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2 # 호구는 싫은데요 (1) (2/47)


02 # 호구는 싫은데요 (1)
2023.01.06.



“마차는 준비됐니?”

이세벨은 기싸움이 가득한 공원에 가기 위해 아침부터 분주했다. 그 동행인으로 학교에 간 장녀 펠리시아와 차남 버나드를 제외한 쌍둥이 스웰과 실케가 준비하고 있었다.

귀족들이 공원에서 산책 하는 이유는 햇빛을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자신들의 경제능력을 뽐내는 것과 이런저런 가십거리를 듣기 위해서다.

그렇듯 호샤 마을에 살고 있는 부유한 귀족들이 평일 오후 자주 자식들을 데리고 공원에 나타났다.

그곳에서 귀족들은 다른 부인의 용모나 자식들의 생김새, 성격, 얼마큼 똑 부러지게 자랐는지를 확인했다. 가끔은 서로 입고 있는 드레스가 얼마나 비싼 것인지 가늠하기도 했다.


“네. 아, 그러고 보니 마님. 오늘 아침 저택 앞에 우편이 하나 왔어요.”

하인이 이세벨에게 보라색 봉투를 건넸다. 이세벨은 중요한 우편이 아니라고 판단했는지 시선을 돌려 장난치고 있는 스웰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저택에 돌아온 후 읽어 볼 테니 식당에 둬. ”

“……중요한 우편이기보다는 의외인 분이 우편을 보내셨어요.”

“의외? 누가?”

“키토 남작께서요.”

키토 남작이라는 말에 나도 모르게 보라색 봉투에 집중했다. 그 사람이라면 호샤 마을의 유명인사였다.


“키토 남작?”

이세벨도 놀라 되물었다.


“네, 마님.”

“내가 아는 그 키토 남작 말이니?”

“네. 체스 마스터인 키토 남작이요!”

“그분이? 갑자기 왜?”

이세벨은 호기심이 들었는지 바로 봉투를 뜯어 속을 보았다.

우두커니 서서 편지를 읽는 이세벨의 표정이 점차 굳어졌다. 좋지 않은 신호였다. 그 탓에 나는 바로 책으로 시선을 돌려 모른 척했다.


“……리제.”

빠르게 편지를 읽은 이세벨은 바로 나를 불렀다.


“리제!”

몰래 방으로 도망갈까 싶었지만 좋은 생각이 아님을 알아채고 자리에 일어났다. 이세벨의 심기가 더 불편하기 전에 그녀 앞에 가는 게 최선의 선택이었다.

일그러진 이세벨의 얼굴을 보며 손끝이 저림을 느꼈다.


“네.”

“최근에 심부름 갔을 때 말이다. 키토 남작을 만났니?”

그때라면 분명……. 펜턴 가의 유릭과 유네를 만나긴 했지만 그 외 만난 귀족은 없다.


“아니요.”

“거짓말하지 말렴.”

“정말이에요.”

“그럼 어째서 키토 남작이 널 아는 거지?”

나도 당황스럽기 마찬가지였다.

잠시 기억을 더듬어 유릭과 유네를 만난 후 바로 마을로 내려간 기억을 떠올렸다.

장터에 내려가자마자 이세벨이 내준 심부름을 처리했다.

그다음 시간이 좀 남아 장터 주변을 돌아다녔고……. 왁자지껄한 장터에 시선이 팔렸던 나는 곧 사람들이 몰려든 곳을 발견했다. 그곳에선 사람들이 체스를 두고 있었다.

[참가비 1금화. 이길 시 10금화를 줍니다.]

나무판에 큼지막하게 쓰여 있는 글씨를 읽었다. 8금화라니. 이곳을 구경하면서 내심 탐났던 만년필을 생각했다. 안 그래도 적지 않은 금액에 포기했어야 했는데 기회가 생긴 거였다.


‘제가, 제가 도전하겠어요!’

호시탐탐 체스보드를 보던 나는 긴 고민 하지 않고 1금화를 냈다.


