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뭐야, 옷을 왜 벗어>
(11/15)
11화 <뭐야, 옷을 왜 벗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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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뭐야, 옷을 왜 벗어>
2023.06.11.
“나한테 왜 이렇게 집착하죠?”
“집착?”
“처음엔 그냥 침입자라고 생각해서 날 잡으려는 줄 알았어요. 근데 시간이 갈수록 이해가 안 가서요. 침입자면 그냥 죽이면 되지, 왜 살려 두는 건데요?”
“내가 죽이길 원하나?”
“내가 그걸 원하겠어요?”
버럭! 목소리가 높아졌다.
아차, 조심해야 하는데.
“아니, 나야 살고 싶죠. 근데 갈수록 행동이 이해가 안 되잖아요. 날 죽이지도 않고 계속 곁에만 두고. 매일 같은 침대에서 자게 하는 건 또 뭐냐? 진짜 가시 페티시라도 있나?”
사실 오자르 세르비얀이 나를 찾던 것과 연관이 있는 걸까 싶었지만, 나는 내가 아는 정보를 먼저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때, 이드리쉬가 나를 향해 다가왔다.
꿀꺽.
침을 삼켰다. 정말이지 계속 봐도 익숙해지지 않는 위압감이다. 하지만 나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도망을 포기했다고 계속 저자세로 굴 거라는 건 아니니까.
눈알이 시려오던 그 순간이었다. 별안간 이드리쉬가 상의의 단추를 툭툭 풀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뭐, 뭐야. 옷을 왜 벗어.
농담이었는데, 정말 있나 봐! 가시 페티시!
나는 앞은 이드리쉬, 뒤는 침대로 막힌 채 꼼짝할 수 없었다. 심장이 미친 듯 뛰었다.
하지만 곧 도망가야겠다는 생각은 잊고, 이드리쉬의 가슴에 눈을 빼앗겼다.
가슴이 너무 튼실해서가 아니고, 검은 흔적 때문에.
이드리쉬가 정신을 잃었던 밤만큼은 아니었지만, 검은 흔적은 내가 떠나던 날보다 더 커졌다. 오른 가슴을 뒤덮고, 쇄골까지
침범하고 있었다.
아니, 근데 갑자기 왜 보여 주는 거야? 보통은 저런 건 숨기려고 하지 않나?
“반란이 있던 날, 생긴 상처지. 여기에 박혔던 것이 무엇인 줄 아나?”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내가 한 것도 아닌데.”
“고슴도치의 가시다.”
잉?
“아티그라도 또한 괴멸하던 그날, 너희 에리조 또한 멸문했다. 마지막 에리조가 눈을 감기 전, 에리조의 가주는 여기에 가시를 박아 넣었다. 저주와 함께 말이지.”
전혀 모르던 이야기였다.
“그리고 저주를 내린 당사자가 죽어 버려 저주를 풀 방법은 영영 요원했지. 유일하게 살아남은 고슴도치 수인, 세실리아 에리조를 빼고 말이야.”
나? 나요? 아니 이 자식까지 내 이름을 알고 있었단 말이야? 난 또 여태 밤송이라고 부르기에 모르는 줄 알았는데!
“그, 그거 저 아닐걸요? 남은 고슴도치 수인이 나밖에 없을 리 없잖아. 그리고 나는 그런 저주 푸는 방법도 모르고…….”
주절거리는데, 이드리쉬가 내 손목을 잡아챘다.
“엄마야.”
그는 내 손을 그대로 자신의 오른 가슴 위로 가져갔다. 매끈한 가슴이 손바닥에 가득 찼다.
어맛 단단한 근육 가슴!
하지만 놀라 손을 떼려 했지만, 꽉 붙잡힌 탓에 가슴 위에 손가락만 더 적극적으로 놀린 꼴이었다.
있는 거야, 가시 페티시! 나보고 막, 자기 가슴을 만지라고……! 그런다고 내가 미인계에 넘어갈 거 같아?
하지만 그 순간, 놀라운 장면이 내 눈을 사로잡았다.
가슴을 뒤덮었던 검은 흔적이 조금씩 움직였다. 특히나 내 손이 닿은 부분에서 격렬했다. 그러더니 미세하게 검은 흔적이 후퇴하듯 안쪽으로 오그라들었다.
