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 2장. 이세벨과 리제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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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 # 2장. 이세벨과 리제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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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 # 2장. 이세벨과 리제 (4)
2023.01.31.
한 시간가량 마차를 타고 로스코프 마을에 도착했다. 예술인 마을답게 다양한 예술인들이 공존하는 곳이다.
화사한 보라색 꽃이 피어 있는 마을엔 작은 강가가 있었고, 곳곳에는 화가와 음유시인들이 떠돌아다녔다.
목적지에 도착했는지 계속 움직였던 바퀴가 멈췄다. 보라색 지붕이 인상 깊은 거대한 저택은 작은 호수와 티를 마실 수 있는 테이블까지 갖추고 있었다.
“길을 안내 드리겠습니다. 모자와 양산은 저에게 맡겨주세요.”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하녀들과 시종들이 우리를 환영해주었다. 이세벨의 방문에 많은 신경을 쓴 모양이다.
‘내가 와도 되는 곳인가?’
생각해보면 지금 내가 걸치고 있는 드레스와 보석이 달린 장신구들. 하나 같이 나에게 벅찬 물건이다.
그 때문에 아침부터 불만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쌍둥이 형제들이 한껏 치장하는 날 보며 질투심을 느낀 게 원인이었다.
“어머, 오셨어요? 이세벨.”
하녀들 틈 사이에서 한 여인이 나타났다.
짧은 검은색 머리를 가지고 있는 살짝 통통한 여인은 인자하게 웃으며 이세벨과 날 반겼다.
“실리.”
둘은 정말로 꽤 친한지 성이 아닌 이름으로 다정하게 불렀다.
이세벨에게 친한 친구가 있다는 게 신기해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는데 앞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자 검은색 머리에 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소년이 날 보고 있었다.
저 애가 이세벨이 말했던 내 또래 소년이구나.
그는 나를 경계하는 듯 제 엄마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네가 리제지? 많이 들었단다. 여긴 나의 아들인 로저라고 해. 리제, 너와 동갑이지.”
실리 부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로저가 매서운 눈매를 풀었다.
그는 살짝 고개를 움직여 인사했다. 방금 날 쏘아봤던 것과 딴판이다.
나는 그를 자세히 보았다. 천사같이 아름답게 생긴 유릭과 달리 로저는 날렵하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미남이었다.
“안녕, 나는 리제라고 해.”
로저의 입에서 먼저 목소리가 나올 거 같지 않아 내가 먼저 인사했다. 그러자 로저는 나를 다시 무섭게 노려보더니 제 엄마 뒤로 몸을 숨겼다.
“로저. 뭐 하는 거니?”
“…….”
“미안. 얘가 좀 부끄럼을 많이 타는 아이라서 말이야. 로저, 어서 리제한테 인사하렴.”
실리 부인은 로저의 등을 억지로 떠밀었다. 그 손길에 내 앞에 서게 된 로저는 여전히 말 한 마디 없다.
“어머, 로저가 오늘따라 왜 이러지? 부끄럼을 많이 타지만 말이 없는 아이는 아닌데. 아마 리제가 와서 기쁜 모양이야.”
실리 부인은 어색한 우리 분위기를 풀어주기 위해 노력했다.
“그거 영광이네요.”
이세벨이 대신 대답했다.
“그러지 말고 안에 들어가서 얘기해요. 이세벨.”
“그래요. 그럼 실례할게요.”
실리 부인과 로저가 먼저 앞장섰다. 얌전히 그들을 뒤따라가는데 이세벨이 약간 고개를 숙이며 내 귓가에 다가왔다.
“로저랑 친해지는 게 어떻겠니? 인물도 훤하고, 저 애도 널 마음에 들어 하는 거 같은데.”
도대체 어딜 봐서?
“친구가 되면 좋을 거 같긴 해요.”
“아니, 친구 말고 말이야. 약혼자로선 어때?”
입이 벌어졌다.
내 나이 고작 열 살이었다. 2차 성장기도 오지 않은 소녀에게 약혼자라니……. 아무리 이 시대 사람들이 결혼을 일찍 해도 열 살한테 약혼은 이르지 않나.
