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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자유의 몸이 되었다> (8/15)


8화 <자유의 몸이 되었다>
2023.06.08.


방 밖을 나오자, 항상 조용하기만 했던 저택이 소란스러웠다. 나는 경계심을 한껏 올리며 몸을 숨겼다.

“이드리쉬 님!”

안 돼. 비구스 목소리다!

쩌렁쩌렁 소리치며 호들갑을 떠는 걸 보니, 내가 없어진 걸 벌써 안 모양이었다.

아마 음식을 넣어 놓고 내가 없다는 걸 곧장 알아챈 모양이었다. 눈치 없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빠르잖아? 아쉬워. 이번만 몰랐으면 저녁 식사 시간까지는 시간을 벌었을 텐데.

하지만 그런 걸 바라 봤자 이미 늦은 일이었다.

나는 전속력으로 뛰었다. 긴장감으로 손발이 짜릿했다. 모든 혈관에서 혈액 순환이 콸콸 일어나는 게 분명했다.

“하, 하아, 오랜만에 두 발로 뛰니까 힘들어 죽겠네!”

그나마 이 저택 내 사용인의 수가 적은 게 다행이었다.

몇 사람을 지나쳐야 했지만, 워낙 넓은 저택인 덕에 그리 어렵지 않았다.

나는 계획대로 저택을 벗어나 무사히 숲으로 숨어들었다. 벌써 숨이 헐떡거렸다. 나는 잠시 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숨을 골랐다.

“아냐, 아직 멈출 수는 없어. 이드리쉬라면 금방 쫓아올 거야. 너구리 영지에 도착할 때까진 폐를 토하는 한이 있어도 달린다!”

나는 다시 몸을 일으켰다.

* * *

한참을 뛰고 걷기를 반복했다. 느려질지언정 한시도 쉬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무사히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도착한 곳은 너구리 수인들이 모여 사는 네룬 영지였다. 말이 영지지, 사실 마을에 더 가까웠다.

나는 한껏 경계하며 마을을 둘러보았다.

한쪽으론 졸졸 계곡이 흘렀고, 그것을 따라 집들이 주르륵 늘어섰다. 체구가 작은 너구리 수인들이어서인지, 집도 대체로 아담하고 야트막한 단층집이었다.

마을은 활기찼다. 여자들은 집 앞에 빨래를 널며 쉬지 않고 서로 수다를 떨었고, 아이들은 까르르 웃으며 계곡에서 첨벙댔다. 고즈넉한 시골의 풍경이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이방인이 더 눈에 잘 띄는 법. 나는 한껏 경계하며 기차역으로 향했다.

역엔 큰 짐을 든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이드리쉬가 나를 찾는다면 가장 먼저 이 기차역을 찾아올 거였으니 사람이 많을수록 나에겐 다행이었다.

곧장 매표소로 갔다.

“가장 빨리 출발하는 기차표를 사고 싶은데요.”

“하루에 한 대밖에 가지 않아요. 내일은 오후 4시요.”

이런.

하지만 다른 선택지는 없었기에, 나는 별수 없이 내일 표를 샀다.

하루를 잘 버티는 수밖에.

아무 문제 없이 계획대로 잘 진행되자 조금은 긴장이 풀렸다. 나는 뻣뻣하던 어깨를 돌려 풀었다. 그러자 지금껏 못 느끼던 허기가 몰려왔다.

그러고 보니 오늘 아무것도 먹지 못했고, 심지어 어디선가 맛있는 음식 냄새도 났다.

나는 홀린 듯 냄새가 있는 곳으로 갔다.

기차역에 딸린 매점이었다. 간단한 음식을 사서, 야외 나무 테이블에 앉아 먹을 수 있었다. 앉아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기차를 타기 전, 끼니를 때우는 듯했다.

나도 간단하게 요기만 하고 갈까?

내일까지 쫄쫄 굶을 자신도 없고, 그렇다고 식당에 들어가 떡하니 앉아 제대로 식사할 수도 없잖아.

반쯤은 냄새에 홀린 결정이었다.

나는 매점에서 닭고기 롤을 사서 구석에 앉았다. 그러곤 빨리 먹고 이곳을 떠날 생각으로 허겁지겁 입에 음식을 쑤셔 넣었다.

“커흡.”