이드리쉬는 손을 내렸지만, 나는 홀린 듯 흔적을 더듬었다.
“아니, 이 저주를 풀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너야, 세실리아 에리조.”
이드리쉬의 말에 나는 검은 흔적에서 시선을 떼어 그를 마주 보았다.
시간이 더디게 흘렀다. 노을을 빼다 박은 듯 노랗게 빛나는 눈동자가 나를 꿰뚫어 보았다. 그의 몸이 닿은 손바닥과 손목에서부터 시작된 저릿한 느낌이 느리게 팔을 타고 올라, 어느새 온몸을 채웠다.
생경한 감각에 나는 당황했다. 무서워서 그런가?
나는 이드리쉬에게서 팔을 빼 괜히 닿았던 부분을 옷 위에 문질렀다. 거친 감촉이 조금 전의 느낌을 뒤덮길 바랐으나 잘되지 않았다.
“그럼……. 전엔 그래서 가시 뽑아 간 거였어요? 저주 풀 방법 알아내려고?”
“네가 직접 닿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었다. 가시 우린 물도 먹어 봤지만, 소용없더군.”
가시 우린 물을 왜 먹어, 내가 가시오가피냐?
나는 저항할 방법 없이 이드리쉬와 나란히 침대에 누웠다. 잘생긴 남자와의 동침이니 떨릴 법도 했지만, 오늘 안 충격적인 사실들 때문에 그럴 겨를도 없었다.
그러니까, 내가 이드리쉬의 저주를 풀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는 거지.
그걸 이드리쉬도 알고 오자르도 안다고.
그렇다면 도망치는 것보단 이드리쉬에게 붙어 있는 편이 안전한데?
이드리쉬의 저주가 풀리길 바라지 않는 세르비얀 가에서 나를 제거하려 들 테니까. 심지어 그들은 권력도 가지고 있어서 숨어 살 자신도 없다.
오히려 이드리쉬는 나를 이용해 저주를 풀어야 하니 나를 죽일 수 없을 거고.
그러니 이드리쉬가 세상을 초토화하는 것만 막는다면 이쪽과 편을 먹는 게 오히려 살기 좋을지도…….
근데 왜 이렇게 마음 한편이 찝찝하지? 가스 밸브 안 잠근 것 같은 기분이야. 분명 뭔가 깜빡했는데.
“잠깐만.”
나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로드리오!”
“뭐?”
“로드리오 살려야 해요!”
이드리쉬의 편이 되려면 로드리오를 살려야 했다. 로드리오가 죽고 난 다음에 이드리쉬가 열 받아서 세상 폭파하기 시작한다고!
하지만 이드리쉬는 다시 눈을 감았다.
너 지금 헛소리라고 생각했지! 이 고양이 자식.
나는 이드리쉬의 멱살을 잡아 흔들었다.
“진짜라니까요? 빨리 일어나. 내가 아까 골목에서 엿들었어요. 분명 로드리오 죽이러 간다고 했다고요.”
침묵이 흘렀다.
“지금 내 말 안 믿는 거죠?”
“쓸데없이 도망갈 궁리하지 말고 잠이나 자.”
이드리쉬가 내 어깨에 팔을 둘렀다. 굵은 팔뚝에 몸에 힘없이 뒤로 나동그라졌다.
“정말이라니까! 로드리오가 죽어도 괜찮은 거예요? 아티그라도가 당신이랑 당신 할아버지밖에 남지 않아도 괜찮냐고요.”
이드리쉬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미치겠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잘 생각해 봐요, 이드리쉬.”
나는 머리칼을 쥐어뜯다가 차분히 말을 이어 갔다. 지금은 분통을 터뜨릴 게 아니라 이드리쉬를 어떻게든 설득해야 했다.
“지금 내 말이 거짓이어도 당신이 잃는 건 없어요. 나 따위한테 속았다고 기분이나 좀 나쁘겠죠. 하지만 진실이라면? 지금 이 시각에 로드리오가 죽어 가고 있다면. 제발 나 믿어요. 이게 거짓이면, 정말 나를 곧장 고슴도치 스테이크로 만들어도 좋아요.”
