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이리 와, 시작하지>
(14/15)
14화 <이리 와, 시작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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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이리 와, 시작하지>
2023.06.14.
검을 휘두르던 이드리쉬가 나를 보곤 우뚝 멈추어 섰다. 그의 흰 셔츠와 머리칼은 온통 땀으로 젖어 있었다.
나는 그대로 달려갔다. 무서운 속도로 다가오는 날 보며 이드리쉬가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나는 그의 앞에서 간신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간신히 몸이 멈추고, 나는 허리를 굽혀 숨을 몰아쉬었다.
“헤, 헤엑, 헥. 이드, 헥.”
“뭐야?”
“로드리, 허억, 오가 깨어났어요! 눈을 떴다고!”
내 말에 이드리쉬가 내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세상이 온통 뿌예서 이드리쉬가 무슨 표정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정말인가?”
“그럼 정말이죠!”
나는 활짝 웃었다. 그러자 눈에선 눈물이 도르륵 흘렀다.
“빨리 가자.”
나는 이드리쉬의 손을 꽉 잡았다. 그러곤 다시 로드리오의 방으로 달렸다.
이드리쉬와 내가 다시 나타나자, 로드리오는 일어나 앉으려 했다.
“어딜! 다시 누워. 아직 무리하면 안 돼. 아직 상처가 하나도 낫지 않았다고.”
내 말에 로드리오는 다시 눕긴 했으나, 슬쩍 이드리쉬의 눈치를 살폈다. 이드리쉬는 꼿꼿이 선 채, 로드리오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조금 전의 나와는 영 다른 반응이었다.
“정말 깨어났군. 그날 일, 기억은 나나?”
남의 일 대하듯 무심하게 말했다. 이드리쉬의 질문에 로드리오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응, 이드리쉬. 말 안 듣고 밤에 숲으로 나가서 미안해.”
“미안할 필요가 없다. 잃을 뻔한 건 네 목숨이지, 내 목숨이 아니니까.”
어머, 말을 해도 꼭!
“응…….”
저 봐. 방금 깨어난 애를 꼭 기운 쭉 빠지게 해야겠어?
“그래서 기억하는 건?”
“모르겠어. 정원에 이상한 불빛이 왔다 갔다 하길래 잠깐 뭔지 확인만 해 보려고 한 거였는데…….”
“그래서?”
로드리오가 핏기가 가실 정도로 양손을 꽉 맞잡았다. 그 순간을 떠올리는 게 무서운 모양이었다.
“저택 밖을 나서는 수, 순간 누군가 내, 내 입과 눈을 막았어. 계속 끌려갔는데…….”
두려운 기색이 역력했지만, 로드리오는 더듬더듬 기억나는 걸 이야기했다. 하지만 범인을 특정할 수 있을 만한 내용은 없었다.
“그리고 허리가 불에 타는 것같이 아팠어. 누, 눈앞이 하얘져서…….”
“되었어. 쓸모 있는 정보는 하나도 없군.”
로드리오가 고개를 푹 수그렸다.
그런 게 통할 리 없었지만, 나는 이드리쉬는 흘겼다. 꼭 지금 막 죽다 살아난 애한테 그렇게 매정하게 굴어야겠어요?
“그래도 그런 깊은 상처에도 잘 깨어났으니. 너도 아티그라도는 아티그라도인 모양이다.”
이드리쉬의 정 없고 멋도 없는 차가운 말에도 로드리오는 기뻐 보였다.
“응, 나는 로드리오 아티그라도니까……. 이런 상처쯤은 아무것도 아니야.”
“하지만 앞으론 아예 이런 일 없게 처신도 잘하도록.”
“으, 응……!”
로드리오가 빠르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아픈 듯 이마를 찡그렸다. 그러다가 그의 시선이 나에게 닿았다. 조금 전까지 얼굴에 어렸던 공포심이 호기심으로 바뀌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근데 진짜 가시 마왕이야?”
아무래도 내가 그 고슴도치라는 게 믿기지 않는 눈치였다. 참나, 꼬맹이 속고만 살았나.
“응, 맞다니까. 변하는 거 보여 줘?”
나는 얼른 수인화했다. 로드리오의 생기 없는 눈이 그 순간만큼은 반짝 빛났다. 나는 로드리오의 손에 뾰족한 코를 비볐다.
고슴도치로 변하는 거 매일 보여 줄 수도 있으니까 아프지 마. 꼬맹아.
“우와 정말 이드리쉬의 말대로 가시 마왕이 수인이었어. 근데 가시 마왕 여자였네?”
