 속 한 점을 정확히 응시했다. 그의 노란 눈동자는 도깨비불처럼 빛났다. 천천히 뒷발을 물리자 온몸의 근육이 정교한 예술작품처럼 움직였다.
으르르. 들릴 듯 말 듯 낮은 소리에 내 털까지 쭈뼛 일어섰다.
지금 이드리쉬는 범접할 수 없는 포식자이자, 맹수였다.
이드리쉬가 천둥 같은 울음을 내며 뒷발을 박찼다. 바위같이 거대한 몸채가 날듯 튀어 올랐다.
“으아악!”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한 어둠에서 비명이 들렸다. 당연히 이드리쉬의 것은 아니었다. 방금 비명의 주인공인 듯한 사람이 피투성이가 되어 내 쪽으로 기어 나왔다. 뒤이어 이드리쉬도 다시 나타났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검은 두건으로 얼굴과 머리를 가린 열댓 명의 남자가 그에게 칼을 겨누었다.
심장이 오그라드는 침묵이 이어졌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팽팽히 당겨진 긴장감에 살이 베일 거 같았다.
백호는 피가 묻은 이빨을 드러냈고, 다음 순간 두건을 쓴 자들이 먼저 백호에게 일제히 덤벼들었다. 백호가 가장 왼쪽에 있던 남자의 다리를 물어 던졌다.
야, 근데 왜 이쪽으로 던져!
남자의 엉덩이가 순식간에 가까워지더니 급기야 새장을 덮쳤다.
우당탕.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세상이 빙빙 돌았다.
아이고, 머리야, 허리야. 전치 2주 감이네.
나는 나를 짓누르는 무거운 것에서 간신히 기어 나왔다. 그리고 나오자마자, 나를 깔아뭉개고 있던 남자와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남자가 눈을 살기로 번득였다.
저, 전 신경 쓰지 마시고 싸우던 거 마저 싸우세요.
하지만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다리엔 철철 피를 흘리면서 끙끙거리며 품에서 단도를 꺼냈다. 그러곤 나를 향해 휘둘렀다.
저는 그냥 무고한 백호의 반려 도치라니까요?
아니, 이곳 사람들은 고슴도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굳이 주적의 반려동물을 죽이는 이유가 뭔데!
나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열심히 놀렸다. 내가 네 발을 가지게 된 이후로 최대의 속력이었다. 남자는 다리를 질질 끌며 나를 향해 기어 왔다.
어찌나 그 모습이 공포스러운지, 꿈이라도 다시 보기 싫은 모습이었다.
그렇게 평범하지 않은 추격전이 계속되었다.
남자가 끓는 듯한 목소리로 외쳤다.
“세실리아, 세실리아 에리조……! 널 죽이겠다!”
세실리아?
나도 모르게 다리가 제자리에 박힌 듯 멈췄다.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지금 저 남자가 부르는 이름이 바로 내 이름이다.
나는 천천히 남자를 돌아보았다. 가려진 두건 사이, 남자의 눈이 번득였다.
그와 동시에 남자가 입에선 피를 토하며 마지막 칼을 휘둘렀다.
으앗……!
간신히 피한 덕에 칼은 내 다리 옆을 스쳐 바닥을 깊이 찍었다. 남자는 그걸 마지막으로 제풀에 쓰러졌다.
나는 그 앞에 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하아…….”
세실리아 에리조.
나는 내 이름을 한참 곱씹었다.
나는 누구지? 세실리아 에리조는 도대체 어떤…….
바람이 불었다. 긴 머리칼이 등을 스쳤다. 오랜만에 느끼는 감각에 놀라 고개를 내렸다.
짙은 어둠 속에 희고 긴 다리가 보였다. 나는 손으로 몸을 더듬었다. 그러니까, 이제 손도 있고 더듬을 다리도, 팔도 있었다. 머리를 쓸어 올리자 시야로 붉고 곧은 머리카락이 물감처럼 쏟아졌다. 길게 쭉 뻗은 다섯 손가락 위에서 머리카락이 하늘하늘 흘러내렸다.
머리를 만져도, 등을 만져도 가시는 없었다. 코도 나오지 않고, 꼬리도 없었다.
“나……. 나 사람 됐다!”
꽥 소리를 질렀다가, 급히 입을 막았다.
기껏 기회가 찾아왔는데, 동네 사람들 다 깨워서 잡혀갈 수는 없었다.
이드리쉬가 날 살려 준 이유는 모르겠지만, 사람의 모습으로 변한 이상 이제 들키면 정말 큰일이었다. 더는 아니라고 변명도 못 한 채, 정찰병으로 낙인찍힐 거다.
벌떡 일어났다. 바람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젠장. 빨가벗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