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입이 제멋대로…….> (13/15)


13화 <입이 제멋대로…….>
2023.06.13.


“누군가 이야기하는 걸 엿들었어요.”

내 대답에 이드리쉬가 불쑥 끼어들었다.

“로베로겠지.”

로베로는 늑대 수인들의 수장이었다.

항상 차가웠던 그의 목소리엔 오늘만은 선명한 분노가 어렸다.

나는 이드리쉬와 테스밀리온의 눈치를 살폈다. 두 호랑이 사이에서 추궁당하는 고슴도치라니. 심장이고 간이고 전부 쪼그라드는 듯했다.

“어서 바른대로 다 말하거라.”

안 그래도 다 말하려고 했는데요……. 테스밀리온의 재촉에 나는 움찔움찔 이야기해 나갔다.

“그러니까 한 명은 지난번 이곳을 침입했던 자 같았고, 다른 한 명은……. 세르비얀이었는데.”

“세르비얀? 설마 뱀 수인들의 수장을 말하는 것이냐?”

테스밀리온이 인상을 찌푸렸다.

“네, 정확히는 오자르 세르비얀이요.”

“그럴 리가 없다.”

내 고심한 대답을 테스밀리온이 단번에 부인했다.

“하지만 정말인데요.”

“어리석은 소리. 세르비얀이 우리를 공격할 이유는 없어. 그들과 우리 가문은 오랫동안 유대를 맺어 왔다. 왕위에서 쫓겨났을 때 완전히 멸문하지 않고 이렇게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것도 그들 덕이지.”

“하지만 페뿌르삥은 그 점을 오히려 삐용스 하는 거라고요.”

“……뭐라고 했느냐.”

두 사람이 나를 이상한 눈으로 보았다. 나도 내 입을 막았다.

어?

나는 저런 이상한 말을 하려던 게 아니었는데.

페르콥이 오히려 그런 유대를 이용한다고 말하려고 했다.

“아니, 그러니까 빠라빠라가 씨룰루하는 순간에 붕붕방방하려고.”

아니! 내 입이 미쳤나 봐!

아티그라도가 전쟁을 일으키는 순간 뒤에서 그들을 치려 했다는 말은 입 밖으로 나가는 순간 이상한 외계어가 되었다.

“도대체가…….”

테스밀리온이 해명을 바라는 눈짓으로 이드리쉬를 보았다. 하지만 그도 무슨 영문인지 알 리가 없었다. 나조차 알지 못했으니.

“오자르. 어 이건 말할 수 있네. 세르비얀. 페뿡뿡.”

페르콥의 이름은 이상한 괴성으로 바뀌었다.

“페…… 뿡뿡? 무엇이냐, 그 상스러운 소리는. 지금 나를 놀리는 건가!”

“아니, 그게 아니라…….”

혹시 소설로 본 이야기는 발설할 수 없는 건가?

“로, 로드리오를 공격하려 준비한 건 오자르였어요!”

봐봐. 내가 직접 목격한 건 잘 말해지잖아.

“하지만 그건 모두 시로루딱이 하로로꿍한거라고요.”

페르콥이 시킨 거라는 말은 나가지 않는다.

테스밀리온은 잔뜩 화가 나 보였지만, 나는 덕분에 내 가설을 확인했다.

그러니까 내가 소설을 보며 습득한 정보는 말할 수가 없었다.

아, 이렇게 되면 세르비얀의 짓이라는 걸 설명하기 힘든데. 특히 오자르는 페르콥의 말에 속아 넘어갔을 뿐, 주동자는 페르콥이라는 걸 어떻게 알린단 말이야.

머리가 복잡했다.

나는 슬쩍 테스밀리온의 눈치를 봤다. 내 괴상한 말들이 자신을 놀리는 거라고 생각하는 듯 얼굴이 뻘겋게 달아올랐다.

“아무래도 제정신이 아닌 듯하군.”

“제정신입니다! 방금 그건 제가 일부러 한 게 아니라 입이 제멋대로…….”

나는 자신 있게 소리쳤다. 옆에서 이드리쉬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당장 저 정신 나간 여자를 끌어내. 보고 싶지 않다!”

