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내가 왜 거기서 나와?> (9/15)


9화 <내가 왜 거기서 나와?>
2023.06.09.


“아악!”

나는 뒤로 튕겨 나가면서도 은화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코피……는 아니네.”

나는 콧물을 닦으며 갑자기 내 앞을 가로막은 사람을 보았다. 투실투실 살이 찐 남자가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윽, 냄새.

허름한 차림 하며 누런 이. 종류 불문 이것저것 껴입은 차림을 보니 노숙인인 듯했다.

“내가 먼저 주웠어요! 내 손이 더 아래에 있잖아요!”

“어딜! 내 구역에 있으면 내 거다.”

남자가 눈을 부라렸다.

어쭈?

나도 지지 않고 함께 눈을 크게 떴다.

내가 질 거 같아? 이 돈 없으면 나도 굶어야 한다고!

파지직. 파지직.

불꽃이 튈 만큼의 신경전이었다.

“이익……!”

남자는 내 눈초리에 눌린 건지, 머뭇거렸다. 그러다가 내 어깨를 거세게 밀쳤다.

“악!”

나는 뒤로 나동그라졌다.

그런 날 보며 남자가 여유롭게 동전을 주워 들어 제 주머니에 쏙 집어넣었다.

“내 구역, 넘보지 마라. 신참.”

“시, 신참? 나 거지 아니거든요?”

“딱 거지꼴인데 뭐.”

“무슨, 말도 안 되는.”

그렇게 말하며 나는 내 옷을 내려다보았다.

사이즈에 맞지 않는 옷, 이드리쉬와의 추격전 끝에 묻은 흙먼지들…….

그럴 만도 한가.

“거지처럼 입으면 다 거지인 줄 알아요?”

“다를 게 뭐야? 너 집 있어?”

“집? ……없어요.”

“돈 있어?”

“조금은 있는데.”

“나도 조금은 있어.”

나는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 보니 정말 거지 맞잖아?

“그, 그래도 내가 먼저 주웠잖아요!”

“이 쥐방울만 한 게!”

남자가 손을 치켜올렸다. 으윽, 덩치도 훨씬 크면서 연약한 여자한테 주먹을 휘두르다니!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기다려도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눈떠 보니, 웬 낯선 사람이 남자의 손목을 가볍게 잡아 제지하고 있었다.

“당신은 뭐야?”

거지는 그렇게 물으면서도 낯선 이의 차림을 빠르게 훑었다.

“레이디가 곤란해하는 거 같기에 제 일이 아님에도 이렇게 나섰습니다.”

“레이디? 이게 무슨 레이디라고. 딱 봐도 거지인데. 우리끼리 밥그릇 싸움하는데 귀족 도련님은 끼어들지 말고 가쇼.”

그의 말대로 키도 크고 호리호리한 체격의 남자는 돈깨나 있는 집 자제처럼 보였다.

남자는 나를 향해 돌아섰다.

“레이디, 도움이 필요하신가요?”

거지의 말 따윈 중요하지 않다는 듯.

나는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도와줘요!

“저 쥐콩이!”

거지의 고함에 나는 남자의 뒤로 숨었다.

거지는 한참 씩씩거렸지만, 차마 귀족 남자까지 해코지할 수는 없었는지 그대로 자리를 떴다.

“괜찮으신가요?”

“네, 덕분에 살았어요. 정말 꼼짝없이 맞는 줄 알았거든요.”

“다행입니다. 사실 요 앞에서 이걸 떨어뜨리셔서 찾아 드리려고 따라왔거든요.”

남자가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 위엔 사기꾼이 남기고 갔던 조악한 가짜 루비 목걸이가 있었다.

“감사합니다. 이것도, 조금 전 일도요.”

그렇게 말하자, 남자는 활짝 웃었다. 그제야 제대로 그의 얼굴이 보였다. 입이 떡 벌어지게 잘생긴 얼굴이었다. 동화 속에서 튀어나온 왕자님 같달까.

“천만에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노래하는 듯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잠깐만. 금발의 미남자?

반짝반짝 빛이 나는 듯한 이목구비와 가지런한 치아를 내보이며 웃는 선량한 미소, 에메랄드를 녹여 놓은 듯한 녹색 눈동자.

거지라고까지 오해받은 추레한 몰골이었는데도 레이디라고 존칭해 주는 상냥함.

