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 1장. 호구는 싫은데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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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 1장. 호구는 싫은데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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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 1장. 호구는 싫은데요 (2)
2023.01.10.
곤란했다. 이를 지켜보던 하녀들과 유릭은 내가 현명한 대답을 해주길 바라는 거 같았다. 문제는 그 대답이 유네가 바라는 대답이 아니라는 거다.
짧은 시간 내에 어떤 대답을 해야 하는지 생각했다.
“봐, 유네. 불편하니까 대답을 못…….”
“오빤 조용히 해!”
유네는 유릭의 말을 집어삼켰다. 당황한 유릭은 입술을 살짝 내밀 뿐 어떤 대꾸도 하지 못했다. 이를 바로 앞에서 목격한 나는 펜턴 가 남매 먹이사슬 구조를 빠르게 파악했다.
유네가 좀 더 위로구나!
“리제 언니. 이제 편하게 말해.”
“아니. 그게……넌 귀여운걸?”
유네가 바라는 대답을 내뱉은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역시! 오빠 말과 반대로 리제 언니는 내가 귀엽다고 하잖아. 오빠도 어서 여기 와서 앉아. 아, 그 전에 깔개부터 펴는 게 좋겠다!”
유네는 내가 찾은 자리에 깔개를 깔고선 그곳에 편안히 앉았다. 그 옆에서 내가 머뭇거리자 유네는 나의 손목을 억지로 붙잡고 자리에 앉히기까지 했다.
얼떨결에 유네의 옆에 자리를 잡게 되자 유릭의 표정이 굳어졌다.
“…….”
‘시선 한 번 살벌하구나.’
그는 내 존재가 여전히 아니꼬운 모양이었다. 자리에 앉지 않고 조용히 한숨을 푹 내쉬던 그는 발걸음을 옮겼다.
“난 주스 사 올게.”
“왜? 주스는 하녀한테 시키면 되잖아.”
“내가 가고 싶어서 그래.”
“그럼 유네는 오렌지주스! 언니는?”
유네가 날 쳐다보았다.
“난 필요 없는데…….”
“응? 거절하지 않아도 돼! 오빠가 사준댔어!”
그래서 더 거절하고 싶은 거였다.
흘끗 유릭의 눈치를 보자 그는 빨리 대답하라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나도 같은 거로.”
“……하아.”
유릭은 한숨을 크게 내뱉은 후 주스를 사러갔다. 그의 모습이 사라지자마자 유네는 그대로 뚱한 표정을 지었다.
“오빠는 항상 저래. 내가 누구와 친하게 지내면 항상 마음에 안 드는 눈치야. 설마 유네에게 친구가 없었으면 하는 건가?”
유릭의 행동 또한 납득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유네가 친하게 지낼 또래라고는 이 주위에 사는 귀족들뿐인데 유릭은 그들을 좋은 시선으로 보고 있지 않았다.
예전 유네가 동네 귀족들에게 심한 놀림을 받고 와서였다. 원작 내용을 생각해보면 유릭도 이때 즈음 학교에 다녔다가 금방 그만두었다.
수준 차이도 있었지만 허영심과 자만이 가득한 또래 아이들이 싫증 나서이기도 했다.
「다들 겉으로 포장할 뿐, 새까만 속을 드러내고 있지 않다. 이 마을에 그런 귀족들뿐이었다.」
그중 마르센 가문도 포함인 건 당연했다.
“언니? 무슨 생각해?”
“아,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오빠와 친해 보여서…….”
“언니도 형제가 많잖아? 엄마한테 들었는데, 언니네 가문엔 총 여섯 명의 형제가 있다며?”
유네는 그게 부러운지 형제 얘기를 해달라고 졸랐다.
“형제가 많으면 좋아? 어때?”
“좋다기보다는 시끌벅적해.”
그 형제들이 모두 유릭 같이 상냥하고 다정한 오빠였으면 천국을 드나드는 기분이겠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은 달랐다.
나를 못되게 놀리고 얄밉게 구는 형제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렇다 하여 그들이 날 대놓고 싫어하는 건 아니어서 미워할 수도 없었다.
그나마 서로 호감을 표시하는 형제가 있다면 현재 기숙사 학교에서 생활하고 있는 로드니가 전부였다.
“시끌벅적하면 좋지 않아?”
“꼭 좋은 건 아니야. 다 날 괴롭혀.”