다시 사람으로 변한 날 보며 로드리오가 감탄했다.
“지금껏 날 남자로 안 거니?”
“당연하지……. 가시 마왕은 완전 멋있는 기술도 있잖아.”
“멋있는 기술은 여자도 가질 수 있단다.”
“그렇구나…….”
로드리오의 말꼬리가 늘어졌다. 아직 피곤한지 다시 눈을 끔뻑끔뻑 감았다.
나는 맥없이 웃으며 로드리오의 땀 젖은 머리를 쓸어 넘겼다.
“좀 더 자. 조금 있다가 깨어나면 더 신기한 묘기 보여 줄게.”
“응……. 더 신기한 묘기.”
금세 조용해진 로드리오를 한참 보다가 고개를 돌렸을 때, 나는 이드리쉬와 눈이 딱 마주쳤다.
언제부터 날 저런 눈으로 보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 나를……. 왜 그렇게 봐?”
나는 멋쩍은 마음에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본 적 없다.”
이드리쉬가 쌩하니 방을 나갔다.
“쳇, 봤으면서. 그리고 로드리오 죽다 살았는데 잘했다고 한번 토닥여 주면 어디 덧나나? 가여운 로드리오.”
나는 이드리쉬 대신 그의 부드러운 볼살을 연신 쓰다듬었다.
* * *
로드리오는 점점 기운을 되찾았다. 급한 문제가 해결되고 나니 그제야 달라진 내 입지가 실감이 났다.
“아, 너무 좋다.”
나는 넓은 침대 위를 뒹구르르 굴렀다. 이드리쉬 따위는 없는 나만의 침대, 그리고 나만의 방이었다.
이 방을 얻기까지 이드리쉬와 꽤 긴 논쟁을 해야 했지만, 나는 결국 쟁취해 낸 것이다!
이드리쉬는 여전히 자신의 방에 나를 가두기를 원했다.
〈앞으로도 내 방에 머물러.〉
〈싫어요, 나 이제 도망 안 간다니까?〉
〈도망간다고 미리 말하는 사람도 있나?〉
〈휴, 진짜 속고만 살았나. 아무튼 이드리쉬 당신이 이런 식으로 나오면 나도 저주 푸는 데 소극적으로 임할 수밖에 없어요. 뭐, 그걸 원하는 거면 어쩔 수 없고.〉
나는 아쉬운 것 없다는 듯, 팔짱을 꼈다.
그렇다! 예전과는 달랐다. 이드리쉬는 내가 꼭 필요했고, 나로선 아니었으니 말이다!
물론 이드리쉬가 나를 강제로 가두고 방법을 찾아볼 수는 있겠지만, 그건 여러모로 불편하고 비효율적일 거였다.
그러니 어쩌겠어. 내가 갑인 거지. 갑이면 갑질을 좀 해 줘야지. 후후.
이드리쉬는 골똘히 생각하는 눈치였다.
열심히 생각해 보세요, 이드리쉬 씨. 아무리 생각해도 내 요구를 들어주는 게 가장 나은 방법일걸?
〈좋다. 그럼 네 방도, 자유도 주지. 대신 나도 조건이 있어.〉
〈뭔데요? 말만 해 보세요.〉
난 넓은 아량을 과시하듯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첫째는, 내가 붙이는 하녀와 온종일 함께할 것.〉
하녀? 오히려 좋은데? 누워서 물 마시기 귀찮을 때 물 대신 떠다 주고, 머리 빗기 귀찮을 때 대신 빗겨 주는 거 아니야?
〈둘째, 아까 네 입으로 말한 대로 저주를 풀기 위해서라면, 그 방법이 무엇이든 적극적으로 임하기.〉
그게 무엇이든?
설마 날 죽이려는 생각은 아니겠지?
순간 죽은 고슴도치를 약으로 만들어 가슴에 바르는 이드리쉬가 상상되었다. 나는 고개를 저어 끔찍한 장면을 털어 냈다.
설마. 그거 완전 황금오리 배 가르기잖아. 적어도 그런 방법은 다른 모든 걸 다 시도한 후에 하겠지.
막연한 두려움은 있었지만, 나쁜 거래는 아니었다. 나는 안전과 자유를 둘 다 얻게 되니까, 위험과 가난 속에서 밖을 헤매는 것보다 나았다.
물론 나중에 이드리쉬가 일으킬 전쟁이 걱정되긴 했지만…….
