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 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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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 프롤로그
2023.01.03.
[
마차 사고로 인해 모두 사망하였습니다.]
자정이 넘은 시간이었다. 홀로 집 안에 있던 나는 나에게 온 편지를 하염없이 읽었다.
창문 너머에는 굵은 빗줄기가 땅바닥을 매섭게 때리고 있었다. 깜깜했던 방이 매섭게 내리친 번개에 환해졌다가 다시 어두워졌다.
[사망하였습니다.]
문장을 한 번 더 곱씹어서야 실감이 났다. 모든 가족을 잃었다. 또한 거처를 잃었고, 가문을 잃었다. 비록 거처와 가문은 스스로 버렸다 해도 가족까지 죽음으로 떠밀 생각은 없었다.
“리제!”
누군가의 목소리가 아득히 들려왔다.
아무 생각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계단 밑으로 내려갔다. 밖에 있는 남자가 내 이름을 몇 번이나 부르며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까 말까 망설이다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문틈이 보이자마자 비에 젖은 남자가 날 자신의 품에 넣었다. 뛰어온 것인지 그의 숨이 거칠었다.
“……괜찮아? 아니,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라……. 너라도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야. 이기적이라 미안해. 미안해. 리제.”
그는 말을 더듬다가 나의 등을 쓰다듬었다. 그의 손짓보다는 맨살에 닿은 젖은 그의 옷이 더 신경 쓰였다.
“리제.”
“항상……. 아버지가 미웠지만 결코 그의 죽음을 원한 건 아니었어. 가족이 싫었지만 그렇다고 가족을 잃고 싶진 않았어. 난 그저…….”
“네 탓이 아니야.”
“……욕심 안 냈어. 아무것도 욕심내지 않았어. 욕심을 냈다 하면 그냥 가족. 가족을 원했어.”
“그럼……나랑 해. 나랑 가족을 만들고, 행복한 결말 만들자.”
남자의 손이 떨리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젠 아무것도 욕심내고 싶지 않았다.
* * *
가난했다. 나는.
정확히 말하자면 첫 번째 생이 그랬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나는 사이비 종교에 빠져든 엄마와 도박중독자 아빠 사이에서 자란 하나뿐인 딸이었다.
정상적인 가정이 아니었기에 삶도 평범하지 않았다.
돈 때문에 대학도 포기하고 부모도 포기했다. 그리고 돈 때문에 죽었다.
죽는 순간까지 어렸을 때부터 읽었던 「펜턴 가의 영웅」속 남자주인공 삶을 꿈꾸며, 다음 생에는 돈만 많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바란 건 아마 그뿐이었다.
돈. 수표.
근데 정말로 돈만 많을 뿐, 예전 삶보다 구차한 삶으로 태어날 줄은 누가 알았을까. 그것도 「펜턴 가의 영웅」속에 한 줄 정도 나오는 인물 삶으로.
“리제! 도대체 뭘 하는 거니?”
벌써 이 집구석에 지낸 것도 십 년째였다.
나는 내 손에 쥐어진 책을 가로채는 여성을 바라보았다.
“책을 읽고 있었어요.”
당연한 얘기를 또박또박 말했다. 이세벨은 내가 읽고 있었던 역학(疫學)책을 보더니 그대로 바닥에 던져두었다.
“리제, 내가 말했지. 책은 보지 말라고.”
음란물을 본 것도 아니고 폭력성이 가득한 책을 읽고 있는 것도 아닌데 유난이었다. 이세벨은 항상 그랬다.
여섯 명의 자식들 중 내가 가장 뛰어난 머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에 질투심을 느꼈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자식 중 나에게만 가정교사를 붙어두지 않았다.
결국 나는 나보다 한 살 많은 실케를 꼬드겼다.
‘너, 공부하기 싫지?’
‘당연한 걸 왜 물어?’
‘그럼 내가 대신해줄까?’
그녀는 유독 공부나 책을 싫어하는 아이였기에 말이 잘 통하였다. 우리는 주도면밀하게 계획을 짰고 육 개월간 나는 실케 대신 교육을 받았다.