이드리쉬의 눈이 천천히 뜨였다. 좁은 침대에 누운 탓에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웠다. 곧은 눈매 아래 확장된 동공. 거기에 내 얼굴이 비쳤다. 아까와 달리 고민하는 게 보였다.
나는 진심이 전해지길 바라며, 나는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지금 로드리오를 살릴 사람은 당신뿐이야, 이드리쉬.”
이드리쉬가 들릴 듯 말듯 한숨을 내쉬었다. 판결을 기다리는 죄수의 심정을 알 거 같았다.
“거짓이라면 각오해야 할 거다.”
이드리쉬가 몸을 일으켰다.
하, 다행이다.
“진짜라니까요. 이 호랑이 속고만 살았나? 자, 그럼 이제 당장 가요. 로드리오 살려야지.”
우리는 곧장 숙소를 나왔다.
하지만 어둠이 내려앉은 거리에 지나다니는 마차는 없었다. 초조함에 나는 입 안 살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각성제를 마신 것처럼 심장이 내내 빠르게 뛰었다.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로드리오의 얼굴이 떠올랐다.
〈가시 마왕!〉
어떡해, 로드리오.
“빨리 가야 할 거 같은데, 마차 오는 데 얼마나 걸려요?”
“아무리 빨라도 1시간은 걸릴 거다.”
“1시간? 하, 안 되는데.”
이드리쉬가 나를 흘긋 한번 보곤, 주변을 둘러보았다. 근처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이드리쉬가 머리를 덮어쓴 후드를 풀어 바닥에 던졌다.
드러난 은빛 머리칼이 솨아아 소리를 내는 바람에 맞춰 춤췄다. 꼭 달에서 내려온 정령, 아니 전사 같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는 거대한 백호로 변해 갔다.
“으읏.”
나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치다가, 턱에 걸려 털썩 뒤로 넘어졌다.
몇 번 본 모습인데도 백호는 보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렸다. 이드리쉬의 은빛 머리칼은 은빛 털이 되어 온몸을 덮었다. 거대한 머리통이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지난번 같은 살기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시선만으로도 충분히 두려웠다. 커다란 입으로 나를 물면 단박에 목숨이 끊어질 거였다.
백호는 천천히 다가왔다. 걷기만 할 뿐인데, 모래바람이 바람에 날리는 듯 우아하고 세밀했다.
어느새 내 앞까지 다가온 백호는 콧등으로 내 다리를 툭 건드렸다.
“뭐, 뭐요…….”
저절로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호랑이는 다시 한번 내 다리를 코로 툭 밀었다.
“설마 등에 타라고요?”
맞다는 듯, 이드리쉬가 돌아 등을 내보였다. 물론 내가 타고도 남을 정도로 등은 널찍했다. 하지만……. 말도 타 본 적 없는 내가 호랑이를 탄다고!
하지만 나에게 무슨 선택권이 있겠어.
나는 울고 싶은 심정으로 일어나 백호의 어깻죽지를 살짝 잡았다.
“으아, 등이 이상해!”
의외로 북슬북슬 기분 좋은 촉감의 털 아래, 뜨거운 체온이 느껴졌다. 가죽은 생각보다 두꺼웠고, 그 안의 근육은 아주 단단했다.
지방이 하나도 없는 게 분명해!
이상하다는 내 말이 불쾌한지, 이드리쉬가 으릉 하고 소리를 내었다. 그에 나는 얼른 입을 다물고, 내키지 않는 다리를 움직여 이드리쉬의 등에 올라탔다.
나는 엎드리다시피 하며 백호를 양팔과 양다리로 꽉 안았다. 손으론 갈기를 힘껏 붙잡았다.
“잠깐만, 아직 출발하지 마요. 더 꽉 잡게. 하, 마음의 준비가 아직……. 근데 가다가 나 떨어지면 어떡해? 살살 달려야 해요. 아니지, 빨리 가긴 해야 하는데. 로드리오 살려야지. 그러니까……. 빨리 살살 가 줘요. 하, 심호흡하고. 하나, 둘, 셋. 나 이제 준비됐어. 출발!”
온몸으로 감싸 안은 백호의 몸이 약동하는 게 느껴졌다. 백호는 몸을 한껏 웅크렸다가, 뒷발을 세게 찼다.
“으악!”
하늘을 나는 듯, 공중으로 우리 둘의 몸이 위로 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