“아니, 가주님. 제 말을 조금만 더 들어 보세요. 그러니까 오자르 세르비얀을 본 건 확실한데 그거 뽕꾸뽕꾸 뾰로롱.”

하아. 두통이야.

나는 내 머리를 짚었다.

그때, 이드리쉬가 내 앞을 가로막고 나섰다.

“가주님. 이자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엔 저도 동의합니다.”

뭐? 너까지?

“하지만, 확인해 볼 가치는 있습니다. 지난밤 세실리아가 아니면 정말 로드리오를 잃었을 겁니다.”

이드리쉬가 내 이름을 제대로 부르는 건 처음이었다. 내 편을 들어주는 것도 처음이었다. 물론 제정신이 아니라는 테스밀리온의 의견에는 동의를 표했지만……. 말은 뭐든 뒷부분이 중요한 법이니까.

나는 놀라 이드리쉬의 뒤통수를 멍하니 보았다. 이드리쉬는 나를 바라보고 있지 않아 무슨 표정을 했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할 길이 없었다.

그래도 감격스러웠다.

드디어 나를 믿어 주는구나!

내 말엔 얼굴이 터질 듯 달아올랐던 테스밀리온도 다시 차분한 얼굴색을 되찾았다.

“그래, 그 말은 맞다. 하지만 이건 도저히 믿어 줄 수가 없구나. 세르비얀이 했을 리는 없다. 그들은 수백 년간 우리 아티그라도에 충성을 다했어. 심지어 반란이 일어났을 때, 다른 수인 눈을 피해 이곳에 우릴 숨겨 준 것도 그들이었다. 세르비얀 가문이 아니었다면 진작 우리는 멸족했을 거야.”

그게 아니라니까욧!

나는 답답함에 가슴을 주먹으로 쿵쿵 쳤다.

테스밀리온이 흠칫 놀라며 나를 경계했지만, 어쩔 수 없다. 너무 답답하다.

속고 있는데 속고 있다고 말해 줄 수가 없다니.

테스밀리온의 말이 완전히 틀린 건 아니다. 반란이 지나간 후, 겨우 살아남은 테스밀리온과 이드리쉬를 숨겨 준 건 정말 세르비얀의 가주인 페르콥 세르비얀이다.

충신이었던 세르비얀이 이번에도 그들을 살려주었으니 얼마나 고맙고 믿음직하겠어. 그건 이해해. 한다고.

하지만 그 뒤에 있다니까요! 흉악한 꿍꿍이!

사실 세르비얀 가문은 진정한 충신이 아니었다.

특히 현 가주이자 오자르의 아버지인 페르콥은 야심이 큰 인물이었는데, 그는 왕을 꿈꿨다.

그는 아티그라도를 무너뜨리기 위해 왕의 신뢰와 호랑이 특유의 무심한 성격을 이용했다.

페르콥은 수인 백성과 왕가 사이를 이간질하기 시작했다. 백성의 합당한 요구는 왕가를 향한 반발심으로 교묘히 바꿔 보고했고, 왕이 내린 벌은 더 엄한 형식으로 집행되었다.

당연히 아티그라도 왕가에 대한 반발은 점점 심해졌고, 끝내 반란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하지만 아티그라도가 무너진 자리를 뱀 가문이 날름 먹기엔 그들은 아직 힘이 부족했다.

반란에서 큰 공을 차지했던 독수리 수인 아길라와, 반란에는 전면으로 나서지 않아 피해가 가장 적었던 늑대 수인 로베로가 세르비얀을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었다.

그래서 페르콥은 이드리쉬와 테스밀리온을 살리기로 한 것이다.

일종의 견제용으로서.

말하자면 늑대, 독수리 그리고 호랑이가 싸우고 지쳤을 때, 세르비얀이 모든 권력을 삼키겠다는 거였다.

실제로 이 계획은 미래에 거의 성공한다.

아티그라도는 그들이 부추기는 대로 세상을 공격하고, 세상이 초토화된 순간, 세르비얀이 남은 아티그라도를 죽인다. 그러고는 빈 왕좌를 줍줍!

나 참, 근데 이걸 설명할 방법이 없네.

