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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피처럼 붉은 머리를 가진 여인> (5/15)


5화 <피처럼 붉은 머리를 가진 여인>
2023.06.05.


눈빛에서 느껴지는 생명력은 아주 옅었는데도, 왜인지 그것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이드리쉬가 손을 느릿하게 뻗었다. 그의 손끝이 내 볼 위에 톡, 닿았다.

“너…….”

긁는 듯한 숨소리에 말소리가 섞여 나왔다.

“가지 마…….”

그 말을 끝으로 이드리쉬의 눈이 가물어졌다. 힘겹게 올라왔던 손이 툭 떨어졌다.

나는 손을 들어 내 볼을 더듬었다. 조금 차가운 듯한 그의 체온이 볼에 남은 듯 간질거렸다.

손에 피가 묻어났다. 이드리쉬의 상처 난 손에서 묻은 거였다. 심장이 쿵쿵 빠르게 뛰었다.

* * *

가슴이 불에 타는 듯했다.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그 와중에 몸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아픈 것도 나았으면 좋겠어. 무시무시한 백호.’

환청을 듣는 걸까. 제 눈앞에 어른거리는 하얀 옷을 입은 여자는 환영일까.

바람에 나부끼는 하얀 옷과 드러난 둥근 어깨선. 그 위로는 비단 같은 핏빛 머리카락이 아래로 흘렀다.

이드리쉬는 손을 뻗었다. 그녀가 제 곁을 떠나지 않았으면 했다. 환영인 줄 알았던 것이 손에 선명하게 잡혔다. 그녀가 이드리쉬를 향해 무너졌다. 붉은 머리칼이 꽃잎이 되어 흐드러지듯 쏟아졌다.

동시에 아찔한 단내가 전신을 감쌌다. 그녀의 눈동자엔 한 번도 본 적 없는 따뜻한 빛깔의 밤하늘이 수놓아졌다. 문득 그 속에 영원히 담기고 싶다는 아득한 소망이 떠올랐다.

그러면 몸도, 마음도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 같았다.

아무래도 환상을 보는 게 분명했다.

* * *

젠장……!

어젯밤, 나는 결론적으로 도망치는 데에 실패했다.

이드리쉬가 붙잡아 잠시 넋을 놓은 사이, 멀리서 너구리 사용인들이 달려왔다. 도망가기에는 너무 늦었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다시 고슴도치로 변했다. 그리고 절규하는 심정으로 바닥에 널브러진 새장으로 다시 들어갔다…….

내 발로 직접. 하, 치욕스러워.

나는 바보야. 앞으로 굴러온 복도 걷어차는 바보.

수인인 줄도 모르고 수염 훔치러 제 발로 호랑이 굴에 들어온 것도 모자라, 그 호랑이 살리겠다고 도망도 못 쳤다.

게다가 나중에야 생각난 건데, 굳이 사람의 모습으로 도망칠 필요도 없었다.

사람이 된 기쁨에 잊고 있었던 거야. 고슴도치로 변해서 도망갔다면 커튼을 뜯는다고 시간을 보내지 않아도 되었고, 쓰러진 이드리쉬를 발견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그러면 다시 붙잡히지도 않았을 텐데.

철장을 앞다리로 파바박 긁으며 나는 한참을 울분을 삼켰다.

그래, 좋아. 그거까진 기억에 있다고 쳐. 그다음은 뭔데?

며칠간 새장에서 고생한 데다, 이드리쉬를 옮기느라 힘을 다 써서인지, 나는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그리고 잠에서 천천히 깨어날 때만 해도 아주 기분이 좋았다.

으음. 푹신푹신한 이불, 햇빛 냄새. 기분 좋아.

나는 몸을 돌리다가 뒷발로 배를 탓탓탓 긁었다. 네발 동물이 된 게 이런 건 좋네. 발로 배를 긁을 수 있잖아?

그러다 번득 정신이 들었다.

내가 왜 이불 속에 있지? 가시가 끝까지 찌릿할 정도로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잘 잤어, 밤송이?”

이드리쉬가 팔을 괸 채로 나를 보고 있었다.

창으로 넘어온 햇살이 그의 하얀 맨 어깨에 부딪혀 반짝반짝 빛났다. 허리에 덮은 이불 위로 드러난 상체는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았다.

살쾡이 같은 눈이 반달처럼 휘었다. 어제와는 달리 아주 생명력 넘치는 얼굴이었다.

이건 악몽이야.