처음에는 이를 달가워하지 않던 가정교사도 실케와 다르게 한 번에 자신 말을 알아듣는 나를 보며 열정적으로 가르쳤다.
근데 입이 가벼운 실케가 넷째이자 자신의 쌍둥이인 스웰에게 이 사실을 다 말한 거였다.
‘리이제.’
‘뭐야?’
‘공부하고 싶지? 그렇지?’
스웰은 자신의 수업도 내가 대신해줄 걸 요구했다. 마지못해 스웰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방에 들어갔을 때 가정교사는 역시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다음 날 그 가정교사는 이세벨에게 이 사실을 모두 고했다. 한순간에 나의 계획은 모두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그 이후, 그녀는 내가 조금이라도 책을 보면 바로 달려들었다.
“하지만 두 권 정도는 읽어도 된다고 하셨잖아요.”
“잘못 생각했다. 앞으로 한 달 간 책은 멀리 해!”
공부하다가 혼나는 건 이상한 경우이긴 했지만 이세벨의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다. 자신의 배에서 낳은 다섯 명의 자식들이 밖에서 주워온 남의 자식에게 밀리면 배가 아플 만도 했다.
사생아, 리제 마르센. 짙은 붉은 색의 곱슬머리에 노란색 눈동자.
윤락가에서 일했던 여자와 백작인 아버지 사이에 태어난 아이.
날 낳은 여자는 만약 날 백작 가의 딸로 키우지 않을 시 그동안 굴러다녔던 더러운 백작의 몸뚱이를 소문낼 거라며 엄포를 놓았다. 그 협박에 겁이 난 백작이 날 데려온 거였다.
“안 되겠다, 리제. 널 심부름 보내야지. 비티!”
이세벨은 나와 같이 심부름을 갈 하녀, 비티를 불렀다.
“마님, 부르셨어요?”
“리제와 같이 심부름 좀 다녀오렴. 창고에 있는 물건을 전해주기만 하면 돼.”
비티가 물건을 가지러 가기 위해 창고에 갔다 올 동안 나는 외출복을 입었다. 현관 밖으로 나오자 비티가 물건을 들고 뛰어왔다.
“어머, 또 혼자 입으셨어요? 아가씨?”
“넌 바쁘잖아. 그리고 옷 정도야, 혼자 입을 수 있어.”
“그래도 아가씨, 다음엔 혼자 하지 마시고 꼭 절 부르세요!”
“그래, 그래. 알겠어.”
저택 밖으로 나가자 비티가 뒤따라 나왔다. 정원을 뚫고 정문을 나서자마자 호샤 마을이 한눈에 보였다. 매번 열리는 장터의 모습과 함께 거리에 가득 찬 사람들이 있었다.
그와 달리 산 중턱에 있는 저택 옆은 울창한 나무가 즐비하게 있다. 심부름을 가기 위해선 언덕을 내려가 장터 쪽으로 향해야 했지만 내 발걸음은 옆으로 이동했다.
“아가씨! 리제 아가씨! 어디 가세요?”
당황한 비티가 황급히 날 불렀다. 애초에 곱게 심부름만 갈 생각이 아니었다.
내가 무작정 숲으로 달려가자 놀란 비티가 재빨리 날 따라왔다. 나무를 지나자 작은 호수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아직 겨울이라 얼어붙은 호수에는 물고기가 보이지 않았다.
호수 위에 얼어붙은 얼음의 두께를 가늠해보고 그 위를 올랐다. 한참을 미끄러운 호수에서 놀다 저 끝에 있는 꽃밭을 보았다.
형형색색으로 피어 있는 꽃들이 자신의 색을 자랑하고 있었다. 특히 겨울에만 핀다는 보라색 꽃이 나의 눈에 들어왔다.
“아가씨!”
“잠깐만! 조금만 구경하자!”
“잠,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날 애타게 부르는 비티의 말을 무시한 후 꽃밭으로 향해 달려갔다.
내 머리 높이까지 길게 핀 꽃을 헤치며 앞으로 갔다. 저 앞에 누군가 있는지 인기척이 느껴졌다. 몇 걸음 더 가자 한 가운데 앉아 있는 한 소년과 소녀를 발견할 수 있었다.