아, 설명을 못 한다면 그들이 직접 보고 깨닫게 하면 되는 거잖아? 나는 은근히 힌트만 주고, 이드리쉬가 따라오면서 직접 진실을 파헤치면 되지.

나는 이드리쉬를 제치고 테스밀리온의 앞으로 나섰다. 내 얼굴을 보자 테스밀리온은 곧장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

그렇게까지 극혐할 얼굴인가요……. 흑흑. 꽤 미인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얼굴로는 안 되는 건가요.

“제 말이 안 믿기시면, 좋아요. 이제부터 알아보면 되죠. 일단 로드리오를 다치게 한 그 이빨의 주인이 누구인지부터 알아보는 건 어떨까요?”

두 사람이 나를 일제히 쳐다보았다. 내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무슨 목적인지 가늠하는 듯했다.

소용없을걸? 다른 의도 따윈 없으니까!

나는 내가 지을 수 있는 가장 무해하고 순수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이 미소를 보면 나를 안 믿을 수 없을 거…….

“저걸 내 방에서 내보내!”

앗, 실패.

* * *

며칠이 지났다. 테스밀리온과 이드리쉬는 내 제안을 아직도 검토 중인 듯했다. 시간이 걸리는 건 못마땅했지만, 바로 기각하지 않고 검토해 준다는 게 어디인가?

그래서 나는 시간 대부분은 로드리오를 간호하며 보냈다.

출혈이 멈춘 후, 로드리오의 혈색은 거의 정상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깨어나지는 않았다. 상처 또한 그 상태로 멈춘 듯 여물지 않았다.

나는 종일 로드리오의 옆을 지켰다. 밤엔 이드리쉬와 있어야 했지만 말이다.

이렇게 보니 나 완전 이 집 전담 주치의 같잖아? 월급 받아야겠어.

그렇게 걱정스러운 시간을 보내던 날이었다. 나는 로드리오의 머리를 살짝 들어 베개를 정리하고 있었다.

로드리오의 속눈썹이 움찔거렸다.

음? 바람인가?

나는 활짝 열어 둔 창문 너머를 보았다. 오늘따라 바람이 거셌다.

“로드리오가 움직인 줄 알았네. 깜짝이야. 로드리오, 어서 일어나. 날씨도 선선한데 깨어나면 이드리쉬랑 셋이 소풍이나…….”

“누구…… 세요?”

“어? 어!”

나는 화들짝 놀라 그의 작은 머리통을 그대로 놓아 버렸다.

“악!”

로드리오가 새된 비명을 질렀다. 갑자기 움직인 탓에 목이 아픈 모양이었다.

“미, 미안.”

나는 얼빠진 사람처럼 그런 로드리오를 멍하니 보았다.

그러다 그가 깨어났다는 사실을 겨우 받아들였다.

“로드리오!”

“누, 누구세요.”

힘없는 목소리에 눈물이 왈칵 나왔다.

“정신이 들어? 나 가시 마왕이야!”

“가시……?”

“그래! 가시 가시 대마왕!”

내 입으로 말하기 영 부끄러운 이름이었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 따위 할 겨를이 없었다. 인상을 잔뜩 구겼던 로드리오가 천천히 눈을 떠 나를 위아래로 보았다. 파란 눈에 의심이 깃들었다.

“가시가시 따끔 대마왕……? 진짜야?”

“그래! 나야, 나! 맙소사. 깨어나다니. 정말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다, 로드리오. 나는 네가 갸루룩빵대로 죽는 줄로만 알고 얼마나 걱정했는데.”

“갸……루룩?”

“아니, 이럴 때가 아니지. 기다려. 이드리쉬한테도 말해 줘야겠어. 기다려!”

뒤에서 로드리오가 뭐라고 외쳤지만, 나는 돌아보지 않고 방을 뛰쳐나갔다.

“이드리쉬 어디 있어요!”

지나가는 사용인들에게 쩌렁쩌렁 외쳐 물었다. 그들은 백호의 저택에 어울리지 않는 소란에 어리둥절하면서도 나에게 방향을 알려줬다.

야외의 연무장에 있는 듯했다.

나는 미끄러운 대리석에 두 번이나 넘어지면서도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이드리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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