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 1장. 호구는 싫은데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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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 1장. 호구는 싫은데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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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 1장. 호구는 싫은데요 (3)
2023.01.13.
“오빠!”
“아…….”
유릭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어졌다. 더 민망해지기 전 나는 유릭 대신 내 앞에 떨어진 손수건을 주워다 건네주려 했다.
“아가씨!”
깔개를 사러 간 비티가 온 것인지 그녀의 목소리가 저 멀리서 들렸다. 어색한 분위기를 빠져나갈 수 있는 기회였다.
반가운 마음에 나도 모르게 웃으며 비티를 보는데, 그녀 옆에 원치 않던 동행자 두 명이 있었다.
쌍둥이 남매, 스웰과 실케였다.
‘왜 같이 오는 거야?’
“여기 있었구나, 리제!”
“찾고 있었잖아.”
내 앞에 도착한 스웰과 실케가 불만스러운 투로 말했다. 먼저 날 무리에서 떨어트린 건 자기들인데, 이제 와 왜 혼자 있었냐고 투덜거린다.
억울했지만 지금은 쌍둥이들을 데리고 이 자리에서 벗어나는 게 더 시급했다. 사고만 몰고 다니는 이들과 펜턴 가의 남매가 마주쳐서 좋을 건 없다.
“드레스 닦아준 건 고마워. 이제 난 가볼게.”
“어디 가는 거야? 나랑 놀면 안 돼? 아직 드레스도 다 닦지 않았잖아.”
유네가 끝까지 내 드레스 밑자락을 붙잡았다. 이럴 줄 알았다면 아까 유릭이 가라고 눈치를 줄 때 가는 거였는데.
이도 저도 하지 못하자 이상하게 생각한 스웰과 실케가 유네를 쳐다보았다. 셋의 시선이 마주쳤다.
서로 못 알아보길 바랐지만 점차 일그러지는 쌍둥이의 표정을 보아하니 이미 틀린 거 같다.
“너 여태까지 펜턴 가문 녀석들과 놀고 있었던 거야? 리제!”
“이 배신자!”
바로 쌍둥이들의 비난이 날아왔다.
“어? 리제 언니의 오빠 언니다.”
심지어 유네도 그 둘을 알아보았다. 유네의 말 한마디에 쌍둥이들은 그녀를 무섭게 쏘아보았다. 시선의 의미를 모른 채 유네가 눈만 깜빡거리자 유릭이 그녀의 앞을 막았다.
묘한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이런 큰일났다.
“이, 이제 가야겠다. 그치?”
펜턴 남매와 쌍둥이들이 싸우기 전 어떻게든 장소에 벗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쌍둥이들은 꿈쩍도 하지 않고 유릭, 유네와 눈싸움을 했다. 평소 지기 싫어하던 쌍둥이의 성격이 지금 여기서 나왔다.
근데 그 성격은 쌍둥이뿐만 아니라 펜턴 가 남매에게도 해당하는 모양이었다. 그 둘도 절대 먼저 시선을 거둘 생각 하지 않았다.
“너희 설마 내 동생을 괴롭히고 있던 건 아니겠지?”
침묵 끝에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스웰이었다. 언제부터 네가 나를 ‘내 동생’이라며 친근하게 불렀니.
“안 괴롭혔어. 그러니까 이제 가자. 어머니께선 어디 계셔?”
“비켜봐, 리제. 이러니까 더 수상하잖아.”
빨리 상황을 피하려던 나의 행동 때문에 스웰이 의심했다. 실케도 뭔가 단단히 오해했는지 펜턴 남매에게서 내 앞을 가로막았다.
“우린 네 동생한테 아무 짓도 안 했어.”
유릭이 단호하게 말했다. 낮은 어조에 쌍둥이들이 잠깐 움찔했다. 유릭의 기에 눌린 건지 그들은 한동안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그, 그럼 내 동생 몰골이 이게 뭔데?”
“이건 실수로 주스를…….”
“일부로 주스를 쏟은 거겠지!”
쌍둥이들은 되지도 않은 억지를 부리고 있었다.
그들에게 펜턴 가의 남매들이 날 괴롭혔는지 괴롭히지 않았는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방금 유릭의 기에 눌려버린 자신들의 행동을 만회하고 싶은 거다.
“……하아.”
한숨을 내쉬는 유릭도 이를 눈치챈 거 같았다.
“정말로 실수로 쏟은 거야! 그래서 닦아주려고 했을 뿐이라고!”
그와 달리 눈치채지 못한 유네는 억울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쌍둥이들도 질세라 더 목소리를 크게 올렸다.
스웰과 실케는 자신들의 기가 눌리는 건 창피해도 고작 여덟 살 아이를 두 명이서 상대하는 건 창피하지 않은 모양이다.
머리가 지끈 아팠다. 잠시 숨을 돌리기 위해 그들에게서 시선을 피하는데 유릭과 눈이 마주쳤다.
그에게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거 같았다. 근데 마땅히 할 말이 없다.
결국 멋쩍은 미소를 살짝 짓자 유릭은 시선을 피했다.
‘안 되겠다.’
다시 쌍둥이들을 말리려고 했는데 내 앞에 무언가 툭 하고 떨어졌다.
유릭의 손수건이었다.
내 드레스 자락에 붙어 있던 것이 힘을 잃고 떨어진 거다.
“뭐야, 이건.”
모르고 그 손수건을 밟아버린 스웰이 눈살을 찌푸렸다.
“내건 아닌데, 아…….”
그는 손수건을 한 번 보다가 씩 웃었다. 이 불길한 예감은 뭘까.
“펜턴 가문은 이런 걸 좋아하는 모양이지? 저 인형도 그렇고 말이야.”
스웰은 어쩜 내 예상에 빗나가지 않은 행동만 할까.
