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6 # 2장. 이세벨과 리제 (1) (6/47)


06 # 2장. 이세벨과 리제 (1)
2023.01.20.



‘나는 있잖아, 보하야. 다른 거 다 필요 없어. 그저 우리 가족이 행복해지길 바랄 뿐이란다.’

‘정말로 우리 가족을 위해서야.’

‘가족을 위해 한 번만…….’

‘우린 가족이잖아.’

눈을 뜬 후 어김없이 보이는 익숙한 녹색 천장을 바라보았다.

개 같은 꿈을 꿨다.


 

* * *



“리제, 심부름 좀 하렴!”

한 달이 지났음에도 이세벨은 여전히 나에게 심부름을 맡겼다. 예를 들면 수리 가게에서 시계를 가져오기, 이틀 전에 수선을 한 드레스 가져오기 등등.

열 살에게 시키기 좋은 기본적인 심부름이지만 귀족 아가씨가 하기엔 번거롭고 자잘했다.

그렇듯 귀족들은 제 자식에게 심부름을 시킬 때 장터보다는 이웃 저택에 가도록 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작년에 있었던 일로 인해 내 심부름은 이웃 저택에서 장터로 바뀌고 말았다.

그때 이세벨은 언덕 밑에 있는 프론드 저택 가 부인에게 초대장을 건네라는 심부름을 나에게 시켰다.


‘안녕하세요, 프론드 부인. 마르센 가에서 온 리제 마르센이라고 해요. 어머님의 심부름으로 오게 되었어요.’

‘어머, 기특하구나. 우선 안으로 들어오겠니?’

그곳으로 간 나는 의도치 않게 디저트를 얻어먹었다. 친절한 프론드 부인은 따분한 일상을 달래듯 나에게 학업이라든가, 교우 관계 등 뻔한 질문을 했다.

당시 나는 학교에 가지 못한다는 불만이 있어 이런저런 얘기를 털어놓았다.

프론드 부인은 생각보다 내 얘기가 재미있었는지 차까지 내었다. 얘기가 다 끝났을 때는, 부인은 또 놀러 오라며 내 손에 사탕 몇 개를 쥐여줬다.

문제는 후에 파티장에서 이세벨과 프론드 부인이 만난 거였다. 프론드 부인은 이세벨 옆에 있는 날 보자마자 웃으며 인사를 건네었다.


‘저번에 부인께서 리제에게 심부름을 시켰을 때, 같이 얘기를 나눴어요. 부인께 막내딸이 있다는 얘긴 들었어도 이리 똘똘할 줄은 몰랐는데. 예쁘고 참하니 분명 형제들 중에서도 큰 인물이 될 거예요.’

‘……감사해요.’

적의 하나 없는 프론드 부인의 말이 후폭풍을 만들었다. 그녀는 파티가 끝날 때까지 내 칭찬을 아끼지 않고 이세벨에게 내뱉었다.

이세벨의 얼굴은 다행히 평온했지만 가끔 프론드 부인이 다른 형제들과 날 비교할 때, 이세벨의 어깨가 살짝 경직되었다.

동시에 나도 도망가고 싶었다.

이세벨은 저택에 돌아오자마자 나를 핍박했다. 우선 방에 있는 책들과 내 물건들을 다 빼앗아버린 후 더 이상 다른 저택 가로 심부름을 보내지 않았다.

학교에 갈 생각은 더 하지 말라며 경고까지 받기도 했다.

그 일이 지난 지 벌써 일 년. 이세벨은 다시 나에게 평상시 하녀들이 할 만한 심부름을 시켰다.


“받으렴. 「인어의 눈물」마스터에게 이 명함을 내주면 물건을 줄 거란다. 아주 비싼 물건이니 잃어버리지 않게 유의해야 해. 만약 조금이라도 물건에 흠이 가거나 망가지면 저번에 주었던 책들을 다 빼앗을 거다. 알겠지?”

그녀는 에메랄드색 배경에 은빛 테두리로 장식된 명함을 주었다. 그곳엔 예약 번호와 사인이 적혀 있었다.


