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가짜 우쭈쭈 대작전>
(15/15)
15화 <가짜 우쭈쭈 대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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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가짜 우쭈쭈 대작전>
2023.06.15.
나는 천천히 손을 내밀어 그의 검은 가슴 위에 가져다 댔다.
그의 체온이 나의 체온과 맞닿으며 천천히 동화되었다.
이 상태로 1시간 이상을 가만히 있어야 했다.
신체 접촉이 저주에 통하는 가장 확인된 방법이기에, 이것부터 시작하기로 한 거다.
물론 동침하는 것보다야 나았지만, 문제는 1시간이 내 생각보다 매우 느리게 간다는 거였다.
가만히 서서 남정네의 튼실한 가슴을 만지며 1시간을 보내는 것.
듣기엔 좋아 보이지. 이드리쉬는 끝장나게 잘생기기까지 했으니까. 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쉽지 않다는 거다.
방 안은 고요했고, 손바닥에서 심장 박동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이드리쉬는 원래부터 앞에 선 대상을 긴장시키는 이상한 능력이 있어서 더 했다.
이젠 손에서 뛰는 맥박이 내 것인지 이드리쉬의 것인지도 구별이 잘되지 않았다. 입 안은 마르고, 손바닥은 축축했다. 한번은 1시간이 다 지나고 가슴에서 손을 떼어 냈는데, 내 땀으로 이드리쉬의 가슴이 번들거리기도 했다.
어후, 얼마나 창피하던지.
가장 곤욕스러운 건 내내 나를 가까이 주시하는 이드리쉬의 시선이었다. 미치고 팔짝 뛸 만큼 강렬했는데, 그 앞에 서 있으면 발가벗은 채 태양이 작열하는 해변에 서 있는 것처럼 온몸이 따끔따끔했다.
이드리쉬의 가슴의 검은 흔적이 격렬하게 요동쳤다.
“그, 이드리쉬.”
으, 눈 마주쳤다.
나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을 이었다.
“좋아하는 음식이 뭐예요?”
“그런 걸 왜 묻지?”
그야, 어색하니까! 무슨 말이라도 해서 손에 집중된 생각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거라고. 그리고 원래 먹을 것 이야기가 가장 효과적인 법이고.
“어, 이드리쉬에 대해 더 알고 싶어서? 근데 사실 대답 안 해도 알 거 같아요. 고기 좋아하죠?”
이곳 백호의 저택에 나오는 음식은 전부 고기였다.
“그래.”
이드리쉬는 순순히 육식파라고 고백했다. 호랑이 수인이니까 당연한 건가?
“호랑이 수인은 풀을 먹으면 죽나?”
“그럴 리가. 즐기지 않을 뿐이야.”
“으음, 편식하는 거뿐이었구나. 로드리오가 누굴 닮았나 했더니.”
이드리쉬가 불쾌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나도 고기를 좋아하긴 해요. 근데 매일같이 기름진 고기만 먹으니까 신선한 풀이 먹고 싶어요. 아니면 과일도 좋고. 아, 숲에 있을 때는 과일을 매일 따 먹었는데…….”
“뒤쪽 정원에 포도나무가 있어.”
“정말? 그걸 왜 이제 말해 줘요!”
나는 이드리쉬의 가슴에 양손을 다 얹었다. 성심성의껏 저주를 풀겠다는 무언의 몸짓이었다.
“그 포도 나 따 먹어도 돼요?”
“그러든가.”
“아자뵤!”
나는 이 방을 나가자마자, 포도를 따러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려면 바구니와 칼이 필요하려나? 햇빛이 따가우니 모자도 준비해야겠다.
이렇게 윤기 나게 보라색으로 여물은 포도를 한 알씩 똑 따서 흐르는 물에 씻은 후에…….
“손가락 꼼지락거리지 마.”
이드리쉬의 말에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나도 모르게 포도 먹는 상상을 하며 손을 움직인 모양이었다.
그러다 문득, 검은 흔적이 아까와 달리 거의 움직이지 않는 걸 발견했다.
손의 효력이 떨어진 건가?
나는 손을 떼었다가 다시 붙여도 보았다. 그래도 역시 아까만큼 줄어드는 양이 많지 않았다.
뭘까. 넌 뭐니? 왜 빨리 움직였다가 느리게 움직였다가 하니? 흠……. 집중할 때와 안 할 때의 차이인가?
