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제발 살려 주세요> (12/15)


12화 <제발 살려 주세요>
2023.06.12.


눈앞에 보이는 광경이 빠르게 달라졌다. 이드리쉬가 땅을 디딜 때마다 충격이 배로 그대로 전해졌다. 그럴 때마다 숨이 컥컥 막혔다.

“너, 무, 빠, 알, 라, 아, 아!”

엄청난 흔들림에 말이 뚝뚝 끊어졌다.

젠장, 앉아서 탈걸! 자세 잘못 잡았어! 배 터질 거 같아!

하지만 나는 참으며 눈을 꾹 감았다. 내 배가 터지는 한이 있어도 로드리오를 살려야 해.

마차가 도착하자 제로스가 졸린 눈을 비비며 나왔다. 예상치 못한 시간에 이드리쉬가 등장하자 어리둥절한 눈치였다.

“로드리오는?”

“로드리오 님이요? 아까 잠자리에 드셨습니다. 모셔 올까요?”

“자는 거 확인했나?”

“어……. 아니요.”

제로스가 눈을 데룩거렸다.

“내가 직접 확인한다.”

이드리쉬는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갔다.

나는 이드리쉬가 사라진 계단 끝을 보며 초조하게 손톱을 뜯었다.

다시 나타난 이드리쉬가 로드리오는 곤히 자고 있다고 말하면 좋겠다.

그럼 결국 나만 거짓말쟁이가 되겠지만, 그러는 한이 있어도 로드리오가 사고당하는 날이 오늘 밤은 아니면 좋겠어.

잠자던 로드리오가 왜 깨우냐며 투정 부리며 나왔으면 좋겠어.

“고슴도치 씨 맞죠? 도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갑자기 도망은 왜 갔고, 로드리오 님은 왜 찾는 거고…….”

제로스가 나에게 영문을 물었지만,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이드리쉬가 다시 나타났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만 봐도 로드리오가 없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눈앞이 하얘졌다.

이드리쉬가 그런 내 팔뚝을 잡아챘다. 몸이 힘없이 흔들렸다.

“네가 들은 걸 다 말해. 로드리오 지금 어디 있지?”

“숲, 숲에 있을 거야. 유인할 거라고 했어. 정확히는……. 나도 모르겠어.”

나는 이드리쉬의 방에 갇혔다. 창문도 문도 철저히 잠가 도망도 갈 수 없었다. 물론 갈 생각도 없었고.

머릿속이 온통 로드리오에 관한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초조하게 방 안을 서성이며 창밖을 확인하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숲엔 수색하는 횃불이 곳곳에 보였다. 집 안의 모든 사용인이 총동원되었다. 심지어 나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티그라도의 가주까지 나와서 제 발로 로드리오를 찾고 있었다.

처음엔 저택 근처를 오가던 불빛은 시간이 가며 점점 퍼져 나갔다. 생각보다 로드리오가 멀리 있는 모양이었다.

손바닥에 땀이 흥건했다.

모든 게 내 탓이야.

이 저택에 도착한 순간부터 이런 일이 일어날 거란 걸 알았지만 나는 막지 않았다.

내내 그 앳된 얼굴을 외면하고 무시했다.

죽기 싫어서 아등바등하는 주제에 나보다도 어린 나이에 죽을 로드리오는 외면했다.

로드리오는 어차피 죽을 운명이야. 이번에 내가 그를 살린다 해도 예언이 바뀌지 않는 한 세르비얀의 공격은 계속될 거야. 그러니 거기에 내가 개입할 수는 없어. 막을 힘도 없고…….

그렇게 합리화했지만, 사실 나도 알고 있었다.

나는 그저 끼어드는 게 무서웠던 거다. 내 목숨 부지하는 게 더 중요했으니까. 이번 생은 꼭 오래 살고 싶었으니까.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로드리오를 죽게 둔 건 바로 나라는 사실을 견디기 힘들었다.

“어디 있는 거야. 어서 찾아야 하는데.”

시간이 갈수록 로드리오를 살릴 가능성은 줄어든다.