‘정말로 도전하시겠어요?’

상대방이 묻자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의 틈에서 나와 자리에 앉은 나는 순식간에 나에게 몰린 시선을 눈치챘다.

내가 귀족이라는 이유로 구경하던 사람들은 괜한 소리를 하지 않고 있었지만, 고작 10세 소녀의 등장에 비웃는 듯한 분위기였다.

이러다 게임을 못하게 될까 냅다 폰부터 움직였다.


‘아가씨. 처음부터 폰을 이곳으로 옮기시다니 대담한데요?’

‘…….’

묵묵히 기물들을 움직였다. 오프닝이 안정적으로 진행되었다. 처음에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날 보던 관중들의 시선이 바뀌기도 했다. 미들게임으로 넘어가면서 대결은 더 흥미진진하게 이어졌다.

어느새 구경꾼은 훨씬 늘어났다. 소문을 듣고 저 멀리서 장터를 구경하던 이들도 왔다.


‘그리고 이겨서 만년필을 구입 했지.’

설마, 그 구경꾼들 사이에 키토 남작이 있었던 것일까.


“빨리 솔직히 말하렴.”

이세벨이 호통치자 고개를 저었다.


“전 그저 마을에서 체스 대결을 하고 있길래 한 번 해보았던 거뿐이에요.”

“…….”

이세벨은 할 말을 잃었는지 조용했다. 창백해진 그녀의 얼굴은 한동안 유지되었다.


“……앞으로 체스는 금지다.”

“네?”

“우리가 나가 있을 때도 체스는 금지야! 책도 읽지 말렴! 아니, 그냥 너도 우리랑 같이 가는 게 좋겠구나.”

“…….”

뭐 이런 경우가.


“뭐 하는 거니? 어서 준비하렴.”

“네? 정, 정말로……!”

“비티. 빨리 리제에게 드레스를 입히렴, 어서!”

내가 말을 잇기도 전에 이세벨은 하녀를 시켜 나를 씻겨냈다. 불과 십 분 만에 벌어진 일었다. 정신을 차릴 겨를도 없었다. 어느새 치장을 끝낸 나는 말끔한 모습으로 이세벨 앞에 섰다.


‘뭐야. 방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이세벨은 날 흘끗 보더니 문밖으로 나섰다. 정말로 가는 거야? 정말로?


“어머니, 정말로 리제를 데려갈 거예요?”

실케가 불만을 터트렸다.


“그렇단다.”

“그냥 저택에 있게 해요! 쟤가 체스 몇 번 둔다고 뭐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잖아요.”

“실케, 그 입 다물렴.”

“어머니!”

“시끄러워. 리제, 빨리 마차에 안 타고 뭐 하니?”

이세벨은 멍하니 서 있는 나를 지적했다.


“……네.”

뒤늦게 정신 차린 나는 마차에 올라탔다.

자리가 어색해 손을 꼼지락거리다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언덕을 내려가고 있는 우리의 마차 앞에 다른 마차가 있었다.

좀 멀찍이 떨어져 잘 보이지 않았지만 색깔이나 문양을 보아하니 펜턴 가의 마차였다.

곧 펜턴 마차 창문 밖으로 유네의 얼굴이 나왔다. 유네는 뭐가 그리 신나는지 펄쩍펄쩍 뛰며 미소를 짓고 있다.

그 옆에는 유네가 떨어질까 유네의 옷을 잡아끄는 유릭의 모습이 보였다.

설마 저들도 공원에 가는 건 아니겠지?


 

* * *

공원에는 양산을 쓰고 주변을 돌아다니는 여인이 많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다 어여쁜 드레스와 값비싼 것들을 착용하며 자신을 뽐내었다.

이세벨도 마찬가지였다.


“리제.”

이세벨은 자신을 졸졸 따라오는 날 불렀다.


“딴 곳에 가 있으렴. 대신 이 공원에서 벗어나지 말고.”