목 막혀! 가슴을 쿵쿵 두드리다가 음료가 담긴 컵으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음료 대신 사람의 손이 잡혔다.

고개를 들어 남자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온몸의 피가 식었다.

“테이블에 같이 앉아도 되겠습니까?”

후드를 뒤집어쓴 이드리쉬가 눈을 형형하게 빛내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몸이 그대로 뻣뻣하게 굳었다. 씹어 넘기던 닭고기 롤이 돌멩이 롤이라도 된 듯 목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젠장. 어떻게 이렇게 빨리 찾았지? 아니, 그보다 어떻게 나를 한눈에 알아본 거야?

물론 지난번, 내가 이드리쉬를 구한 날 밤. 그가 어렴풋이 나를 보았다고 했다.

하지만 꿈인지 아닌지 긴가민가하다고 했잖아.

심지어 그때랑 지금은 내 모습이 전혀 달랐다.

그때는 나체에 머리도 치렁치렁 푼 태초의 모습이었고 지금은 패션 센스 없는 왜소한 너구리 수인 같은데…….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자칫하면 이드리쉬에게까지 들릴 정도였다.

아니, 어쩌면 확신이 없어서 이렇게 말을 거는 걸 수도 있어. 내가 고슴도치라고 확신했으면 당장 가죽을 벗기려 들었을걸.

그렇다면 나는 최대한 태연하게 굴어야 했다.

“대답이 없으시니, 허락으로 알겠습니다.”

이드리쉬가 내 앞에 앉았다. 여유롭게 다리를 꼬는 그의 모습이 느리게 보였다.

태연하고 자연스럽게 일어나자. 아무 거리낌 없는 것처럼…….

“예, 예. 편히 앉으셔요. 저는 다 먹어서 먼저 가 보겠습…….”

“한참 남았는데.”

이드리쉬가 내가 든 닭고기 롤에 턱짓했다. 아직 반도 안 먹었다.

“갑자기 속이 안 좋아서요. 하하, 화장실이 어디 있을까?”

나는 간신히 입꼬리를 올렸다. 그게 미소처럼 보일지는 나도 장담할 수 없었지만.

이드리쉬의 얼굴엔 어떤 표정 변화도 없었다. 대신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이곳 분이 아니신가 봅니다.”

젠장. 등줄기에 땀이 흘렀다.

“아, 아뇨? 여기 사람 맞는데요.”

“그런데 기차역 화장실 위치도 모르십니까?”

꼬, 꼭 알아야 하는 건가? 하긴 마을이 워낙 작으니 모르는 게 이상하기도 하다.

“건망증이 심하네요. 그럼 저는 영 배가 아파서 실수하기 전에 먼저 가 보겠습니다. 즐거운 식사 하세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너무 서둘렀는지, 다리에 걸린 테이블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나는 놀라 그대로 멈춰 선 채, 이드리쉬의 표정을 살폈다.

이드리쉬의 맹수 같은 눈동자는 나에게 고정된 듯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올가미에 걸린 듯 숨이 막혔다.

그 순간, 이드리쉬의 입꼬리가 섬뜩하게 위로 올라갔다.

그걸 보는 순간 나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드리쉬는 확신하고 있다. 내가 그 고슴도치라는 거.

젠장. 튀어!

나는 한껏 줄어들었던 용수철이 튀어 나가듯, 재빨리 자리를 박찼다.

이드리쉬도 마찬가지로 나를 따라 벌떡 일어났다. 나는 주변의 테이블을 전부 쓰러뜨리며 전속력으로 뛰었다. 어디로 도망가는지 생각도 못 한 채, 두꺼운 나무 문을 젖히고, 달렸다. 내가 활짝 열어젖힌 문이 닫히기도 전에, 이드리쉬가 튀어나왔다.

“아악! 왜 저렇게 빨라!”

당연하다. 고슴도치보다 백호가 느리면 그건 백호가 아니라 백지렁이겠지.

“비켜요, 비켜!”

나는 요리조리 사람들 사이를 피해 쏜살같이 지나갔다. 뒤를 돌아보니 이드리쉬가 멀지 않은 곳에서 나를 쫓고 있었다. 따라오지 말라고 주변의 물건을 넘어뜨리고 집어 던졌는데도, 그저 장애물 넘듯 훌쩍훌쩍 뛰어넘었다.