나는 허둥거리며 이드리쉬에게서 먼 방향으로 달렸다.

이드리쉬는 침대 위로 나른하게 엎드리며 그런 나를 관망했다.

“도망, 어차피 못 가. 방문 잠겨 있거든.”

여유로운 말에 나는 멈춰 서서 그를 돌아보았다.

도대체 나한테 바라는 게 뭐예요…….

“이리 와 봐. 말 잘 들으면 살려 줄게.”

이드리쉬는 아까부터 빙글빙글하며 입꼬리를 올리는 게, 기분이 좋아 보였다.

정말 살려 주려는 건가?

나는 자석처럼 그에게 끌려갔다. 그러곤 얌전하게 그의 앞에 앞다리를 쭉 펴고 엎드렸다. 절이라도 하는 듯한 자세였다.

살려 준다는데 뭐라도 해 봐야지.

왔어요. 살려 주세요.

이드리쉬가 다시 웃었다. 이번엔 낮은 울림까지 전해질 정도였다.

“이젠 말 못 알아듣는 척하는 것도 포기한 거야?”

끙……. 말 잘 들으면서 동시에 못 알아듣는 척을 어떻게 해요.

“어제는 왜 도망가지 않았지? 새장 문 열려 있었는데.”

다 죽어 가는 누구 도와주다가 못 갔수다.

예, 참 바보지요. 하지만 세상 사람들 다 날 비웃어도 넌 날 비웃으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바보라서 안 갔나? 아니면 내가 좋아서?”

둘 중에 택하라면 당연히 전자를 택하겠습니다. 당신이 잘생기긴 했어도 저는 미친 맹수 악역을 좋아할 만큼 안전의식이 흐릿한 고슴도치는 아니거든요.

“어제 그 침입자들 말이지.”

이드리쉬가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죽은 자들까지 감쪽같이 전부 사라졌어. 흔적을 남기고 싶지 않은 배후가 있다는 거겠지.”

그러고 보니 나도 보았다.

나를 향해 단도를 휘두르고, 내 이름을 각성시켜 준 그 남자도 돌아와 보니 사라졌었다.

혼자 도망갈 몸 상태는 절대 아니었다. 그러니 분명 누군가 그를 데리고 갔다는 거다. 즉, 이드리쉬의 말대로 저택을 습격한 자들에겐 더 큰 배후가 있다는 거겠지?

“그런데 결계는 어떻게 넘었을까. 이 저택의 위치는 한 번도 발각된 적 없는데.”

왜왜. 왜 그런 의미심장한 눈으로 날 보는 건데?

나 새장에 내내 갇혀 있었던 거 제일 잘 알면서. 내가 무슨 초능력 도치도 아니고, 통신보안 도치도 아닌데.

“밤송이, 널 빼고는 말이야.”

억울했다.

사실 내가 처음 이 저택을 발견했을 때도, 나는 결계 같은 건 본적도 느낀 적도 없었다.

“오늘 확인하니 결계의 붉은 돌이 흐트러져 있더군. 너는 그게 뭔지 알겠지.”

그러니까 결계의 붉은 돌이 뭔데? 나는 그 붉은 돌 같은 거 한 번도 본 적이…….

있다!

이 저택을 찾아올 때, 오는 길에 지쳐 붉은 돌에 잠시 앉아서 쉬다가 낮잠까지 한숨 때리고 왔었다. 평평한 게 눕기 딱 좋더라고.

그게 결계의 돌이었다고?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쇠, 쇤네는 모르는 일입니다. 정말입니다요.

“네가 인간화하면 다 알게 되겠지. 참을성이 그리 길지 않으니 오래 끌지는 말았으면 좋겠군.”

시선을 회피하자 이드리쉬가 나를 번쩍 들어 올리며 벌러덩 누웠다. 공중에 붕 뜬 나는 가시를 세워 얼굴을 숨겼다.

“숨지 마.”

왜 자꾸 명령하시죠? 누가 보면 내가 진짜 자기네 애완 도치인 줄 알겠다고요?

나는 눈을 빼꼼 내밀었다. 이드리쉬가 킥킥 웃었다.

얄미워.

나를 붙잡은 그의 손을 깨물고 싶어 버둥거렸다. 하지만 몸통에 이빨이 닿지 않았다. 빠르게 포기하곤 몸을 축 늘어뜨렸다.

그러고 보면 어제와 꼭 같은 위치였다.