“정말? 유네는 오빠한테 괴롭힘당한 적이 없는데! 오빠가 나에게 화를 낸 건……있지만 말이야.”
유릭도 가끔 화를 내나보구나.
“그래도 난 오빠가 좋아. 근데 오빠는 나중에 기숙사 학교에 들어가고 싶대.”
“기숙사 학교는 열네살부터 갈 수 있잖아.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는걸?”
“하지만 난 지금도, 이 년 뒤에도 오빠와 떨어져 있고 싶지 않아.”
불행하게도 소설의 내용에 따르면 유릭은 열네 살이 되자마자 유명 사립 기숙사 학교에서 지낸다.
그곳에서 생각이 맞는 새 친구들을 사귀고 지혜를 익히는 등, 유릭은 차후 그 시간을 소중하게 여겼다.
“만약 오빠가 정말로 기숙사 학교에 가게 되면 난 누구랑 놀지? 음……언니는 학교에 안 다닐 거야?”
“응.”
이세벨이 죽어도 안 보내주겠지.
“아, 그러고 보니 기숙사 학교는 공부를 잘해야 갈 수 있댔어. 언니는 공부를 못하는구나?”
“…….”
“그럼 언니, 나랑 놀자!”
“응?”
“내가 내 보물들도 보여줄게!”
하녀들이 큰 주머니를 들고 다가왔다. 그곳엔 여러 가지 장난감과 인형이 들어 있었다. 유네는 다 소중한 것들이라며 나에게 자랑했다.
“이건 뱀 모양 장난감이야!”
장난감들 형태와 모양이 다 심상치 않았다. 기괴하고 좀 으스스하기까지 했다.
예를 들면 유네의 손에 들려있는 목 잘린 허수아비 장난감이나 저주의 말이 쓰여 있는 주사위 같은 것들. 평범함과 거리가 멀어 보였다.
정상적인 것이 없나.
곧 큰 빨간색 리본이 머리에 달린 토끼 인형을 발견했다. 새하얗고 눈이 똥그라니 귀여운 것이 자꾸 시선이 갔다.
“……아, 그 인형? 귀엽지!”
“너랑 잘 어울려.”
“아니야! 그거 오빠가 가장 아끼는 인형이야!”
“……응?”
“맨날 어디 나갈 데 오빠가 가지고 다녀. 잠잘 때도 저 인형을 끌어안고 자기도 해.”
“누, 누가?”
“오빠가!”
잘못 들었나 싶었는데 유네가 다시 정확히 말했다. 나는 토끼 인형을 집어 그 모양새를 보았다. 몸통 안에 중요한 것들을 숨겨 놓은 건가.
“어? 오빠!”
주스가 든 잔을 받아 온 유릭이 저 멀리서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아무 생각 없이 우리를 보다가 곧 내 손에 들려있는 토끼 인형을 발견했다. 그가 눈에 띄게 동요한 것도 그때였다.
‘뭐, 뭐지?’
유릭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유릭이 다가오자 나의 몸이 바짝 굳어졌다.
“너, 너, 너 그 인형!”
그는 내 손에 쥔 인형을 가리켰다.
“응? 아……귀엽더라.”
“당연히 귀엽……아니, 그 인형을 왜 네가 들고 있어?”
“아, 미안. 소중한 거랬지?”
머쓱한 나머지 인형을 그에게 넘겨주자 유릭은 잔 하나를 놓아버렸다. 잔에 담긴 주스가 내 치마에 스며들었다. 맨살에 진득한 액체가 닿자 나도 모르게 자리에 벌떡 일어났다.
“오빠, 뭐 하는 거야? 언니 드레스가 다 젖었잖아!”
“유네! 너 마르센한테 무슨 말을 한 거야?”
“응? 그냥 이 토끼 인형, 오빠가 아끼는 거라고 했는데?”
급한 대로 손수건을 꺼내 드레스에 묻은 주스를 닦았다. 드레스가 젖은 걸 알면 이세벨이 분명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안 그래도 색이 연한 드레스라 오렌지의 뚜렷한 색조가 선명하게 물들었다.
곤란한 나와 달리 유릭은 드레스에 관심조차 없었다. 오히려 자신의 옷에 주스가 쏟아진 양 불쾌한 듯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제기랄, 왜 하필 마르센 가의 놈과 얽혀서.”
유릭은 작게 중얼거렸지만 생각보다 잘 들렸다. 정말로 화가 난 듯한 그의 어조에 나는 억울했다.
