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 2장. 이세벨과 리제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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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 2장. 이세벨과 리제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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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 2장. 이세벨과 리제 (3)
2023.01.27.
이세벨이 왜 이곳에 온 거지? 볼이 상기된 그녀 표정은 어쩐지 화가 잔뜩 나 보였다. 왜 화가 났을까, 온갖 생각이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내 앞으로 다가온 이세벨은 무뚝뚝하고 감정 없는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어, 어머니…….”
제발 무슨 말이라도 좀 해 봐.
설마 날 혼내려고 저러는 것일까.
이세벨은 귀족들의 시선이 가득한 곳에서 날 혼낸 적이 있었다.
내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이유여서였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옷자락만 세게 쥐고 있던 그때, 나는 얼마나 많은 감정을 억눌러야 했던가.
저번 생에도, 예전 생에도.
‘윤보하!’
‘리제!’
비참했던 기억이었다.
“리제.”
이세벨이 내 이름을 불렀다. 평소와 다른 어조에 화들짝 놀란 나는 입술을 열지 못했다.
본능적으로 치마폭에 숨긴 물건을 확인했다. 혼난 건 둘째치고, 방금 막 펜턴 부인에게 받은 물건을 빼앗길까 봐 조마조마했다.
“평소 답지 않게 기가 죽어서는…….”
“네?”
이세벨은 내 곁을 지나쳤다. 그녀가 향한 곳은 몸이 뻣뻣하게 굳어 있는 마스터 앞이었다. 나와 마찬가지로 이세벨의 등장으로 완전히 기가 죽은 마스터는 손만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저분은 마르센 부인 아니야?”
손님들이 이세벨과 마스터를 힐끗 쳐다보았다. 가십거리를 만들기 좋아해도, 스스로 가십거리가 되는 걸 원치 않던 이세벨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시선을 신경 쓰고 있지 않았다.
“마스터. 내가 하녀에게 명함을 하나 받았어요. 상황도 들었고요.”
이세벨은 비티에게 받은 명함을 내밀었다. 숫자 6이 살짝 번진 그 문제의 명함이었다.
“네, 마님. 마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숫자가 번져서요. 워낙 우리 상점 물건이 고가다 보니까 작은 문제라도 완벽히 처리해야 합니다.”
“이상하군요. 아무리 번졌다 하더라도 문제 될 게 없을 정도로 숫자가 선명하게 보이는데 말이죠.”
“겉으로는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저희가 완벽함을 추구하는 매장 아닙니까. 마님.”
“너무 완벽하네요. 나중에는 종이가 조금 접혔다고 물건을 못 주는 일도 생기겠어요. 명함 두 개를 주는 건 다시 고려해야겠네요. 열 개는 줘야 할 거 같아서요.”
이세벨이 잔뜩 비꼬자 마스터는 굽신거리며 변명거리를 찾기 바빴다. 어떻게든 마르센 안부인에게 눈도장을 찍히지 않기 위한 발버둥이었다.
하지만 이세벨은 현재 심기가 불편한 상태였다. 마스터의 말뿐인 친절함을 모를 리가 없다.
“이상하네요.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마스터가 우리 마르센 가문을 무시하는 일로 보여요.”
“마님! 제가 감히 그럴 리가 있겠나요?”
“전 매우 모욕적인데요. 마스터.”
“정말로, 정말로 오해이십니다. 마님.”
분위기가 더 험악해졌다.
“마스터, 듣고 보니 이상하네요.”
펜턴 부인의 목소리가 그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마르센 부인과 펜턴 부인의 시선이 마주쳤다. 묘한 감정과 분위기가 흐르는 게 그 어느 때보다 긴장되었다.
“오랜만에 뵙네요, 마르센 부인.”
“그러게요. 펜턴 부인.”
둘은 적당히 인사를 나누었다. 그 둘의 대면에 다른 손님들도 시선을 집중했다. 마르센 가와 펜턴 가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건 이 근방에 사는 귀족들이라면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사실 저도 오늘 마스터에게 직접 물건을 받으러 와서 말이에요. 제가 건넨 명함도 숫자가 여러 개가 번져 있었죠. 유네가 물을 튀겼거든요.”
“……아.”
“마스터께서 무례를 인정하고 부인께 정중히 사과해야 할 거 같네요.”
펜턴 부인의 말에 마스터는 할 말을 잃었다. 게임 끝이었다. 더 이상 마스터는 변명할 거리가 없었다.