그는 싸늘해지는 유릭의 표정을 보고선 어깨를 으쓱했다. 분명 자신의 말이 펜턴 가문 남매들의 약점을 저격했다고 생각할 터다.
“우리 마르센 가는 이런 유치한 것에 이미 졸업했다고. 펜턴 가문의 수준을 알만하네.”
그걸 또 비꼬는 네가 더 유치한데…….
“우, 우리 오빠를 욕하지 마!”
“……뭐?”
화가 난 유네가 말을 더듬었다. 그러자 스웰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유네.”
유릭은 유네의 팔을 끌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스웰과 실케는 펜턴 남매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설마 이 손수건…….”
스웰과 실케는 하필이면 이럴 때에 눈치를 발동했다. 하필 지금……. 일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그 눈치를.
“……말 안 하려 했는데 이 손수건 내 거야.”
그래서 내가 말했다. 나는 스웰 발에 밟힌 손수건을 쥐어 가슴 폭에 넣었다.
“뭐?”
“거짓말! 우리가 네 취향을 모를 거 같아?”
스웰과 실케는 믿을 수 없다며 말했다.
“좋아하는 게 뭐가 나빠? 난 노란색을 좋아해. 또 귀여운 캐릭터들도 좋아하고.”
“…….”
“사실 처음부터 내 거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언니 오빠가 손수건 가지고 가문을 욕하잖아.”
그 때문에 미리 말할 수 없었지.
스웰과 실케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손수건 하나로 가문의 수준을 운운했던 스웰의 표정은 더 하얗게 질렸다.
결론적으로 그는 자신 가문 수준을 얕보고 있던 거였다.
졸지에 입술을 다문 쌍둥이들은 멍청하게 서 있었다.
“……아까 한 말은 진심이 아니었…….”
“…….”
“귀여운 걸 좋아하는 건 가문과 아무런 연관이…….”
“가자, 어머니께서 기다리실 거야.”
스웰이 비겁한 변명을 하기 전, 나는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내 말에 이 상황을 빨리 벗어나고픈 쌍둥이들이 그대로 발걸음을 뗐다.
호수를 벗어나가기 전 나는 마지막으로 유릭과 유네를 바라보았다.
얼빠진 표정으로 서 있는 유릭의 얼굴이 내 눈에 들어왔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읽을 수 없었다.
* * *
저택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스웰과 실케는 날 무섭게 노려보았다.
“왜 처음부터 그 손수건이 네 거라고 말 안 한 거야?”
스웰이 결국 한소리 했다. 또박또박 대답해도 실랑이를 벌일 게 뻔해 입을 다물었다.
“무시하는 것 좀 봐! 그리고 너 드레스가 왜 그래?”
이건 좀 겁이 났다. 평소와 다른 비싼 드레스를 주스로 더럽혔으니 이세벨이 분명 뭐라고 할 거였다.
‘설마 내 옷장에 있는 드레스를 다 빼앗는 건 아니겠지?’
불안한 마음에 이세벨을 보았다. 나를 혼내 킬 거라고 생각한 것과 달리 이세벨은 창밖을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차를 타기 전부터 느꼈지만 이세벨은 오늘 아침과 달리 생각에 잠겨 있었다.
“어머니!”
스웰이 이세벨을 부르자 그녀가 그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마차에서만이라도 조용해질 수 없겠니?”
“…….”
이세벨의 한마디에 조용해졌다.
저택에 돌아온 뒤에도 이세벨은 곧장 제 방으로 들어갔다. 이상하다 싶어 나는 바로 창고로 가려는 비티를 붙잡았다.
“어머니께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그러고 보니 왜 스웰하고 실케는 어머니와 계속 있지 않고 나한테 온 거야?”
“아……저도 잘 모르겠지만 마님께서 예전에 아시는 분을 만나신 모양이에요.”
“아시는 분?”
“네. 대학교수라고 들었어요. 나이는 좀 있으신 남성이었고요. 어떻게 마님과 알고 있는지는 저도 모르겠지만요.”
비티는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창고로 들어갔다. 대학교수라…….
이세벨이 대학교수를 친분을 쌓을 때가 있었나? 살짝 찝찝한 기분으로 방 안으로 들어서자 힘이 쭈욱 빠졌다.
‘우선 이세벨의 눈에 걸리기 전에 드레스를 빨아야겠다.’
대충 드레스를 벗는데 뭔가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
“……아, 맞다.”
유릭의 토끼 손수건이었다.
‘빨아서 주는 게 낫겠지.’
드레스와 같이 손수건을 빨래통에 넣으려다 멈칫했다.
괜히 빨래통에 넣었다가 펠리시아에게까지 들킨다면 골치 아파질 게 뻔했다. 그녀는 쌍둥이와 다르게 눈치가 상당히 좋으니까.
귀찮지만 내가 따로 빨아야지.
문제는 이 손수건을 어떻게 유릭에게 전달할 건가였는데, 고민 끝에 우체부를 통해 전달하기로 결정했다.
생각을 끝낸 후 손수건을 빨아 급하게 말렸다.
이대로 보내려 하다 나는 공원에서 보았던 유릭의 표정이 떠올랐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그 시선. 만약 나에게 화가 난 것이라면 좀 풀어주는 게 좋지 않을까?
[손수건 돌려줄게. 그리고 공원에 있었던 일은 내가 과했던 거 같아, 미안해. -리제 마르센이.- ]
편지를 손수건을 포장한 포장지 안에 넣은 후, 우체부가 오는 날 저택 사람들 몰래 건네주었다.
부디 그의 기분이 좀 풀렸으면 했는데…….
“…….”
“…….”
그로부터 일주일 뒤, 다시 유릭 펜턴과 마주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