또한 이세벨은 바깥 자식인 나에게 정직한 귀족 소년을 소개할 정도로 참된 어머니가 아니었다.
‘뭐지?’
이세벨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이곳에 일부러 날 데려오고 심지어 약혼 얘기를 꺼내는 거 보면 꿍꿍이를 벌이고 있는 건 확실한데.
‘수상해.’
의문을 품고 저택 안으로 들어가자 외관 만큼이나 화려하고 넓은 내부가 보였다.
그중 내 눈에 들어온 건 조각상과 그림이었다. 수많은 돈이 있어도 구하기 힘들다는 유명한 작가의 작품들이 보였다.
가품이 아닐까 의심했지만 밑에 작가의 사인이 번 듯이 새겨져 있었다. 그 외에도 벽에는 미술작품이 아닌 문장이 쓰여 있는 여러 액자가 장식되었다.
“예술품에 관심이 많은가 보구나?”
“진품인가요?”
“그럼. 경매 또는 선물로 구한 거란다.”
“어떻게 구하셨나요?”
“우리 바커스 가문은 예술인을 많이 방출했지. 그래서 몇몇 예술가와 연이 있단다.”
실리 부인의 말에 나는 입이 살짝 벌어졌다.
여태 이곳이 후작 가라고만 알고 있었지 어느 가문의 무슨 일을 하는 사람 집안인지는 알지 못했다.
근데 바커스 가문이라니. 내가 아는 유명한 시인 중에도 바커스 성을 가진 사람이 있었는데 설마…….
“혹시 로갱 바커스 시인도 이 가문 출신인가요?”
“응? 그렇단다. 보아하니 이세벨에게서 우리 가문에 대해 자세히 듣지 못한 거 같구나. 로갱도 유명하긴 하나 로저는 바커스 가문에서도 재능이 남다른 아이야.”
그저 숫기 없는 잘생긴 소년이 아니구나.
“점심 준비가 다 될 때까지 로저 방을 구경하는 게 어떻겠니? 저 애 방엔 볼 게 많으니까 말이야.”
“저는 좋지만…….”
나는 괜찮은데 로저가 괜찮을까. 아직 말 한번 섞지 않은 상대와 단둘이 있으면 그가 부담스러워하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하지만 로저는 망설임 없이 나를 보며 손짓했다. 자신의 방으로 안내하는 거다.
나는 그 뒤를 따라가며 로저를 흘끗 살폈다.
“방은 어디에 있어?”
“…….”
“형제는 있니? 아님 외동이야?”
“…….”
질문을 던져보아도 로저는 대답하지 않았다. 결국 그와 말하기를 포기한 나는 조용히 그의 안내를 따라갔다.
로저의 방은 3층 중간에 있었다.
“여기가 네 방이야?”
내가 묻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의 성격처럼 꽤 조용한 방이었지만, 의외로 흥미로운 물건들이 많았다.
주로 악기들이었고, 그중 현악기와 처음 보는 악기들도 존재했다.
그는 음악 말고 미술에도 관심이 많은지 방 중간에 그림이 있었다. 로저가 직접 그린 그림이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그림에는 여백이 많았지만 세세하고 정밀한 인물화는 마치 실제 사람은 보는 듯 생생했다.
“우와. 대단하다!”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그림을 좀 더 구경하고 싶었는데 로저가 내 시야를 가렸다.
“왜? 좀 더 보고 싶어. 나 그림을 그렇게 잘 그리는 사람은 처음 봤어.”
“……이건 망친 작품이야.”
로저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낮았다.
“망친 작품이라고? 이렇게 훌륭한데.”
“……정말로 망친 거야. 여기 봐, 눈동자 색이 탁하잖아.”
그는 남자의 눈동자를 가리켰다.
“음, 잘 모르겠는데.”
“모르면 됐어.”
로저는 더 설명해주지 않고 내 앞에서 그림을 치웠다. 그림 얘기를 계속 꺼냈다가 로저가 싫어할 거 같아 방을 다시 둘러보았다.
“정말 멋진 방이다. 신기한 물건이 가득해.”