“딴 곳이요?”

“호수를 구경하는 게 어떻겠니? 거기서 잠을 자는 것도 괜찮고. 대신 누가 너에게 다가와 어느 가문이냐고 물으면 절대 마르센 얘기를 꺼내지 말아라.”

내 이럴 줄 알았지. 뒤에서 날 비웃는 스웰과 실케를 무시한 후 자리에서 벗어났다.

내가 자리를 비키자마자 이세벨은 바로 저 앞에 모여 있는 귀족 부인들에게 다가가 미소를 지었다. 고작 나에겐 감시하는 하녀 한 명만 두고 말이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비티가 물었다.


“공원에 벗어나지 말라니. 감금이야, 뭐야.”

“하지만 마님의 뜻을 어길 순 없어요.”

“알아. 괜히 어겼다간 나중에 큰코다칠 테니까 말이야.”

이세벨의 말대로 호숫가 근처로 가 낮잠이라도 자야겠다. 방향을 튼 나는 거침없이 넓은 공원을 걸었다.

꽉 조인 드레스가 불편해 몇 번 걸음을 멈추긴 했으나, 얼마 안 가 호수에 도착했다. 다행히 이곳은 적막하니 낮잠 자기 딱이었다.


“여기서 낮잠을 잘 테니, 시간이 되면 깨워줘.”

“걱정 마세요. 한 시간 후, 깨워드리면 되는 거죠?”

“응. 근데 깔개가 없네……. 혹시 사다 줄 수 있을까? 아까 공원 밖에 깔개를 파는 상인이 있는 거 같던데.”

“하지만 아가씨를 혼자 둘 순 없는걸요.”

“여기 꼼짝 않고 있을게. 부탁이야. 맨바닥에서 잘 순 없잖아?”

내가 애원하자 비티는 약간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곧 비티가 깔개를 사러 가기 위해 호숫가 밖으로 나갔다.

그녀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주위를 살핀 나는 근처 나무를 등받이 삼아 기대어 앉았다.

그리고 주머니를 뒤적거려 구겨진 종이를 꺼내었다. 아까 이세벨이 읽고 바닥에 버린 카토 남작의 편지였다. 저택 밖으로 나가기 전에 슬쩍 주워온 종이를 펼치려는 찰나,


“어?!”

저 멀리서 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서둘러 쥐고 있던 편지를 등 뒤로 숨겼다.


“옆집 언니다!”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유네 펜턴. 그리고 그 옆에는 아니꼬운 표정으로 날 쳐다보고 있는 남자주인공이 서 있었다.


 
설마 내 쪽으로 오는 건 아니겠지?


“안녕! 언니!”

아니나 다를까 유네가 환하게 웃으며 나에게 다가왔다.


“뭐 하는 거야? 빨리 와!”

유네는 가만히 서 있는 유릭과 하녀들을 보며 손짓했다. 꼼짝없이 유네와 합석할 거 같아 슬그머니 일어났다.


“…….”

“어디 가는 거야? 언니?”

유네가 호기심 가득한 순수한 눈망울로 물었다.


“그, 그게 자리가 불편한 거 같아서. ”

“자리? 편한데? 경치도 좋아!”

“난 딴 곳으로 가려고…….”

말없이 나를 쏘아보는 저 유릭의 시선을 피해서 말이지.


“그래? 그럼 나도 같이 가!”

“응?”

“나도 언니 옆에 있을래!”

유네의 고집이 쉽게 꺾이지 않았다.


“유네. 쟤는 너와 같이 있는 게 불편할지도 몰라.”

보다 못한 유릭이 입을 열었다. 그의 솔직한 말에 유네의 미소가 서서히 지워졌다. 이 틈에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는 찰나 유네가 날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정말로 내가 불편하냐고 묻는 듯한 시선이었다.


“언니, 내가 불편한 거야? 그래서 유네랑 같이 있기 싫어?”

“…….”

“진짜?”

제기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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