“리제. 대답을 해야지?”

“네, 어머니.”

“또 어디 이상한 곳에 돌아다니지 말고.”

“네. 당연하죠.”

이세벨이 엄한 경고를 늘어놓기 전 방 밖으로 나왔다. 준비된 외출 장화를 착용 후 현관으로 나서자 날 기다리고 있던 비티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가자, 비티.”

“뭐야, 리제. 또 심부름 가는 거야?”

공놀이를 하기 위해 현관에 온 스웰이 날 발견하고 피식 웃었다.


“이런, 빨리 나갔어야 했는데.”

“뭐라고?”

“아무것도 아니야.”

“흥. 하녀들이 해야 할 일을 네가 하다니. 그래. 넌 그게 어울리는 거 같아.”

“음, 내 생각에 너는 마구간을 관리하는 일이 적합할 거 같아.”

“너 지금‘너’라고 했어? 오빠한테!”

그래봤자 나보다 고작 몇 개월 차이 나는 주제에.


“그럼 다녀올게. 오빠.”

“뭐? 누, 누가 네 오빠인데!”

스웰과 얽히면 피곤했다.

서둘러 저택을 나선 후 마차 없이 비티와 언덕 밑으로 내려갔다.

익숙한 길인지라 내리막길이 가파름에도 불구하고 나의 발걸음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와 달리 비티는 내 걸음을 따라잡지 못하고 뒤에서 허우적거렸다.


“아가씨! 조금만, 조금만 천천히요!”

결국 중심을 잡지 못하고 넘어질 뻔한 비티를 잡아주었다. 그녀는 다리까지 덜덜 떨며 걷다 언덕을 다 내려와서야 안도의 숨을 뱉었다.


“「인어의 눈물」이라고 했지? 그럼 여기 어디일 텐데.”

“왼쪽으로 돌아가시면 돼요. 아가씨.”

아까 언덕에서와는 다르게 장터 지리에 능숙한 비티는 금방 「인어의 눈물」이라 쓰인 간판 앞까지 날 안내했다.

명함 디자인과 비슷한 나무 간판의 디자인을 올려다보았다. 마을 보석숍 중 가장 고가의 보석을 파는 유명한 곳이었다.


“어서 오세요. 무엇 때문에 오셨어요?”

“예약된 보석을 받으러 왔는데요. 여기 명함이 있어요.”

“아, 그거 때문에 온 거니?”

점원 중 한 명이 나에게 와 물었다. 그녀의 친근한 말투에 당황한 비티가 고개를 저었다.


“실례예요. 이분은 마르센 가의 막내딸인 리제 마르센 아가씨라고요.”

“네? 이, 이분이?”

점원이 말을 더듬었다. 그럴 만도 했다. 겉모습은 귀족 아가씨처럼 보여도 입고 있는 옷이 마르센 자식답지 않게 무난했다.

그리고 마르센 가 정도의 가문 자식이 보석을 가져가기 위해 직접 이곳에 방문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보석을 구경하기 위해 방문하는 건 많아도.


“실, 실례했습니다! 아가씨!”

“그것보다 여기 예약 번호가 써진 명함이요.”

점원의 재빠른 사과에 머쓱해 명함을 넘겼다.


“잠, 잠시만요. 예약 번호를 확인하고 보석을 건네주는 건 마스터께서 직접 하시는 일이라서요. 마스터를 불러올게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적당한 자리에 앉자 옆에서 내 눈치를 살피는 비티를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내가 속이 상했을까 봐 불안해하는 거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저택에서 입는 낡은 옷 말고 좀 더 예쁜 드레스를 입고 올걸.’

엊그제 밤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한 벌씩 선물했던 옷이 생각났다. 레이스가 달린 화사한 드레스였는데…….


“물건을 받으러 오셨다고요?”

그때 등장한 마스터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심코 고개를 올린 나는 덩치가 큰 여성의 모습에 입이 약간 벌어졌다. 진한 화장과 고정된 입매가 기가 세 보였다.