하지만 찾을 수 있을까? 소설에선 정오가 한참 넘어서야 그를 찾았던 거 같다. 그때는 이미 로드리오의 숨이 끊어진 채였고.

소설의 내용을 뒤바꿀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덜컥 들 때마다 두려움에 숨이 턱턱 막혀 왔다.

그렇게 해가 떠올라 완전히 밝아질 때쯤, 숲 어귀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누군가 로드리오를 찾았다는 신호였다.

그걸 보고는 나는 거의 땅에 주저앉았다. 제발, 제발 숨만 붙어 있기를. 나는 손을 꼭 모으고, 믿지도 않는 여러 신에게 기도를 올렸다.

제발 로드리오를 살려 주세요. 제발.

잠시 후, 숲의 어귀에서 이드리쉬가 작은 몸을 품에 안고 숲에서 나오는 게 보였다.

이드리쉬가 한 발 한 발 걸을 때마다, 로드리오의 축 처진 팔과 다리가 힘없이 흔들렸다.

아, 안 돼.

가까이 올수록 그의 모습이 더 선명히 보였다. 옷이 온통 혈흔으로 붉었다.

살아 있다고 믿을 수 없는 모습이었다.

눈물이 왈칵 흘렀다.

로드리오, 제발. 제발 숨이 붙어 있어야 해.

그때, 가주 할아버지가 지팡이도 내던지곤 이드리쉬에게 달려갔다. 그는 로드리오를 이리저리 만지더니, 그 자리에 쓰러지듯 비틀거렸다. 사용인들이 재빨리 그를 부축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처절하고 끔찍했다.

이드리쉬와 로드리오가 저택 안으로 들어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내 시간은 지옥같이 느리게 흘렀다. 누군가 로드리오가 살아 있다고 전해 주길 간절히 바랐으나 나한테까지 이야기하러 올 사람은 없는 듯했다.

나 혼자만의 시간 내내 피투성이가 된 아이의 잔상만 나를 괴롭혔다.

얼마나 울었는지 얼굴이 퉁퉁 불었을 때, 누군가 문을 벌컥 열었다.

제로스였다. 함께 숲을 찾아다녔는지, 그 또한 잠깐 사이에 흙투성이가 된 채였다.

“이드리쉬 님이 모셔 오라십니다…….”

잔뜩 쉰 목소리에 절망이 느껴졌다.

나는 차마 그에게 로드리오의 상태를 묻지도 못했다. 다만 후들거리는 다리를 움직여 그가 이끄는 방향으로 걸어갈 뿐이었다.

끼익.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로드리오의 방문이 열렸다.

어둑한 방 안에서 가장 먼저 눈이 간 건 침대 위에 누운 로드리오였다.

생기를 전부 빼앗긴 듯, 아이는 창백했다. 옷을 벗겨 놓은 맨몸은 굳은 피로 얼룩졌다. 허리엔 커다란 붕대가 감겨 있었지만, 피가 멎지 않는지 붕대고 침대고 전부 붉었다.

“로드리오…….”

나는 아이의 앞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손을 살짝 잡았다. 사람의 손 같지 않게 차가웠다.

“아냐, 로드리오 괜찮은 거지? 살아 있는 거지?”

애원하듯 이드리쉬에게 물었다.

“숨은 붙어 있어.”

숨만 붙어 있으면 좋겠다고, 제발 숨만 붙어 있으라고 기도했지만, 막상 정말 숨만 간신히 붙은 아이를 보는 건 끔찍했다.

나는 재차 아이의 손을 주물렀다.

“좀 더 늦었으면 숨이 끊어졌을 거다. 네 도움이 컸어.”

감사를 전하는 말이었지만, 어쩐지 반대로 들렸다.

좀 더 미리 말했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거라고.

이드리쉬가 내 팔뚝을 잡고 끌어올렸다. 몸이 비틀비틀 제멋대로 흔들렸다.

“배에 이런 게 박혀 있더군. 넌 이게 뭔지 알겠지.”