꽃과 잘 어울리는 은발이 햇빛을 받아 빛이 났다. 바다색보다 진한 청량한 푸른 눈동자는 나를 꿰뚫을 거만 같다. 인형 같은 두 모습에 나의 몸이 바짝 굳어졌다.
“어? 옆집 언니다!”
작은 소녀가 손가락으로 날 가리키며 말했다. 동시에 날 발견한 소년이 읽고 있던 책을 덮고 눈살을 찌푸렸다.
딱 봐도 내가 달갑지 않은 표정이다.
“가자, 유네.”
소년이 자리에 일어났다.
“왜? 난 더 있고 싶단 말이야!”
“어머니께서 빨리 오라고 하셨잖아.”
이렇게 저 둘은 마주 보는 건 처음이라 아연했다.
그렇다고 하여 저 둘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꽃밭 뒤에 있는 펜턴 가 공작저택을 보았다. 저곳은 내가 살고 있는 저택, 마르센 가와 이웃집이자 내가 빙의한 소설 「펜턴 가의 영웅」 주인공이 살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래, 지금 나를 매섭게 노려보는 저 어여쁜 소년이 남자주인공 유릭 펜턴이었다.
……언젠간 날 사형대에 올려놓을 사람.
마르센 가문과 펜턴 가문을 옛날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런 마르센 가문에는 비리가 가득했다.
그리고 훗날 펜턴 가문의 주인이 될 유릭이 그 비리를 밝혀 마르센 가문 사람들 모두를 사형대에 올려놓았다.
“가자, 유네.”
“싫단 말이야! 좀만 더 있자? 옆집 언니도 왔는데 응? 응?”
유네는 알까? 남자주인공인 유릭은 처음부터 마르센 가의 자식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멍청하기 짝이 없는 마르센 자식들을 볼 때마다 기분이 더러웠다.」
예전에 읽었던 서술이 기억났다.
껄끄러워 자리를 비키려 했는데 유릭 손에 있는 책이 내 앞에 툭 떨어졌다.
책이 떨어지자마자 우리 셋은 가만히 있었다.
작은 정적 속에 고개를 내려 펼쳐진 책을 보았다. 무슨 영웅담이나 자서전을 읽고 있을 줄 알았던 유릭은 동화책을 읽고 있었다.
그것도 예쁘장한 요정들이 가득 나오는. 그 책은 내가 두 살 때나 읽었던 거지 지금은 쳐다보지도 않은 책이었다.
‘아, 유네에게 읽어주려고 가져온 것일까?’
속 몰래 생각하고 있었다.
“어? 오빠가 가장 좋아하는 책인데!”
유네가 울먹이며 말했다.
“…….”
“…….”
책이 낡은 것으로 보아 한두 번 읽은 것도 아니었다.
나는 내 앞에 떨어진 책을 주워 흙을 탈탈 털어주었다. 그리고 유릭한테 내미는데 어느새 내 앞에 온 그가 잔뜩 붉어진 얼굴로 책을 낚아챘다.
책을 품에 넣은 유릭은 바로 등을 진 채 펜턴 저택으로 향했다. 동생 손을 꼭 잡고.
“옆집 언니!”
그때였다. 유네가 갑자기 날 불렀다.
“이름이, 이름이 뭐야?”
“……리제, 리제 마르센.”
“리제? 이름 예쁘다! 그럼 다음에 또 보자! 예쁜 언니!”
그녀는 활짝 웃으며 나에게 손을 크게 흔들어주었다. 나도 소심하게 손을 흔들었다.
갑작스러운 만남이었다. 정신이 멍해져 있을 때, 그동안 날 찾고 있었던 것인지 저 멀리서 비티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어디 계세요? 아가씨!”
“아…….”
나는 비티에게 달려갔다. 날 잃어버리는 줄만 알았던 비티는 거의 눈물을 터트릴 거 같은 상태로 서 있었다.
“아가씨를 잃어버리는 줄만 알고 얼마나 놀랐는데요!”
“미안해.”
“도대체 뭘 하고 계셨던 거예요?”
“그냥……. 마침 예쁜 꽃들이 있길래. 시간이 늦었다, 어머니한테 혼나기 전에 어서 마을로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