실리 부인의 말이 맞았다. 로저의 방에는 볼 것이 많고 재미있는 물건이 가득했다. 내가 그 물건들에 흥미를 두고 있을 때, 로저는 침대에 앉아 날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
나도 마찬가지였다. 움직이지 않고 구경을 마친 나는 침대에 앉은 로저에게 시선을 두었다. 로저의 미간 사이에 주름이 잡혔다.
“왜 안 만져?”
“……응?”
“신기하다고 했잖아. 왜 가까이 가지도 않고 만지지도 않아? 다들 여기 오면 이것저것 보고 만지고 하던데. 넌 말로만 그렇지 신기하지 않은 거야?”
“아니, 신기해. 엄청 궁금하고.”
“근데 왜?”
그는 순수하게 물었다.
“예술품은 예민하잖아. 특히 악기 같은 경우 잘못 만졌다가 소리가 망가질 테고. 물감은 괜히 건드렸다가 색이 조금이라도 섞이면 어떡해? 넌 너의 악기나 예술 작품을 마음대로 만지는 게 좋은 거야?”
이번에 내가 물었다. 로저는 침대에서 일어나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정말 싫어.”
그는 나에게 다가왔다.
“저 악기 하나에 얼마인 줄 알아?”
그는 벽에 걸린 바이올린을 가리켰다.
“몰라.”
“금괴 다섯 개의 값이야. 또한 무척 예민해서 조금만 건드리면 소리가 달라져.”
“근데 따로 보관하지 않고 저렇게 벽에 걸어두어도 돼?”
“저건 이미 망가졌어. 여기 온 애들이 하도 만져 대서 말이야. 지금은 장식용으로 쓰고 있지.”
그는 날 빤히 바라보더니 아까 가리킨 바이올린을 꺼내 나에게 내밀었다
“연주할 줄 알아?”
“미안하지만 난 예술에 대해 거의 몰라. 아마 네가 가르쳐줘도 모를 거야.”
“근데 악기가 예민하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
“책에서 보았어. 또 악기가 아니더라도 원래 남의 물건을 함부로 건드리거나 만지지 않아.”
“음…….”
로저는 입을 다물었다.
보아하니 생각했던 거처럼 숫기가 없는 편도 아닌 거 같고 부끄럼을 떠는 성격도 아닌 거 같다. 단호하게 말을 하는 걸 보면 처음에 말을 하지 않았던 건 그저 귀찮아서 일지도 모른다.
“책 봐도 돼?”
주변을 둘러보다 방 벽면에 있는 책장을 보고선 가리켰다.
“다 예술에 관련된 책이라 재미없을 텐데.”
“그래? 그래도 할 게 없으니까.”
“나랑 안 놀고?”
“너, 나랑 놀고 싶어?”
내가 묻자 로저는 단번에 고개를 저었다. 이럴 줄 알았다.
“그럼 책 한 권만 줘. 조용히 있을게. 넌 네 할 거 해.”
“그래도 돼?”
“안 될 거 뭐가 있어. 대신 부모님한테는 비밀로 하자. 부모님한테는 우리가 아주 신나게 놀았다고 거짓말하는 거야.”
로저는 미적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 책이나 주면 되는 거지?”
“그래.”
그는 책장으로 가 두툼한 책 한 권을 나에게 내밀었다. 「미학의 관한 이론서」라는 책이었다. 따분한 책 같았지만 그 외에 할 게 없었던 나는 바로 의자에 앉아 페이지를 펼쳤다.
이제 좀 조용히 책을 읽나 싶었는데 로저가 내 앞에서 기웃거렸다. 처음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로저도 제 할 일을 할 줄 알았다.
“…….”
근데 아니었다.
“……뭐 하는 거야?”
참다못한 내가 묻자 그는 흠칫 몸을 떨었다.
“정말로 책을 읽나 싶어서.”
“그럼 가짜로 읽고 있게?”
“아니.”
뭐야, 싱겁게. 다시 책을 읽으려 했는데 로저가 나를 뚫어지게 본다.
“뭐야? 할 말 있으면 해.”
“……난 거짓말 못 해.”
“뭐?”
“거짓말 못 한다고. 그러니까 우리가 신나게 놀았다고 말 못 해.”
“그럼 어떻게 하는데?”
“놀자. 신나게.”
그는 단순하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