이제 펜턴 부인 말대로 마스터가 이세벨에게 사과할 일만 남았다. 하지만 마스터는 나름 억울했는지 나를 흘끗 보고선 입술을 벌렸다.
“그, 그게. 제 불찰은 맞으나 상황을 설명해드리자면…….”
“설명해보세요.”
“사실 마르센 가 막내 아가씨를 뵌 적이 없어 아가씨가 아닌 줄 알았습니다. 혹 물건을 훔치러 온 사람인 줄 알고…….”
마스터는 말을 이어 했다.
“보통 어린 아가씨들이 직접 물건을 가지러 가는 일도 없었고…….”
“내가 저 애한테 심부름을 자주 시키긴 했죠. 제 분수를 모르는 거 같아서요.”
이세벨의 말 한마디에 마스터의 표정이 살짝 풀렸다. 눈치가 빠른 그녀는 내가 마르센 가문에서 어떤 취급을 받는지 대충 파악한 거 같았다.
“그래서 저도 착각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사과하는 마스터의 표정이 한결 편안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초조한 기 싸움 끝에 결국 피해 입는 건 나였다.
또다. 항상 끝은 내가 피해 입는 거였다.
‘결국엔 나야?’
이런 식으로 이세벨이 날 비참하게 만들 줄은 몰랐다. 자연스레 손에 힘이 들어갔다.
참으면 호구랬는데, 지금 내 꼴이 딱 그거였다. 저번 생에도 이번 생에도 딱히 달라진 건 없었다.
“앞으로 아가씨께서 심부름 오시면 그때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건 당연한 거고…… 이 보석은 사지 않겠어요.”
“네?”
마스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저 목걸이는 이세벨이 일주일 동안 기다렸던 귀중한 물건이었다.
“우리 마르센 가를 무시했는데 내가 물건을 사고 싶겠어요?”
“하, 하지만……!”
“마스터. 유감이지만 리제는 마르센의 막내딸이에요. 이 아이를 냉대하는 건 마스터가 아닌 저로 충분해요. 또한 리제를 모욕하는 건 마르센 가를 모욕하는 것과 마찬가지죠. 그녀는 우리 마르센 가의 일원이니까요.”
“마, 마님.”
“마스터께서 먼저 무례를 저질렀으니, 나의 변덕을 이해해주시길 바라요.”
이세벨은 그 말을 끝으로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마스터는 갑자기 환불된 물건에 결국 지불한 값을 다시 돌려줘야만 했다.
상황이 끝나자 기분 좋게 보석을 구경하던 귀족들은 슬그머니 가게 밖으로 나갔다. 북적였던 가게 안이 텅 비어 있었다. 그나마 남아 있는 손님이라곤 물건을 받기 위해 온 여인들, 그리고 계속 우리를 보고 있던 펜턴 부인과 유네 뿐이었다.
마스터에게 돈을 건네받는 이세벨을 가만히 보았다. 아직도 기분이 얼떨떨했다.
“리제, 멍청하게 서서 뭐 하는 거야?”
“아, 네. 네!”
이세벨은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보석숍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펜턴 부인과 유네에게 짧게 인사한 뒤, 가게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이세벨에게 다가갔다.
“……정말 보석을 사지 않아도 괜찮으시겠어요?”
“뭐?”
“갖고 싶으시던 물건이었잖아요.”
내가 묻자 이세벨은 동요하는 듯 입술을 벌렸다가 닫았다.
“그럼 너는?”
“네?”
“너는 왜 가만히 있던 거니?”
“……익숙한 일이고, 괜히 제가 소란 피우면 안 될 상황 같았으니까요.”
이세벨은 나에게 다가왔다.
“저택에서도 그 상황 파악을 좀 잘하면 좋겠구나. 쓸데없이 밖에서 그러지 말고 말이야.”
“유의할게요.”
“우선 그 옷차림부터 어떻게 해야겠어. 아무리 심부름이라고 하지만 귀족 자녀답지 않게 그 단출한 옷은 뭐니?”
“이게 편한걸요.”
“그러니 무시 받는 거야. 안 되겠다. 오늘 장터에 온 김에 네 드레스를 좀 사야지.”
“……어머니께서 직접요?”
한 번도 이세벨이 드레스를 직접 골라주는 일은 없었다.
