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벌레 먹기 vs 사실대로 말하기>
(6/15)
6화 <벌레 먹기 vs 사실대로 말하기>
(6/15)
6화 <벌레 먹기 vs 사실대로 말하기>
2023.06.06.
도착한 곳은 다이닝 룸이었다.
테이블 위에 올려진 나는 코를 열심히 위아래로 실룩였다.
식사인가? 그러고 보면 한참을 굶었다.
“밤송이. 너를 위한 특식을 준비했다.”
이드리쉬의 말과 함께 주방장이 뚜껑 덮인 접시를 내왔다.
뭐길래 뚜껑까지 덮은 거지?
냄새를 맡으려 킁킁거려 봐도 안에선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다.
“맛있는 식사 되십시오.”
주방장이 뚜껑을 열었다.
하얗고 길쭉한 것들이 바글바글, 꿈틀꿈틀거렸다.
“특제 생딱정벌레 애벌레입니다!”
꿈틀거리는 것들이 일제히 나를 보았다.
아악! 이게 뭐야! 싫어!
“끼이익!”
나는 괴성을 지르며 펄쩍펄쩍 뛰었다. 급기야 뒷발이 엉켜 퉁퉁한 엉덩이로 쿵 넘어졌다.
버둥버둥, 짧은 네 발이 허공을 휘저었다.
그때, 접시를 탈출한 딱정벌레 애벌레가 나를 향해 기어 왔다.
나는 이마부터 꼬리 위까지 가시를 맹렬하게 세우곤 식탁 위를 허겁지겁 달렸다. 발이 몇 번이나 미끄러졌다.
순식간에 이드리쉬의 앞자리까지 대피했다. 그러고도 끔찍한 벌레들이 뒤꽁무니를 쫓아오는 거 같은 기분에, 나는 이드리쉬의 소매로 파고들었다.
“이봐. 따가운데.”
이드리쉬가 내 뒷발을 잡아당겼다.
이거 놔요!
나는 뒷발을 퍽퍽 걷어차 그의 손을 치우고 더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완벽히 소매 속에 숨고서야 한숨을 돌렸다.
허억, 허억. 벌레 싫어……!
“고슴도치가 애벌레를 무서워하다니. 어쩔 수 없군. 저건 이제 치우지.”
정말? 나는 조용히 이드리쉬의 말에 집중했다.
달그락달그락 접시 치우는 소리가 들렸다.
한참 지나, 나는 소매에서 코를 빼꼼 내밀었다. 나가기 전 밖을 살폈지만 애벌레는 없었다.
휴.
“고슴도치 수인은 아니지만 애벌레는 못 먹는다?”
이드리쉬가 나를 내려다보며 비웃었다.
우씨.
나는 이마의 가시를 세워 인상을 팍 썼다.
“생딱정벌레 애벌레가 그렇게 싫으면 어서 정체를 밝혀야 할걸? 안 그러면 내일 이 시간엔 정말 살아 있는 애벌레를 먹어야 할 거야.”
그 말과 함께 이드리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 * *
겨우 방에 돌아와 한숨을 돌리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조심스럽게 노크한 후 문을 열었다.
들어온 사람은 자그마한 아이였다.
“야, 괴물!”
응? 나한테 하는 말인가?
나는 초면에 건방진 말을 뱉는 꼬마를 찬찬히 살폈다.
7살쯤 되어 보이는 작은 체구와 은발 곱슬머리, 그리고 푸른 눈동자.
아, 푸른 눈동자의 백호라면 누구인지 분명히 알았다.
로드리오 아티그라도. 이드리쉬의 동생이자 거대한 운명을 짊어지고 태어난 아이.
뱀 일족인 세르비얀은 예언의 능력을 가졌다. 그리고 푸른 눈의 백호가 나타나면 멸족하고 만다는 예언을 받는다.
이 예언 때문에 아이는 결국 죽음을 맞이한다.
그것을 기점으로 소설의 이야기는 하이라이트를 향해 치달으니 서사적으로는 꼭 필요한 죽음이라고 할 수 있다.