내가 위에 있고, 이드리쉬를 내려다보는. 하지만 내 눈에만 그러했고, 이드리쉬가 나를 알아볼 리는 없었다.

나는 고슴도치고 어제는 사람이었으니까 변하는 모습만 안 들키면 돼. 잡아떼면 그만이야. 내가 수인이라는 걸 알면 나를 잔인하게 죽일 거라고. 어제 그 정찰병처럼 잔인하게!

하지만 의문점도 있었다.

나를 이렇게 강력하게 의심하는 거라면 왜 죽이지 않는 걸까. 이렇게 묻고 또 물을 시간에 그냥 죽이면 편하잖아. 심지어 살려 주기까지 했어.

궁리해도 저 이상한 백호의 마음을 읽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 와중에 내 눈에 다른 게 들어왔다.

이드리쉬의 넓고 두꺼운 가슴팍이 어제와는 달랐다.

검은 흔적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어제만 해도 옆구리까지 퍼졌었는데. 지금은 오른 가슴 위만 조금 거뭇할 뿐이었다.

이상하다. 잘못 본 건 분명히 아니었다고. 이드리쉬의 얼굴도 편안해 보이는 게, 어제의 고통은 느껴지지 않는 듯했다.

“어딜 보는 거지? 변태 밤송이.”

쉭쉭! 사람을, 아니 고슴도치를 뭐로 보고! 보는 게 싫으면 애초에 옷을 입고 있든가!

나는 분노를 담아 뒷발을 열심히 찼다.

팟팟팟.

내 모습에 겁이라도 먹었는지 이드리쉬가 나를 다시 침대에 내려놓았다.

“아 참. 내가 그 와중에 누군가를 본 것 같은데 말이지.”

나는 너무 놀란 나머지 반쯤 튀어 올랐다. 이드리쉬가 손가락 끝으로 내 머리를 가시를 뒤로 밀며 꾹꾹 눌렀다.

침입자의 얼굴이겠지? 설마 나는 아닐 거야.

“피처럼 붉은 머리를 가진 여자였다.”

신이시어. 불쌍한 고슴도치를 버리나이까. 하필이면 머리카락도 눈에 잘 띄는 붉은색일 게 뭐란 말입니까.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덕분에 이드리쉬의 추궁은 뚝 끊겼다.

“이드리쉬 님,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방으로 들일까요?”

“아니. 지금 내려가지. 그보다 내가 물어볼 것이 있는데.”

“예?”

“붉은 머리를 가진 수인이 누가 있지?”

이미 지나간 이야기 아니었어? 그냥 꿈이라고 생각하세요, 이 바보야!

“여우 수인이 그런 머리카락 색을 가지고 있죠? 붉다기보단 오렌지색에 가깝지만. 아, 원숭이 수인이나 고양이 수인 중에도 있을 거예요.”

“그래? 그렇다면 고슴도치는 어떻지?”

이드리쉬는 제로스에게 물으면서도 나를 보았다. 제로스도 덩달아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애써 시선을 외면했다.

“고슴도치 수인이라, 그들을 본 지가 워낙 오래되어서요. 보통은 검거나 희죠.”

거봐. 검거나 희대잖아.

잠깐만. 그럼 나는 뭐야? 알고 보니 고슴도치가 아니라 호저인 거야? 그건 좀 싫은데…….

하지만 제로스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래도 가끔은 붉은색이죠. 그럼 천천히 내려오십쇼!”

…….

문이 닫히고, 방 안이 조용해졌다.

이드리쉬가 몸을 일으켰다. 걸려 있는 옷을 집어 두꺼운 몸통에 단추를 채워 잠갔다.

나는 이불에 코를 콕 박은 채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래도 아직 확증은 없다고.

하지만 마음과 달리 가시는 벌벌 떨렸다.

그때, 옷을 전부 입은 이드리쉬가 조용히 웅얼거렸다.

“근데 꿈이었던 것 같기도 해. 워낙 어둡기도 했고.”

진짜?

기대감에 내 까만 코끝이 저절로 실룩였다.

“아니다, 꿈이라기엔 생생했어. 진짜 수인이 분명해.”

지금 너 장난 나랑 하니?

가지고 노니 나를?

어리둥절해하는 사이, 이드리쉬는 나를 집어 들어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이거 놔! 이 농락 범!

내가 나가려 하자 주머니의 입구를 손으로 꾹 막았다.

“맞다. 넌 앞으로 내 방에서 나와 같이 잘 거다.”

뭣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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