하지만 생각해 봐. 이드리쉬가 일으킨다는 말은, 즉, 이드리쉬만 변심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것과 같은 뜻이잖아? 이게 바로 생각의 역발상!
〈이 두 가지를 어기는 순간, 당신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박탈당한다. 동의하나?〉
〈응, 좋아요!〉
나는 해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나는 내 방을 가지게 되었다.
이드리쉬의 방에 비해선 당연히 작고 아담했다.
하지만 원하던 거울과 화장대도 있었고, 침대도 안락했다. 창은 너무 크지 않고 적당해 아침이면 딱 알맞은 양의 햇살이 들어왔다.
“그래, 이드리쉬 방은 너무 더웠다니까. 게으른 호랑이.”
특이한 점은 방의 입구 통로에 하녀 미라이의 방으로 가는 문이 있다는 거였다. 나가고 들어올 땐, 미라이의 시야를 피할 수 없었다.
“세실리아 님, 일어나셨어요?”
미라이가 세숫물을 들고 소리 없는 걸음으로 내 방으로 들어왔다. 나는 눈을 비비며 일어나 앉았다. 미라이는 부드러운 천에 적당히 따뜻한 물을 적셔 내 얼굴을 문질러 닦았다.
이게 웬 호강이야.
새로 구했다는 사용인 미라이가 온 후론 내가 내 손으로 직접 무언가를 할 필요가 없었다.
세수시켜 줘, 옷도 입혀 줘, 머리도 빗겨 줘. 분명 같은 얼굴에 같은 머리칼인데도 그녀의 손길을 받으니 제법 귀한 집 영애 같아 보였다.
“고마워요, 미라이.”
“제 일인걸요.”
이번엔 내 머리를 빗질하던 미라이가 귀여운 덧니를 보이며 웃었다. 그녀는 손끝이 야무질 뿐 아니라 아주 상냥했다. 믿음직한 언니가 생긴 거 같은 기분까지 들었다.
“이드리쉬한테 고맙다고 해야겠어.”
“왜요?”
“미라이를 고용해 줘서. 미라이, 혹시 월급 많이 받아요? 내가 이드리쉬한테 두 배로 달라고 할까?”
이드리쉬가 들어준다는 보장은 없었지만, 나는 애정을 담아 괜스레 허세를 부려 보았다. 뭐, 저주 두 배로 열심히 푼다고 하지 뭐.
미라이가 눈을 접으며 웃었다.
“이미 충분히 받아요. 자, 다 되었어요. 바로 이드리쉬 님한테 가야 하세요.”
“아……. 이드리쉬가 오래요?”
“네, 일어나는 대로 오라셨어요.”
“가기 싫은데…….”
나는 괜스레 시간을 끌며 일어섰다.
“어서요.”
미라이가 웃으며 나를 재촉했다.
웃으며 저러는데 어떻게 거절하겠어. 쳇.
미라이는 나를 이드리쉬의 방으로 들여보냈다.
왠지 기분이 좋아 보이는데, 미라이.
그녀에겐 내가 이드리쉬와 함께하는 시간이 유일한 자유 시간이니, 그럴 만도 한가?
나는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섰다. 고슴도치일 적 며칠을 살며 지낸 방인데도 낯설고, 긴장되었다.
“늦었군.”
뒤에서 들린 이드리쉬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욕실에서 이제 막 씻고 온 듯, 젖은 머리를 했다.
“늦잠을 자서요.”
“저주를 푸는 일에는 적극적으로 임한다고 한 게 누구더라?”
“그래도 도망 안 가고 왔잖아요.”
눈썹을 구기자 이드리쉬의 입꼬리가 삐죽 올라갔다.
또 나를 놀리는 거였군.
“그럼 시작하지.”
“으, 응.”
내 대답과 함께, 이드리쉬가 상의를 거침없이 위로 벗었다. 나는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요즘엔 매일 보는 맨몸인데도 민망했다.
아니, 사실은 이상하게도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민망함과 부끄러움이 커지는 듯했다.
이드리쉬의 방에 오기 싫어 미적거린 것도 이 이유였다.
이드리쉬는 침대에 얌전히 앉아, 나를 기다렸다.
“근데 일어나서 아무것도 못 먹었는데.”
“끝나고 먹어. 빨리 와.”
“응…….”
나는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이드리쉬의 곁에 붙어 섰다. 앉은 이드리쉬와 선 나의 눈높이는 얼추 비슷했다. 몰래 침을 꿀꺽 삼켰다.
이드리쉬는 안 하고 뭐 하냐는 듯, 눈썹을 까딱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