죽을 운명의 아이를 마주하고 있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물론…… 내가 끼어들 일은 아니다. 악역을 도울 생각도 딱히 없고. 지금 나한테 중요한 건 내 안전하고 안락한 삶뿐이니까…….
“와, 너 진짜 이상하게 생겼다.”
놀리는 말에 나는 인상을 쓰며 가시를 위로 세웠다.
불쌍한 건 불쌍한 거고, 예의가 참 없구나?
“근데 너 왜 이 방에 있어?”
나도 있고 싶어서 있는 건 아니란다.
“이드리쉬는 나도 방에 못 들어오게 한단 말이야. 근데 왜 너같이 못생긴 괴물을 방에 들이는 거지?”
들을수록 어이없네?
나는 가시를 확 세웠다. 어린아이의 질투 어린 막말을 들을 생각은 없다.
하지만 의외로 로드리오의 눈이 휘둥그레해졌다.
“우, 우와…… 한 번만 더 해 봐.”
뭘? 가시 세우는 거?
찝찝한 기분으로 나는 가시를 얌전히 눕혔다가, 다시 세웠다.
“우와!”
자그마치 49번을 가시를 눕히고 세웠다.
로드리오는 처음엔 괴물 같다더니, 내가 변신 로봇이라고 생각한 건지 나중엔 뿅 반해 버렸다.
이드리쉬가 나를 왜 방에 두는지 알겠다나 뭐라나.
아가야. 설마 이드리쉬가 나 가시 세우는 거 구경하려고 두겠니? 물론 나도 진짜 이유는 모르기는 하지만…….
그래도 덕분에 나도 이렇게 방 밖을 나왔다. 아이는 아이라고, 조금 놀아 주니 금방 기분이 좋아서 저택 구경을 시켜 주겠다며 나를 데리고 나온 것이다.
“저기는 서재인데 할아버지가 주로 계시는 곳이야. 근데 가지 마. 가주님 무섭거든.”
알던 내용도 있었지만, 처음 알게 된 사실도, 도망에 도움이 되는 정보도 있었다.
“여기는…….”
로드리오가 복도에 난 검은 문 앞에서 말을 멈췄다.
“여긴 나도 뭐가 있는지 몰라. 나한테 말도 안 해 주고 절대 들어가지도 말랬어.”
오호라.
이거 꼭 알아야 할 거 같은 냄새가 솔솔 났다.
나는 로드리오의 손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그러곤 문을 앞발로 파바박 긁었다.
“거기 들어가자고? 안 돼! 나 혼난다니까.”
됐고 열어 봐. 잠깐 보기만 할게.
“안 되는데…….”
로드리오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누구의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럼 진짜 잠깐만이야.”
나는 빠르게 코를 끄덕였다. 로드리오가 다시 나를 집어 들고, 문고리를 잡았다.
끼이익.
음산한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문 너머엔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펼쳐졌다.
지하로 뻗은 계단은 저주받은 드래곤의 아가리처럼 컴컴하고, 음산했다.
“여, 여기는 좀 아닌 거 같아. 돌아가자, 가시야. 우리가 가기엔 너무 어둡고, 이드리쉬가 알면 나 진짜 혼나.”
가만히 좀 있어 봐.
나는 용기 있게 먼저 계단을 내려갔다. 사실 내려갔다기보단, 아래 계단으로 툭 떨어졌다는 것에 가깝긴 하다.
나는 돌아서 로드리오를 바라보았다. 재촉의 눈빛에 로드리오가 망설이며 주먹을 쥐었다 펴길 반복했다. 그러더니 큰 결심을 한 듯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그래, 나도 할 수 있어.”
아래로 뻗는 로드리오의 발이 파들파들 떨렸다.
우리는 금방 계단의 끝에 도착했다.
“이제 올라가야 할 거 같아. 빨리 손 위로 올라와!”
로드리오가 나를 재촉했다. 하지만 나는 주변을 둘러보기 바빴다.
지하실 전체에 선반이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유리병이 빼곡히 담겨 있었다. 대부분이 검은 가루들로 채워진 채 단단히 밀봉되어 있었다.
