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 1장. 호구는 싫은데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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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 1장. 호구는 싫은데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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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 1장. 호구는 싫은데요 (4)
2023.01.17.
우연이었다.
심부름을 위해 마을로 내려갔다가 유릭과 단둘이 만난 건.
오늘은 평소보다 장터에 사람이 많아 걷기 불편했다. 안 그래도 몸이 조그만 탓에 하녀들과 자주 길이 엇갈렸다.
‘언제오려나.’
하녀들과 길이 엇갈린 지 십 분 정도 지났다. 나는 어디선가에서 날 애타게 찾고 있을 하녀들을 위해 펑 트인 광장 분수대에 앉았다.
“……안녕?”
“…….”
그곳에서 유릭을 만난 거였다. 그는 도서관에 다녀왔는지 손에 책이 들려 있었다. 제 나이답지 않게 꽤 어려운 공식집이었다.
‘근데 하녀가 없네?’
그도 동행한 하녀와 길이 엇갈렸는지 분수대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도련님, 어디 계세요!”
그때, 누군가를 애타게 부르는 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얼핏 들으니 유릭 도련님이라 부르는 거 같다.
“……음, 저기 저 사람이 널 찾고 있는 거 같은데?”
하녀의 모습이 점점 시야에 사라지자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릭은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고 앉아 있다.
아직도 화가 안 풀린 걸까? 저번 일로 어색해 시선을 마주치기 껄끄러웠다.
“……이름이 리제라고 했지.”
“맞아.”
그는 내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지 입을 열었다.
“손수건은 잘 받았어. 굳이 주지 않아도 되는데.”
“아끼는 물건인 거 같아서.”
“아니!”
그의 큰소리에 놀라 몸을 움츠렸다. 조금 그늘진 유릭의 얼굴을 보아하니 무슨 일이 있는 거 같다.
“……그깟 토끼 손수건. 아끼는 거 아니야. 내가 그런 유치한 것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
“그게 무슨 상관이야? 설마 저번 스웰 말을 신경 쓰이는 거야?”
“…….”
“걔 말은 무시해. 말은 그렇게 했지만 걔도 귀여운 거 좋아하고 그래.”
유릭은 조용히 있었다. 다시 분위기가 어색해지자 무슨 할 말이 없을까 곰곰이 생각했다.
나는 그의 시선이 있는 책을 물끄러미 보았다. 저 책은 물리학 공식의 필독서라 할 수 있었다. 나름 귀족들 간에서 유명한 책이라, 마르센 가에서도 당연히 있었다.
“그 책 우리 저택에도 있어.”
어색함을 풀기 위해 말을 던졌는데 유릭은 반응이 없다.
“시리즈도 다 있어.”
“…….”
“너도 읽어봐서 알 테지만 정말 어렵지 않아? 난 시리즈를 중간에 읽다 포기했어. 그리고 저 책과 동일 저자인 다른 책도 읽어 봤어? 그건 정말 난해하더라.”
내가 아무리 떠들어도 유릭은 입을 열지 않았다.
책이 공감대 같은데 통하지 않으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그래서 나는 요즘 또래 사이에서 유명한 「길버트의 영웅담」 줄거리를 늘어놓았다.
“마지막에 길버트가 어머니를 구하는 서술은 정말 멋지지 않았어?”
아마 이건 먹힐 거다. 이 책을 읽지 않은 아이는 없을 테니까!
“……그 책 안 읽었어.”
“뭐? 그 유명한 책을?”
“처음 듣는데.”
유릭이 귀여운 것을 좋아하는 것보다 이게 더 놀랐다.
“너, 혹시 책 읽는 거 싫어해?”
내가 묻자 유릭은 거짓말을 들킨 사람처럼 화들짝 놀랐다.
“뭐?”
“아니, 그냥……. 「길버트의 영웅담」을 읽지 않았다고 해서.”
“그게 그렇게 유명한 책이야?”
정말로 책을 좋아하지 않구나.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얼굴이 창백해진 유릭은 내 시선을 피했다.
그는 약간 중얼거리듯이 ‘그럼 이제부터 읽어야 겠네’라고 말했다.
“정말 책을 안 좋아하는 구나.”
“……사실은 책보다 검술을 좋아해.”
유릭은 들킨 마당에 내가 묻지도 않은 걸 털어놓았다.
“정말?”
그 사실에 조금 놀랐다. 펜턴 가는 무역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가문이지 검술 쪽에는 거의 접점이 없었다.
원작에 따르면 후에 유릭도 가문의 후계자가 되어 무역 회사를 이어받을 거였다.
그것뿐인가. 그는 후계자 역할을 그 누구보다 완벽하게 해낼 인물이다. 제국의 무역은 물론 온 세계의 무역과 문화 교류를 활발하게 제동시키는 인물 아닌가.
“검을 휘두르는 거 멋지지 않아?”