내가 한 것이라곤 유네와 몇 마디 나눈 거뿐이었다. 그러다 그가 쏟은 주스에 드레스가 엉망이 되어버렸고.
“저기, 인형을 함부로 만진 건 미안해. 하지만…….”
“왜 이 공원에 혼자 다니는 거지? 평소처럼 마르센 가문 사람들과 몰려다니지 않고.”
“몰려다닌다니. 그건 맞지만 그래도 말이 좀…….”
“틀린 말은 아니잖아.”
“오빠, 도대체 왜 그래? 오빠 때문에 언니의 드레스가 젖었잖아! 사과해야지!”
적어도 유네는 내 편이었다. 그녀가 유릭을 톡 쏘아보며 한마디 하자 그제야 유릭은 젖은 나의 드레스를 바라본다.
생각보다 많이 더럽혀진 드레스에 유릭은 잠시 말이 없더니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그래, 드레스를 적신 건 미안해.”
고집을 부릴 줄 알았던 유릭은 쉽게 인정하고 사과했다. 나도 더 그와 다투고 쉽지 않아 그냥 넘어가려 했다.
“하지만 그걸로 유난 떨지 말았으면 좋겠어.”
“……뭐?”
이 뒷말만 빼면 모든 게 완벽했을 텐데.
‘내가 언제 유난을 떨었다고.’
화가 났다. 아무리 내가 한때 좋아했던 남자주인공이라 하더라도 나에게 무례한 건 참을 수 없었다.
유릭은 내 드레스 보다 자신의 토끼 인형이 더 신경 쓰이는지 그곳에 시선을 자꾸만 둔다.
정말로 저 인형 안에 금은 보따리를 숨겼나?
말로 해봤자 실랑이만 벌일 거 같았다. 나는 주스가 담긴 다른 잔을 발견했다. 그 잔을 집어 남은 주스를 내 드레스에 완전히 부었다.
이목을 끌기 충분한 행동이었다. 나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유릭도 유네도 말을 잃었다.
“……무, 무슨 짓을.”
“드레스가 완전히 엉망이 됐네. 그렇지?”
“……뭐?”
“그러니까 유난 좀 떨어도 되지?”
유릭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치며 입을 열었다.
내 행동은 예상치도 못했는지 조잘조잘 떠들었던 유릭의 입이 다물어졌다.
“…….”
“…….”
분위기가 조용해졌다. 너무 과했나 싶었는데 유네가 손수건을 꺼내 내 드레스를 닦았다. 탁한 회색 색깔에 해골 모양의 로고가 그려진 독특한 손수건이 눈에 들어왔다.
“이게 뭐야. 언니, 안 불편해? 끈적끈적할 거 같아! 난 그런 거 딱 질색인데.”
화가 난 줄 알았던 유네는 다행히 날 걱정하고 있었다.
“괜찮아. 유네.”
“내가 안 괜찮아!”
내가 말려보아도 유네의 손은 여전히 나의 드레스를 문질렀다. 뒤늦게 정신 차리고 유네를 돕는 하녀들의 손도 분주해졌다.
정작 나를 도발한 유릭만이 우두커니 서서 상황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
“오빠! 도대체 뭐 하는 거야? 닦지 않고!”
보다 못한 유네가 한마디 하자 유릭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그는 자신의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주섬주섬 꺼냈다. 예쁜 노란색에 귀여운 토끼 그림이 그려진 손수건이었다.
유릭은 손수건을 꺼내 놓고 아차, 하며 바로 손을 뒤로 뺐다.
“언니, 안 축축해?”
“정말로 괜찮아.”
“아니야! 난 이렇게 드레스가 젖으면 속상한걸?”
“그래? 난 딱히…….”
슬그머니 유릭의 눈치를 보았다. 고민 끝에 유릭은 내 드레스를 닦아주기로 결심했는지 나에게 다가왔다.
“아이 참, 오빠! 왜 이리 답답하게 구는 거야?”
“뭐, 뭐……!”
“내가 드레스 밑을 닦을 테니까 오빠는 여기, 위를 닦아!”
유네는 답답했는지 머뭇거리는 유릭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녀는 유릭의 손을 내 가슴 쪽으로 끌어당겼다.
나 또한 당황했다. 그의 손이 내 가슴에 닿으면 서로 어색해질 게 뻔했다.
다행히 가슴에 닿기 전, 유릭이 손수건을 떨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