온몸의 가시가 위로 쭈뼛 섰다.
“가시야, 우리 어서 나가자.”
병들의 정체를 모르는 로드리오는 양손으로 나를 고이 잡고는 허둥거리며 계단을 올라갔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잘 알았다.
그건 이드리쉬가 세상을 불태우기 위해 준비한 폭약이었다.
멍했다.
쾅! 콰광!
굉음을 내며 바닥이 터지고, 건물이 무너진다. 수인들은 전부 살기 위해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하지만 안전한 곳은 없었다. 폭발은 연쇄적으로 일어났다.
주인공인 토끼 수인 자이카가 도망치던 장면이 선명했다. 필사적으로 도망치던 수인들의 모습이 너무 끔찍해서 그날 밤엔 나까지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였으니까.
하루아침에 평화롭던 도시는 폐허가 되었다. 수인들은 불에 타거나, 건물에 깔렸다.
그 폭발을 만든 게 저 유리병들이었다.
입 안이 바싹 말랐다. 공포가 엄습해 네 다리가 뻣뻣하게 굳었다.
막연히 저 사람이 소설 속 악역이었다고 아는 것과 실제로 눈으로 보는 것은 큰 차이가 있었다.
이드리쉬의 쓰러져 당장 죽을 듯 끙끙거리던 지난밤의 모습이나, 나른하게 누워 킬킬 웃던 모습에 어느새 감각이 무뎌졌던 모양이다.
혹은, 막연히 멀리 있는 일이라고 느꼈다.
하지만 지금 이곳, 거의 다 채워진 화약 병을 보면 이드리쉬가 세상을 터트릴 날이 머지않은 듯했다.
“가시야, 왜 그래? 우리 들키지 않고 잘 빠져나왔어. 그러니까 너무 걱정 안 해도 돼.”
로드리오가 걱정스럽게 말하더니, 잠시 망설이다가 내 등의 가시를 뒤로 살살 쓸어내렸다. 내내 바짝 서 있던 가시가 상냥한 손길에 뒤로 차분히 내려갔다.
하지만 그렇다고 기분이 나아지는 건 아니었다. 로드리오도 마찬가지로 백호의 일족이었다.
“계속 무서우면 내가 지켜 줄게.”
로드리오가 천진난만하게 말했다.
그 순간이었다.
“누굴 지킨다는 거지?”
차가운 목소리에 다시 가시가 바짝 섰다. 로드리오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나는 얼굴을 가시 속으로 폭 숨겼다. 그 저벅저벅 걸어오는 커다란 발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 이드리쉬.”
“내가 지하실엔 가지 말라고 분명 말했을 텐데.”
“그게…….”
“심지어 그 밤송이까지 데리고?”
“가시 마왕한테 저택 구경시켜 주고 싶어서 돌아다니다가 나도 모르게…….”
나에게 말할 때와 달리 로드리오는 한껏 주눅이 들어 목소리가 들릴 듯 말 듯 했다.
이드리쉬가 저벅저벅 다가왔다. 나는 더욱 몸을 말아 감췄고, 로드리오는 그대로 굳어 꼼짝도 하지 못했다.
이드리쉬가 망설임 없이 나를 집어 들었다.
“로드리오. 내가 한 말을 어긴 자들은 전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는 건가?”
로드리오는 큰 눈을 끔뻑일 뿐 말이 없었다. 겁을 잔뜩 집어먹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거 같았다.
“전부 목숨을 끊어 놓았지. 너라고 예외일 줄 알았나?”
동생한테 하는 말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차갑고 냉랭했다.
로드리오는 아무 대답하지 않았지만, 분명 벌벌 떨고 있을 거였다.
“지금 당장 방으로 돌아가. 처벌을 기다리고 있어라. 이번만은 그냥 넘어가지 않아.”
“응…….”
로드리오가 울먹이며 겨우 대답하는 목소리와 점점 멀어지는 발소리가 들렸다.
로드리오가 떠나고 나자, 이제 복도엔 이드리쉬와 나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