“멋지긴 하지.”
“왜? 설마 나랑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 거야?”
유릭이 묻자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정말로 의외였다. 원작에서 유릭은 간단한 호신술과 체술을 익혀두긴 했지만 거의 쓸 일이 없다고 서술되었다.
“설, 설마. 잘 어울려.”
“넌 책을 좋아해?”
“으응. 하루에 세 권을 읽은 적도 있어. 그나마 책을 읽으면 지루하지 않달까.”
내가 말하자 유릭은 자신이 쥐고 있던 책을 내밀었다.
“이 책도?”
“이미 두 번 정도 읽었는걸?”
“…….”
내 대답에 유릭은 머뭇거렸다.
“……그럼 36페이지에 있는 내용 좀 알려줄 수 있어? 도서관에서 몇 번이나 읽어보았지만 이해가 안 돼서.”
“한 번 보여줘.”
유릭은 곧장 36페이지를 펼쳤다.
“아, 이거.”
나는 그에게 설명하기 위해 유릭 옆에 가까이 몸을 붙었다.
“알아?”
“응. 이거 은근 쉬워. 미분과 연관된 건데…….”
내 말에 집중하는 유릭은 모르는 것이 있을 때마다 나에게 물어보았다. 아무리 책을 싫어한다 하더라도 유릭은 빠른 이해력과 타고난 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쉽게 내용을 습득한 뒤 응용까지 했다.
“그래, 그거야.”
“그럼 이 공식의 활용은 어떻게 하는 거야?”
“아, 이것도 아까와 크게 다르지 않아.”
어느새 들뜬 나는 유릭이 물어보지 않은 거까지 설명해 주었다. 내가 흥분했음을 알아챈 건 유릭이 책이 아닌 날 빤히 보고 있어서였다.
“아, 미안. 내가 과했지?”
“아니, 책을 정말로 좋아하는구나 싶어서.”
“응. 근데 부모님은 못 읽게 하셔. 어렸을 때부터 이런 책 읽으면 정서에 좋지 않다나 뭐라나. 사실은 막내인 내가 다른 형제들보다 책을 좋아해서 눈엣가시인 거겠지만.”
“책을 못 읽게 한다고?”
그는 충격받았는지 눈이 똥그래졌다.
“최근에는 한 달에 다섯 권 정도 읽게 해주시는데, 그 이상은 절대 안 된대. 만약 읽으면 또 내 앞에서 책을 치워버리겠지.”
“왜? 마르센 가문은 토지사업을 하고 있잖아. 책을 많이 읽으면 분명 도움이 될 텐데.”
“그러게.”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나는 억지로 책을 읽어야만 해. 할아버지가 엄하시거든. 장남인 내가 가문을 이으려면 책을 많이 읽고 똑똑해야 한대.”
“우리 부모랑 완전히 다르구나. 우리 저택이 돈이 많긴 하지만 나한테 단 한 푼도 투자하지 않아.”
“할아버지는 나한테 모든 걸 투자하시지. 이 책을 빌린 것도, 최근에 할아버지가 저택에 와서야. 책이 한 권도 없는 내 방을 보고 경악하시더니, 당장이라도 도서관에 가라고 하시더라고.”
“그렇구나.”
“내가 도서관에 있을 동안 할아버지는 고용인을 시켜서 아마 서점에 있는 책들을 다 사 오실 거야. 내일이면 도착할 걸?”
원작에서 등장하는 유릭의 할아버지를 떠올렸다. 등장한다 해도 문장 몇 줄이 다여서 성격이 어떤지 어떤 생김새를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근데 이리 엄한 분이셨다니.
이제야 왜 유릭이 자신의 취향을 숨기고 다니는지 이해 갔다.
“사실 난 똑똑하고 지혜로운 면보다 너의 새로운 면이 더 좋은데.”
“……뭐?”
책 속에 등장하는 유릭 펜턴은 완벽했다. 모든 사건을 해결했고, 모든 위기를 헤쳐갔다. 콤플렉스도 결점도 없었다.
그에게 이런 고민이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심지어 좋아하는 것도 원작과 달랐다. 그 때문인가 책의 주인공이기에 멀게 느껴졌던 유릭이 조금 정이 느껴졌다.
솔직히 말해서 다른 인물 같기도 했다.
“귀여운 걸 좋아하면 어때? 난 그런 네 모습 싫지 않아.”
“……무슨 소리야.”
“아, 물론 너는 그런 너의 면을 들키기 싫어하니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게. 정말이야!”
또 기분이 나빠진 건 아닐까 유릭의 얼굴을 살폈다. 예상과 달리 유릭의 얼굴은 홍당무처럼 새빨개져 있었다.
아까 나와 눈이 마주쳐도 아무렇지 않던 그가 이제는 당황하는 게 보였다.
“……그래.”
“…….”