“네. 명함을 드렸을 텐데……요.”

살짝 겁먹은 나는 말끝을 흐렸다. 마스터는 손에 쥔 명함을 힐끗 보더니 다시 나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분명 제 사인이 맞네요. 예약 번호도 맞고요. 이 목걸이는 우리 「인어의 눈물」 중에서 가장 고가의 목걸이입니다.”

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 내가 알아듣지 못하자 마스터가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이 마을에 사는 귀족 마님들과 도련님, 아가씨의 얼굴은 다 알고 있지요. 마르센 가라면……분명 여섯 명의 자녀분이 있는 거로 알고 있는데요.”

“맞아요. 저는 여섯째, 리제 마르센이라고 하고요.”

“마르센 마님의 자녀분이라고 하기엔 옷차림이 평범하군요.”

마스터는 날 의심했다.


“무슨 말이세요! 아가씨는 마르센 가의 일원인 리제 마르센 아가씨라고요!”

억울함에 비티가 소리쳤다.


“무엇보다…… 여기 예약 번호가 흐릿합니다.”

마스터는 나에게 명함을 내밀었다. 잉크가 번진 건지 끝에 써진 숫자 ‘6’이 약간 흐릿했다. 하지만 살짝 번진 거뿐, 꼬투리 잡을 만한 건 아니었다.


“마르센 마님께 예약 번호와 사인이 있는 명함이 하나 더 있을 겁니다. 보통 두 개를 전달하거든요.”

“……가져오라는 얘기인가요?”

“번진 명함으로는 죄송하지만 물건을 드릴 수 없습니다.”

아무리 나라고 해도 이런 상황은 달갑지 않았다.

그렇다고 다짜고짜 우기기에는 상점 안에 지켜보고 있는 시선들이 가득하다. 이들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다가 이세벨은 당장이라도 내 방에 있는 책을 모조리 빼앗을 거다.


“난 여기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비티, 네가 우리 어머니께 명함을 받아와 줘.”

“하지만 아가씨를 혼자 둘 순…….”

“여기 가만히 있을게. 앞으로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게 마스터에게 내 얼굴도 알릴 겸 말이야.”

내 최후의 자존심이었다.

마스터는 나름 현명하게 내가 기다리는 동안 음료수를 내오겠다며 말했다. 오랫동안 귀족들을 상대해서 그런지 이런 면에서 머리가 잘 굴러가는 사람이었다.


‘마스터 입장에선 의심스러운데 확증이 없으니 이 방법이 최선이겠지.’

“빨, 빨리 다녀올게요.”

비티는 다시 저택으로 향했다. 홀로 이곳에 있게 된 나는 마스터의 안내에 따라 벽면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 이제 비티가 명함을 가져오길 기다리면 된다.


“음료수는 무엇으로 드릴까요?”

“그러게요. 포도가 좋을까요? 오렌지가 좋을까요? 어머니께서는 하녀를 시켜 사과를 따오게 한 뒤, 음료수를 직접 만들어 주시곤 하죠. 그게 참 맛있는데요.”

“느긋하게 고르시죠.”

“그러죠.”

능청스럽게 웃으며 마스터를 보았다.

남은 시간 동안 확실하게 마스터의 머릿속에 내 얼굴을 각인시킬 셈이었다.


“어?”

“…….”

“리제 언니다!”

그 모든 계획이 앞에서 들리는 목소리 하나에 다 지워졌다.

고개를 돌리자 펜턴 가 부인의 손을 꼭 잡고 있는 유네가 보였다. 그녀는 어머니의 손을 놓고 바로 나에게 달려왔다.


“언니! 언니도 이곳에 보석 사러 왔어? 나도 그래!”

“아니, 난…….”

뒤에 있는 펜턴 부인이 신경 쓰였다. 오래전부터 펜턴 가와 마르센 가는 사이가 무척 안 좋았다. 어린 유네는 그 사정을 모른다 쳐도 펜턴 부인은 아니었다.


“어머, 네가 리제구나?”

그런 내 예상과 달리 부인은 환하게 웃으며 나에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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