“하녀들이 고르는 건 영 마음에 안 들어서 말이야.”
“엊그제 아버지가 사준 드레스가 있어요.”
“백작님께서는 드레스 보는 안목이 없어. 보나 마나 너와 안 어울리는 촌스러운 화사한 색이겠지. 리제, 넌 화사한 색이랑 안 어울린단다. 레이스 달린 것도 별로고.”
내일 세상이 멸망하려고 그러는 걸까? 오늘 이세벨의 행동과 말들이 모두 낯설었다.
“이제야 왔구나.”
이세벨은 저 앞에서 자신에게 오고 있는 마차를 발견하고 말했다. 그제야 나는 그녀가 마차를 타지 않고 언덕까지 내려왔다는 걸 알아차렸다.
이세벨이 신고 있는 구두 굽에는 더러운 흙이 잔뜩 묻어 있었다.
“뭐 해? 어서 올라타지 않고.”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있구나.
서둘러 마차에 올라탔다.
* * *
이세벨이 이상해졌다.
날 무시했던 지난날과 달랐다. 보석숍 사건 후 그녀는 내 옷차림에 대해 사사건건 참견했다.
조금이라도 옷이 후줄근하면 일부러 다시 방으로 들여보낸 후 새 드레스를 골라주었다. 언제는 목과 팔이 밋밋하다며 장신구를 주기도 했다.
그런 이세벨의 변화와 그 이유를 생각했다.
‘아무리 내가 바깥 자식이라 해도 마르센 가의 자식이라서?’
내 이미지가 마르센 가 이미지에 영향이 미침을 이번 사건으로 깨달은 걸까?
어쨌든 그녀는 자신이 말한 거처럼 변덕쟁이가 분명했다. 나에게 심부름시키는 일도 줄었다. 심부름을 시켜도 말 먹이를 주는 것, 아니면 정원에 물을 주는 것들뿐이다.
“근데 이건 어쩌지?”
이세벨도 이세벨이지만 내 마음을 한층 더 복잡해지는 것이 하나 더 있었다. 포장된 상자를 바라보았다. 펜턴 부인이 나에게 준 토끼 장식 고리가 들어있는 상자였다.
손수건에 이어 이번에는 값비싼 물건이라니. 이걸 전해주려면 생일날 유릭을 만나야 하는데 쉽지 않았다. 심부름이 적어진 이후 저택 밖으로 나가는 일이 드물어졌기 때문이다.
“리제!”
이세벨의 목소리가 들렸다. 황급히 포장된 상자를 서랍 안에 넣은 다음 책을 꺼냈다. 타이밍 좋게 이세벨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뭐 하는 거니?”
“……책을 읽고 있었어요.”
“오늘은 몇 분 정도 책을 읽은 거야?”
“음. 아마 삼십 분 정도?”
이세벨은 잠시 고민하더니 방 안으로 들어왔다.
“예전부터 나와 친한 후작부인이 있는데 이번에 날 저택에 초대했단다.”
“그런가요?”
“그곳에 너와 같은 나이의 소년이 있지. 잘생겼다고 하더라고.”
“네에…….”
“너와 같이 가려고.”
“네?”
하마터면 들고 있던 책을 떨어트릴 뻔했다. 보통은 스웰이나 실케를 데려갔을 텐데?
“저번에 사준 드레스 중에 그나마 나은 드레스가 있었을 테지? 그 남색 드레스 있잖니.”
“…….”
“리제.”
“네! 네, 드레스라면 있어요.”
“그걸 입고 가는 거다.”
“언제 가는데요?”
“삼일 뒤 바로.”
삼일 뒤라는 말에 아연했다.
그날은 다름 아닌 유릭 펜턴의 생일이다. 설마 이세벨이 선물의 존재를 눈치챈 건 아니겠지? 그녀는 머리 뒤에도 눈이 달린 괴물이니 충분히 가능하다.
“언제 가서 언제 오는데요?”
“그게 무슨 상관이니? 설마 또 방에서 책을 읽으려고?”
“아뇨!”
“일찍 갔다가 밤이 되기 전에 올 거다. 할 얘기가 아주 많아서 말이지.”
“제가 꼭 가야 하나요?”
“이참에 그 후작의 아들이랑 친해지는 것도 좋잖니?”
이런, 망했다!
“말했으니 그리 알아두거라. 알겠지?”
도저히 이세벨의 생각을 읽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