강렬한 예감이 들었다. 그의 이름을 듣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거 같았다.

이 소설의 남자 주인공이자, 세상을 평정할 뱀 수인 오자르 세도라?

그래, 이런 잘생긴 외모는 주연급일 수밖에 없어.

응당 소설 속 최고 미남자는 악역이거나, 남주이다.

악역은 이드리쉬니까, 당연히 이 남자가 남자 주인공이라는 뜻이겠지.

“해 드려도 될까요?”

대답도 듣기 전에, 그는 성큼 나에게 다가왔다.

어우, 향기까지 나네. 원래 남자 주인공은 이렇게 향긋하니?

“실례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곤, 그는 내 뒤로 돌아와 순수 목걸이를 채워 주었다.

으윽, 차가워.

그의 손이 목에 닿을 때는 나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그의 손이 상당히 차가웠다.

뱀 수인이라서 그런가?

“다 되었습니다.”

그가 활짝 웃었다. 조금 전 차가운 손에 움츠러들었던 목이 다시 쭉 펴졌다.

잘생긴 얼굴이 있는데, 찬 손이 대수야? 이게 바로 온미남이구나.

그간 고생한 것들이 사르르 녹는 거 같다.

멍하니 그를 바라보는 내가 이상했는지, 그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또 도와 드릴 게 있나요?”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대답에 그가 빙그레 웃었다. 아름다운 미소였다.

“그런데, 바지에 더러운 것이 잔뜩 묻었어요.”

오자르는 그렇게 말하며 내 바지를 가리켰다. 미쳐 털리지 않은 흙이었다.

“괜찮아요. 금방 털리는 거고요.”

“그러지 말고 이거 받으세요, 아름다운 레이디. 돌려주지 않아도 됩니다.”

오자르가 손수건을 꺼내 나에게 건넸다. 손수건의 가장자리엔 내 생각을 확인시켜 주듯, 보라색 뱀의 자수가 새겨져 있었다.

“감사합니다. 곤경에서 구해 주신 것도, 목걸이도, 손수건도.”

“별말씀을요. 해가 저물어 위험한데, 댁까지 에스코트해 드릴까요?”

“아뇨! 어, 그리고 아버지가 엄격하셔서 남자랑 같이 온 걸 보면 당장 정혼식부터 하실걸요.”

“그래요, 그럼. 어쩔 수 없네요.”

소설에 상냥하고 귀족적인, 원리원칙을 중요시하는 뱀 가문의 도련님이라고 나오는데, 그 문장을 그대로 옮겨 놓은 느낌이었다.

내가 꾸벅 인사하자, 오자르는 고고하게 걸어 나를 지나쳤다. 그러다가 갑자기 멈춰서 나를 돌아보았다.

“레이디, 이름을 여쭈어도 될까요?”

“이름은 왜…….”

“글쎄요, 왜인지 다시 만나게 될 거 같군요.”

“어……. 실라예요. 실라 롤타.”

말하지 않는 게 좋은 것 같다는 예감에, 비구스와 제로스의 성을 급히 떠올렸다.

“실라 롤타.”

오자르가 외우려는 듯, 입 안에서 이름을 굴려 보았다. 그러더니 다시 미소 지었다.

“다시 만날 수 있으면 좋겠어요, 레이디 롤타.”

그러곤 그는 골목길로 사라졌다.

나는 오자르가 걸어간 방향을 잠시 응시했다.

“정말 잘생겼었어.”

소설에 들어온 게 이럴 때는 정말 좋네. 저런 비현실적인 외모를 둘이나 보고.

그러다가 문득 의문점이 생겼다.

근데 오자르가 왜 여기에 와 있는 거지?

여기 네룬 영지는 센트럴에서도, 뱀 수인의 영지에서도 기차를 타고 3박 4일 이상 이동해야 할 만큼 멀었다. 아무 이유 없이 올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로드리오가 곧 죽는구나.

폭력적으로 다가오는 현실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지금 오자르는 로드리오를 죽이러 온 거야.

‘파란 눈과 하얀 털을 가진 호랑이가 태어나면 뱀은 멸망하고 세상은 백호의 것이 된다.’