실시간으로 빠르게 가까워지는 이드리쉬의 화난 얼굴은 공포 그 자체였다.

와, 이게 바로 맹수에게 쫓기는 먹이의 마음이구나! 빌어먹을!

그때, 기차가 크게 경적을 울렸다.

그러고 보니 눈앞에 기차와 철로가 보였다. 이제 막 출발한 기차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짙은 하얀 연기를 뿜었다.

“밤송이!”

어느새 이드리쉬의 고함이 바로 뒤에서 들리는 듯했다.

안 되겠어!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나는 철로로 달렸다.

“꺅! 저 사람 미쳤나 봐!”

“누가 잡아요!”

철로로 성큼 뛰어들자, 나를 보고 내지르는 비명들.

빠아앙!

나를 발견한 기차가 귀가 터질 것 같이 큰 경적을 울렸다. 찰나의 순간인데도 실시간으로 기차의 앞머리가 커다래졌다. 기차가 나를 향해 빠르게 달려왔다. 조금만 지체하면 몸이 산산조각이 날 거였다.

반동에 모자가 벗겨져 철로 위에 떨어졌다. 주울 시간도 돌아볼 시간도 없었다. 흩어진 머리카락이 시야를 어지럽게 가렸다.

나는 허벅지가 터져라 다시 한번 땅을 박차고 올랐다.

제발, 제발!

그 한 단어만을 되뇌었다. 붕 떠오른 몸이 앞으로 밀려났다. 겨우 발끝이 철로의 반대편에 닿았다.

살았다.

나는 방금 지나온 철로를 돌아보았다. 건너편에 멈춰 선 이드리쉬가 보였다. 노란 눈 한 쌍이 잡아먹을 듯 나를 보았다. 바람에 내 긴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날아올랐다.

다음 순간, 기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우리 사이를 가로질러 갔다.

취이이익!

길게 이어지는 기차 앞에서 나는 숨을 돌렸다.

“하아, 하아, 하.”

심장이 말 그대로 터지기 직전이었다. 입술은 메말랐고 귀에선 벌떡벌떡 뛰는 맥박 소리가 기차 소리보다도 더 컸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기차가 지나가기 전에 여길 벗어나야 했다. 나는 쉬지도 못하고 다시 뒤돌아 달렸다.

* * *

쉬지 않고 걸었다. 만신창이였다. 특히 모자를 잃어버린 탓에 머리가 신경 쓰였다.

“붉은색은 너무 눈에 띄잖아.”

이러다 이드리쉬가 ‘빨간 머리한 여자 보셨나요?’ 하면 모두가 내가 지나간 곳을 가리킬 거 같았다.

그렇다고 고슴도치로 변해서 숨어 있을 수 있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지금의 내 옷은 내 털이나 가시를 넣어 만든 옷이 아니기에, 자칫하다간 다시 사람이 되었을 때 벌거벗은 여자가 될 수 있었다.

“모자를 사야 하나? 이제 돈도 얼마 없는데.”

금장 단추라면 몇 개 있었지만, 이 마을에서 태연하게 그걸 돈으로 바꿀 여유는 없었다.

“그래, 그래도 이드리쉬한테 잡힐 수는 없으니까 모자가 먼저야.”

나는 울고 싶은 심정으로 모자가게로 들어가 가장 저렴한 모자를 샀다. 사실 3 브론즈 모자랐지만, 간절하게 부탁하니 깎아 주었다.

가게를 나올 때, 머리카락은 가려졌지만, 주머니는 홀쭉해졌다.

꼬르륵.

배에서도 난리였다. 조금 전 식당에서 산 닭고기 롤은 겨우 몇 입밖에 먹지 못했다. 오히려 전속력으로 달려 도망쳤으니, 먹기 전보다도 더 허기가 졌다.

아까 꼬치가 1 브론즈였지? 그거 하나만 먹어도 살 거 같은데.

어디 누가 돈 안 흘리고 가나.

나는 바닥을 주의 깊게 살폈다. 그때, 저쪽에서 은색 무언가가 반짝였다.

도, 돈이다!

나는 달렸다. 성큼성큼 달려갈수록 확신이 들었다.

저건 은화야! 꼬치 열 개!

꼬치가 코앞에 있는 듯 벌써 침이 나왔다.

하지만 은화에 손이 닿는 순간, 나는 누군가와 정통으로 부딪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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