나는 고민하며 다시 손을 제 위치에 올렸다. 여전히 움직임은 둔했다.
나는 몇 차례 손을 떼었다 붙이며 어떤 규칙성을 찾으려 했지만, 아무 소득도 없었다. 결국 포기하곤, 시간이나 때우기로 결심했다.
“근데 언제부터 내가 수인이라는 걸 확신했어요?”
“침입자들이 있던 날 밤.”
내가 사람으로 처음 변해 죽어 가는 이드리쉬를 살린 날을 말하는 거였다.
빨리도 눈치챘네. 너같이 눈치가 빠른 아이는…….
“쳇, 그때 분명 기절했었는데 언제 본 거람. 그때 본 머리카락 때문에 내가 고슴도치라는 걸 안거죠?”
“머리카락만으로 무슨 수인인지 알아낼 수는 없어.”
“없……? 그땐 분명히 완벽한 붉은 머리는 고슴도치뿐이라고…….”
“하지만 인위적으로 머리카락 색을 바꾸는 수인들도 있지. 간혹 다른 수인들 사이에서도 붉은 머리가 나오기도 하고.”
“뭐야, 그럼 뭘 보고 안 건데?”
골똘히 생각하는데, 이드리쉬가 나를 이상한 눈으로 보았다.
“근데 너는 왜 그런 걸 묻지? 꼭 수인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그야……. 아무것도 모르니까요.
나야 갑자기 이 세상에 뚝 떨어졌으니 별로 아는 게 없는 게 당연했지만. 이드리쉬 입장에선 어이없는 질문이긴 할 거 같았다.
“사실, 아무것도 모르는 게 맞아요. 어느 날 깨어 보니 숲이었거든요. 그전 기억은 아무것도 나지 않고요.”
“기억을 잃었다고?”
“네, 깨어난 게, 이 저택으로 오기 바로 얼마 전이거든요. 그러니까 이 저택에 숨어들 때만 해도 난 진짜 내가 고슴도치인 줄 알았다니까요? 절대 숨기려고 한 게 아니에요. 이드리쉬가 내가 수인이라는 걸 깨닫기 바로 전에야 나도 내가 수인이라는걸 알았으니까.”
“스스로 수인인 줄도 모르는 수인이 있다니……. 바보 같아, 정말.”
“아니거든요!”
나는 이드리쉬의 빈 가슴을 찰싹 때렸다. 이드리쉬는 모멸스러운지 얼른 손자국이 남은 가슴을 가렸다.
“미, 미친 건가?”
* * *
나는 오늘의 할 일, ‘저주 약하게 하기’를 끝낸 후, 곧장 포도나무를 찾아갔다. 관리가 안 된 포도나무는 높은 담벼락에 아무렇게나 헝클어져 있었다.
“이렇게 되면 제대로 열매가 자라지 못할 텐데.”
아니나 다를까, 영글지 못한 열매만 형편없이 달려 있었다. 아무래도 포도를 먹기 위해선, 쓸모없는 잎을 쳐 내야 할 듯싶었다.
섣불리 시작할 일은 아닌듯해, 포도나무 가꾸기는 일단은 나중으로 미룬 채, 이번엔 로드리오에게 향했다.
“세실리아!”
“로드리오, 일어나 있었구나?”
“그럼 당연하지. 세실리아처럼 늦잠 자지 않는다고.”
늦잠 잔 게 아니라 아침부터 이드리쉬의 가슴을 주무르고 오는 거라고 말하려다가, 아이에게 하기엔 적절치 않은 것 같아 그냥 웃었다.
“그래, 로드리오는 의젓한 어린이니까.”
“나 어린이 아닌데.”
“그래, 그래.”
내 대답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기도 잠시, 로드리오는 고개를 내밀어 내 등 뒤를 기웃거렸다.
“뭘 보는 거야?”
“이드리쉬는 안 오나 해서.”
“아……. 이드리쉬가 오늘은 좀 바쁘대.”
사실 같이 오자고 했지만 거절한 거였다. 이드리쉬는 로드리오가 처음 깨어난 날 한 번 모습을 비춘 후로는 한 번도 로드리오를 찾아오지 않았다.
“아냐, 이드리쉬는 내 걱정 하나도 안 해서 안 오는 거야. 나한테 별로 관심이 없으니까.”