페르콥은 처음 그 예언을 들었을 때, 코웃음을 쳤었다. 살아남은 백호 수인은 다 늙은 테스밀리온과 정상이 아닌 이드리쉬뿐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파란 눈과 하얀 털을 가진 어린 백호가 하나 더 있다는 걸 안 순간, 더 이상 예언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결국 세르비얀의 수장인 페르콥은 오자르에게 로드리오를 처리하라 명한다. 어린 수인을 처치하는 것은 오자르로선 내키지 않는 일이었지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오자르, 아티그라도가 수많은 수인들을 어떻게 죽였는지 전부 기억하고 있겠지.’

‘예, 가주님.’

‘그들이 다시 권력을 얻게 된다면 엄청난 피를 볼 것이다. 우리 세르비얀 가도 거기서 벗어날 수 없을 거고.’

‘……파란 눈의 백호를 처치하겠습니다.’

소설의 한 구절이 생생하게 떠오름과 동시에, 로드리오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사실 이곳이 소설 속이라는 걸 깨달은 순간부터 언젠가 로드리오가 죽을 거라는 건 알았다.

‘똬리 속의 토끼’ 이야기 속에서 서사적으로 꼭 필요한 일이기도 했다. 로드리오가 죽고 분노한 이드리쉬로부터 세상을 지키며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니까.

로드리오는 안됐지만, 괜히 내가 끼어들었다가 정말 이야기가 이상한 방향으로 틀어지면 안 되잖아.

더군다나 백호 가문은 어디까지나 악역이었다. 자칫하다가 악역이 세상을 지배하게 될 수도 있었다. 나비 날갯짓이 반대편에선 태풍을 일으킬 수도 있는 법이니까.

따라서 나는 수도 없이 소설의 내용에 개입하지 않겠다 다짐했었다.

그렇지만 막상 지금 바로 죽는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저릿했다.

버릇은 없지만 마음 한쪽 편에는 순한 구석이 있는 꼬맹이.

죽기엔 너무 어리지…….

나는 머리통을 감싸 잡았다.

“그렇지만 내가 구할 수는 없잖아……. 그렇다고 죽게 두자니……. 하지만 살릴 수는……! 그렇지만 로드리오가 불쌍해…….”

누가 보면 정신 나간 사람인 줄 알 정도로 나는 고민을 거듭하다가, 결국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일단 오자르를 미행해 볼까? 꼭 살리려고 하는 건 아니고, 뭐, 알아 두면 도움이 될 거 같으니까. 어차피 내일 기차 시간 전까지 할 일도 없고.”

꼭 이야기에 개입하려는 것은 아니라며, 스스로에게 변명하듯 다짐하고는 나는 오자르가 사라진 방향으로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순식간에 어디로 사라진 거야?”

아무르 걸어도 오자르가 보이지 않아 두리번거리던 때였다.

어디선가 잔뜩 낮춘 말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근처에 있나 봐!

나는 얼른 쓰레기더미 옆에 몸을 숨겼다.

“확실한가?”

오자르의 목소리였지만, 아까의 나긋함은 없었다. 오히려 냉철했다.

그럼 앞의 남자는?

“푸른 눈의 백호는 확실히 확인했습니다만, 그 여자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얼마 전 이드리쉬의 저택을 침입했던 사람 중 하나구나. 역시 그거 세르비얀 가에서 보낸 거였나 봐. 근데 여자는 누굴 말하는 거지?

“그녀를 보았다는 놈이 말을 마친 후, 정신을 잃어 지금까지 깨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확인해 볼 필요가 있겠군.”

그녀가 누구이기에 확인까지?

소설 내용과 비교해 가며 생각해도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으윽, 궁금해. 다시 한 번만 말해 주겠습니까? 같이 좀 압시다.

“그럼 푸른 눈 백호를 처리하며 그것도 함께 처리할까요?”

“그래야지. 푸른 눈의 백호보다 더 위협이 되는 인물이다. 어떻게든 제거해야 해.”

그러니까 그게 누군데요! 내가 거기서 많이 돌아다닌 건 아니지만, 그 저택에 여자는 하녀들뿐이던데?

“정말 방심해선 안 되겠군. 그토록 찾던 세실리아 에리조까지 백호의 손에 있었다니.”

응?

나요?

여기서 왜 내 이름이 나와?

나는 눈을 끔뻑이며 귀를 의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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