나는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소설 내용 그대로였다.

“늑대의 송곳니…….”

오자르는 푸른 눈의 백호를 공격할 때, 늑대의 이빨을 사용한다. 당연히 이드리쉬는 로드리오를 공격한 게 늑대 가문 로베로라고 생각하고, 가장 먼저 그곳을 공격한다.

세르비얀으로선 푸른 눈의 백호를 제거함과 동시에 견제의 대상인 늑대 수인 일족 로베로까지 제거할 수 있으니 이득이었다.

하지만 소설로 읽어 머리로 아는 것과 실제로 눈으로 보는 건 달랐다. 훨씬 크고, 끔찍했다. 상아색의 송곳니는 내 손으로 한 뼘도 넘었다.

저런 게 로드리오의 배를 뚫었다고 상상만 해도…….

아, 어떡해.

아이의 몸으로 겪기엔 너무 끔찍했다.

얼마나 아프고, 얼마나 무서웠을까.

미안함에 다시 눈물이 시야가 뿌예졌다.

다행히도, 간밤 동안 피가 멎었다.

귀신처럼 창백했던 로드리오의 얼굴에도 혈색이 조금 돌아왔다. 하지만 여전히 의식은 없었다.

나는 내내 로드리오의 옆을 지켰다.

내 말이 진짜라는 게 증명되어서인지 더는 도망갈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 듯했다.

나는 로드리오의 머리카락에 엉겨 붙은 피를 물수건으로 닦아 주었다.

그때, 제로스가 나타났다.

“세실리아 님, 테스밀리온 가주님께서 부르십니다.”

“나를?”

테스밀리온이라면, 이 집의 가주이다.

어제 다친 로드리오를 보며 고통스럽게 무너지던 그의 눈에 훤한데…….

테스밀리온을 만나는 건 처음이었다. 덜컥 겁이 났다.

나는 저택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서재로 이동했다.

테스밀리온은 하루 대부분을 자신의 방이나 이곳 서재에서 꼼작하지 않는다고 했다.

똑똑. 용기를 내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라.”

긴장되었다. 나는 아찔한 가슴을 누르며, 천천히 문을 열었다. 정면에 테스밀리온이 앉아 있었다.

뒤로 쓸어 넘긴 흰 머리칼이 목 언저리로 내려왔다. 얼굴엔 고된 세월을 짐작할 수 있는 주름과 상처가 한가득이었다.

다만, 그 눈빛만은 조금도 무뎌지지 않았다. 이드리쉬의 것보다는 조금 더 주홍에 가까운 눈동자가 나를 꿰뚫어 보는 듯했다.

온몸이 긴장감으로 조여 왔다.

내가 한참 전부터 로드리오의 죽음을 방관해 왔다는 걸 테스밀리온이 알 리 없었는데도, 왜인지 질책받는 듯했다. 그의 눈을 마주하는 게 힘들었다.

“네가 세실리아 에리조더냐.”

예, 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입이 딱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대신 나는 얼빠진 아이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뒤에서 문이 열리고, 이드리쉬가 들어왔다. 다행히 나만 부른 건 아닌 모양이었다.

이드리쉬가 내 옆에 섰다. 그것만으로 숨이 멎을 듯한 무거운 긴장감이 조금은 옅어지는 듯했다.

하지만 테스밀리온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지, 나에게 박힌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로드리오가 다친다는 걸 네가 미리 알려 주었다고 들었다.”

쉰 듯한 목소리에는 어떠한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드리쉬와 꼭 같은 은발이었지만 그의 것만은 세상에 지쳐 하얗게 센 것처럼 보였다. 세상을 너무 많이 돌아다닌, 지친 겨울바람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나는 고개를 내려 바닥을 보았다. 이곳 바닥 역시 하얀 대리석이 맞물리며 기하학적인 무늬를 냈다.

“네, 맞아요.”

테스밀리온의 말은 질책이 아니었는데도 어깨가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어떻게 알았지.”

의심 가득한 질문이 화살처럼 날아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