로드리오의 눈에 쓸쓸한 빛이 돌았다.
“그럴 리가. 이드리쉬 너 못 깨어날 때 얼마나 걱정했는데.”
“말도 안 돼. 이드리쉬가 내 걱정을?”
로드리오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눈에 슬그머니 기대하는 빛이 떠올랐다.
“진짠데?”
“정말?”
“그럼! 처음에 너 다쳤을 때, 널 이렇게 안아 들고 오는데 표정이 얼마나 슬퍼 보이던지. 눈물도 주룩주룩 흘렸어.”
눈물은 거짓말이다. 하지만 마음속으론 울고 있었을 테니 완전 거짓말은 아니다!
“하지만 깨어난 날을 생각해 보면 전혀 그렇지 않던데. 깨어나 잘했다고는 했지만 걱정했던 거 같진 않았어.”
“아냐, 내가 들었어. 매일 밤에 잠꼬대로 네 이름을 외쳤다니까. 로드리오! 오! 로드리오! 제발 깨어나!”
로드리오는 맑은 바닷물 같은 눈을 깜빡깜빡 감았다가 떴다.
작은 머리로 여러 가지 생각하는 듯했다. 그러다가 별안간 그의 입술이 꾹, 아래로 휘어졌다.
울음을 참는 건가?
“그렇구나. 사실 나, 나는 이드리쉬가 나를 그렇게 걱정하는지 몰랐어. 이드리쉬나 가주님이나 아무도 나는 신경 안 쓰니까, 그냥 내가 없어져도 상관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
로드리오는 어린아이답지 않게 조곤조곤하고 담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나한테는 로드리오의 상처와 실망, 그리고 체념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무슨 말이야. 테스밀리온 가주님도 마찬가지야. 어떻게 하면 내 금쪽같은 손주를 살릴 수 있겠나! 제발 살려 주게! 하고 의원한테 부탁했어.”
나는 나도 모르게 거짓말을 더 했다.
사실은 테스밀리온은 이드리쉬보다 더했는데, 처음 그가 다쳤을 때를 제외하곤 한 번도 보러 온 적도 없었다. 정말 너무하는 노인네다. 분명 처음 로드리오 쓰러져서 왔을 때만 해도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굴더니 말이야.
누가 이런 공격을 했는지만 중요하고 로드리오의 안위는 중요하지 않다는 거야 뭐야?
가끔 와서 유리창 너머 동물 구경하듯 보고 가는 이드리쉬나 테스밀리온이나 둘 다 똑같아!
‘내 동생! 내 손주!’
이런 말 좀 해 줄 법도 한데. 쌍으로 똑같이 무뚝뚝해선.
내 거짓말에 로드리오의 얼굴이 발그레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아픈 아기 기분이라도 좋게 해 줘야 얼른 낫지.
“그럼 왜 가주님은 나를 보러 오지 않을까? 벌써 깨어난 지도 며칠이 지났는데…….”
“그건 다 이유가 있어. 이드리쉬랑 테스밀리온이 나한테 솔직히 이야기했거든. 비밀인데 말해 줄까?”
“응!”
그래. 이왕 거짓말한 김에 아예 제대로 해 버려야겠다. 어차피 이드리쉬건 테스밀리온이건 안 오니 로드리오가 거짓말이라는 거 알 길도 없잖아?
“사실 로드리오한테 살아 줘서 고맙다. 사랑한다. 이렇게 말해야 하는데 너무너무 부끄러워서 말을 할 수가 없대. 그래서 나보고 대신 전해 달라고 했어. 로드리오야, 너는 우리의 보물이고…….”
“정말 내가 그랬나?”
마지막의 말은 로드리오가 한 게 아니었다. 말하다 말고, 등줄기에 소름이 돋아 나는 그대로 멈추어 섰다.
뒤를 도니, 어느새 이드리쉬가 와 있었다.
안 온다며? 왜 한창 거짓말하는 참에 나타나는 거야?
하지만 난 당당했다. 이게 다 네 동생을 위한 거야. 하얀 거짓말이라고, 아나?
나는 이제 막 방에 들어온 이드리쉬에게 눈을 부라렸다.
입 맞춰요! 가여운 로드리오 앞에서 내 말은 다 거짓이라고 하지 말고!
“뭐.”
이드리쉬는 나에게 퉁명스럽게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