“말, 말하지만 마.”
다시 분위기가 조용해졌다. 이제 슬슬 비티가 날 찾을 때도 되었는데…….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나는 저 멀리서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이제 가봐야 할 거 같아.”
“저기!”
“응?”
내가 발걸음을 옮기려 할 때, 유릭이 날 불렀다.
“공원에 있었던 일은 내가 미안해. 말이 심했어.”
그는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나에게 사과했다.
“계속 사과하고 싶었어.”
“…….”
“정말 미안해.”
그의 갑작스러운 사과에 당황했다. 솔직히 말해서 그때의 일은 그냥 자연스레 넘어갈 줄 알았다.
‘정말로 다르네.’
원작에서 유릭이 누군가에게 사과하는 일은 보지 못했으니까. 워낙 성격이 무뚝뚝해 사과를 하더라도 다른 식으로 표현했다.
“그래, 그럼 서로 사과했으니까 그 일은 이제 잊자.”
“…….”
“대신 서로의 비밀도 지켜주는 거야. 나는 여기서 몰래 책을 읽었다는 걸 들키면 안 되고 넌……이것저것 들키면 안 되니까 말이야. 알겠지?”
내가 말하자 유릭의 얼굴이 환해졌다.
“당연하지.”
“그럼 안녕!”
광장을 벗어나기 전 마지막으로 분수대에 멍하니 앉아 있는 유릭의 얼굴을 보았다.
저번 공원에서 유릭을 마지막으로 보았을 땐, 그의 표정이 신경 쓰였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저히 감을 잡을 수 없었을 그때와 달리 유릭은 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래놓고선 창피한지 금세 손을 내려놓은 모습이 좀 우스꽝스러웠지만 상관없었다.
* * *
「펜턴 가, 장남.
유릭이 평소 마르센 가문을 눈여겨본 이유는 그 가문의 막내딸 때문이었다.
이름은 리제 마르센. 여섯째 중, 형제들과 다른 모습을 한 그녀는 딱 봐도 다른 여자의 배 속에서 낳은 아이임을 알 수 있었다.
빨간색 머리에 노란색 눈동자.
얼굴만 보면 다른 자식들과 차별이 될 정도로 꽤 예쁘장하게 생겼다. 그 미모 때문인지 마르센 가문이 그 아이를 숨기려 해도 다른 가문의 사내들에게서 다 소문이 났다.
그와 달리 그녀는 사내들에게 관심이 없었다. 말수도 적었고, 무표정한 얼굴에 밖에 잘 드러나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런 리제 마르센이 안타까워 유릭은 그녀에게 동정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그녀를 만나는 건 항상 의외인 곳이었다. 언덕 갈대밭이나 공원, 마을 광장 등등. 그곳에서 유릭은 실수로 차마 다른 이에게 말할 수 없는 비밀을 들킨 적이 있었다.
겁을 먹은 유릭과 달리 그녀는 변함이 없었다. 여전히 무표정했다.
그럼에도 유릭은 그녀가 자신의 비밀을 소문내는 건 아닐까 걱정했다. 그리고 어느 날 그 걱정이 괜한 짓이었음을 알려주는 짧은 편지가 왔다. 리제 마르센에게서 온 편지였다.
유릭은 그녀에게 심한 말은 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녀의 사과에 그의 마음이 덩달아 무거워졌다.
자신이 그녀에게 한 말들을 되짚어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싫어하는 사람들처럼 그녀를 겉으로만 판단해 버렸다.
‘……안녕?’
얼마 안 가 그녀와 단둘이 마주쳤을 때, 유릭은 조금 깨달았다. 그녀는 그가 생각했던 것과 다른 사람이었고 생각보다 활발하고 재미있는 아이였다.
또한 리제 마르센은 유릭이 가지고 싶은 점을 다 가지고 있었다.
그때부터 유릭의 가슴이 리제를 볼 때면 조금씩 뛰기 시작했다.」
* * *
마르센 저택의 저녁은 조용했다.
자신의 침대에 누워 있던 이세벨은 자신의 옆에 빈자리를 보았다. 잠이 오지 않았다. 조심스레 일어난 그녀는 아직 꺼지지 않은 등불을 가지고 창문 쪽으로 이동했다.
저번에 공원에서 만났던 지인이 떠올랐다.
십 년 정도 보지 못했던 지인은 생각보다 꽤 늙고 건강이 쇠약해져 있었다. 몸이 괜찮냐는 자신의 말을 회피하긴 했지만 어떤 병세가 있는 게 확실했다.
‘이세벨. 너도 잊지 못하고 있잖니?’
‘전 결혼했어요.’
‘상관없단다. 너도 잘 알잖아.’
이세벨은 자신의 얼굴을 꿰뚫어 보며 담담한 어조로 말하던 지인의 말을 계속 생각했다.
‘그러니 돌아오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