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 # 2장. 이세벨과 리제 (5) (10/47)


10 # 2장. 이세벨과 리제 (5)
2023.02.03.


뭘 하면서?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로저는 아까 말했던 바이올린을 가져왔다. 그는 활에 송진을 바르고 능숙하게 바이올린을 조율한 뒤, 악기를 내 앞으로 내밀었다.


“가르쳐줄게.”

“뭐?”

“자.”

거절하고 싶었지만 로저가 고집스럽게 바이올린을 앞으로 더 내밀었다.


‘윽.’

내 눈앞에는 바이올린이 아닌 금괴 다섯 개 환영이 아른거렸다. 망가트리면 내 몸 안에 있는 장기 일부를 꺼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내가 함부로 다뤄도 돼? 아직 바이올린을 다뤄본 적이 없어서 분명 거칠게 사용할 텐데.”

“말했잖아. 이미 망가졌다고.”

그는 내 손에 바이올린을 쥐여준 뒤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누가 연주한 걸 본 적이 있지 실제로 바이올린을 잡는 건 처음이었다. 고스란히 느껴지는 나무 촉감은 생각보다 연약했다.

조금만 힘을 주면 부러질 거 같아 조마조마하다.


“뭐 해? 빨리 턱에 대봐.”

“……재촉하지 말아봐.”

침이 자연스레 넘어갔다.

아무리 악기에 하자가 있다고 하지만……. 괜히 망가트렸다가 로저가 나에게 불같이 화를 내면 어쩌나.

바이올린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는 얇은 네 줄의 현을 보았다.


“저기, 이거 현은 한 줄에 얼마씩 해?”

“걱정하지 마. 현은 얼마 안 하니까. 실제로 E현이 자주 끊어졌는데 한 줄에 30골드 정도 들었을걸?”

미쳤구나.


“갑, 갑자기 배가 너무…….”

“도망갈 생각 말고 어서.”

30골드면 내가 갖고 싶은 만년필을 잔뜩 살 수 있는 돈이었다. 이 바이올린은 현에다가 금칠이라도 한 걸까.


“턱을 좀 안쪽으로 대. 안 그럼 바이올린이 떨어지고 말 거야.”

“정말? 정말 내가 이 바이올린을 사용해도 돼?”

“자꾸 물을래?”

그는 바이올린을 턱에 대는 법부터 가르쳐주었다. 내가 자꾸만 몸을 움직이자 로저의 손이 나의 어깨를 잡았다. 그의 손이 닿자 나도 모르게 어깨에 더 힘을 넣었다.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갔잖아.”

로저는 바로 지적했다.


“그러다 떨어지면 어떡해?”

“하아…….”

“한숨 쉴 사람은 나라고.”

“망가질까 봐 걱정되면 이 몸부터 움직이지 마. 나중에는 손을 떼고도 바이올린을 턱으로 지탱할 수 있어야 해.”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는 바이올린을 쥐고 있는 내 손을 억지로 떼어냈다. 곧 나는 턱에 온 힘을 실었다. 바이올린이 떨어지면 나도 죽는다.


“힘 풀어.”

“…….”

“어깨에도 말이야.”

조용히 해!

로저는 굳어 있는 나의 자세를 하나하나 지적했다. 날 보며 매섭게 보던 것과는 완전 딴판이었다. 그는 내 얼굴이나, 어깨, 손을 대놓고 만지며 자세를 잡고선 희미하게 웃었다.


“어때?”

자세가 좀 편안해졌다. 턱에 걸린 바이올린이 아까보다 안정적이었다. 힘을 풀지 않은 이상 떨어지지 않을 거 같아 자신감이 붙었다.


“안 떨어지네?”

“그치? 괜히 겁먹어서 그래. 자세만 좋으면 안 떨어져.”

악기를 잘 연주하는 이들을 보며 부러워했지, 내가 악기를 잡을 줄 몰랐다. 이제 고작 바이올린을 몸에 고정할 수 있는 거뿐인데, 벌써 내 머릿속은 독주 곡 하나를 완벽히 연주한 기분이다.


“뭔가 할 수 있을 거 같아…….”

“그치?”

“활은 어떻게 쥐어?”

이번엔 내가 먼저 물었다. 로저는 잠시만, 하더니 곧 자신의 활을 가져왔다.


“날 따라 해 봐.”

활 쥐는 손동작이 생각보다 특이했다.


“새끼손가락을 더 끝으로 둬야 해.”

“이렇게?”

“조금 더 뒤로. 그래.”

의외로 그는 화를 내거나 답답해하지 않고 나에게 활 쥐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처음에는 익숙지 않던 손 모양이 이제는 보기 괜찮았다.


“나 어때?”

“멀리서 봐볼게.”

로저는 한 걸음 뒤로 물러가 나의 자세를 보았다.


“푸읍. 너 진짜 이상하다.”

내 자세가 어색한 모양인지 그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웃, 웃지 마. 처음 배워서 그래!”

“그래. 난 처음부터 완벽했지만 말이야.”

그는 은근슬쩍 자기 자랑을 했다.


“넌 언제부터 바이올린을 시작했는데?”

“어머니 말씀으로는 태어나자마자부터 바이올린을 품고 다녔대. 연주하기 시작한 건 4살 때고.”

“대단하다. 나도 사실 예전부터 바이올린을 배우고 싶었어.”

“저택에 바이올린이 없어?”

“있긴 한데……부모님은 나한테 가정교사를 붙어주지 않으시거든.”

“왜?”

그 이유를 설명하자면 나의 출생부터 구구절절 말해야 했다. 굳이 말했다가 로저가 날 얕잡아보면 어쩌나. 오늘 처음 만난 그에게 다짜고짜 약점부터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러게.”

쓴웃음을 지었다.

로저는 잠시 아무 말 없더니 다시 책장 쪽으로 다가갔다. 그가 꺼내든 건 바이올린 교습서였다. 입문자 용인지 펼친 악보엔 계이름 하나가 고작이다.


“보통 바이올린은 ‘라’부터 배워. 손을 떼고 활만 움직이면 되거든.”

“쉽네?”

“음, 한번 해 봐.”

그 정도야 뭐.

내가 자신 있어 하자 로저가 턱 끝을 살짝 올렸다. 이제 나는 멋지게 소리를 내어 저 잘난체하는 로저의 콧등을 꺾어줄 생각이었다.

그가 알려 준 대로 현 위에 활을 놓고 움직였다. 이제 소리만 내면 되는데 내가 예상했던 고운 소리가 아닌 듣기 싫은 마찰음이 났다. 손톱으로 칠판을 세게 긁는 소리다.

이게 아닌데. 다시 한번 도전해보아도 똑같은 소리가 반복됐다.


“형편없네.”

“……원래 인생은 계획대로 되는 게 아니야.”

“뭔 소리야.”

“어린애는 몰라도 돼.”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손에 힘을 풀어. 부드럽게.”

그는 내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려놓고 활을 움직였다. 마법 같게도 로저가 손봐주니 훨씬 부드러운 소리가 나왔다.


“우와!”

“어때?”

“예쁘다. 소리가 무척 예뻐!”

내가 흥분하며 말하자 로저는 눈을 깜빡이더니 이내 웃었다.


“재미있지? 바이올린.”

“응. 꽤.”

“그럼 일주일에 한 번 우리 저택에 와. 내가 가르쳐줄게.”

갑자기?


“네가 왜?”

“심심하거든. 이 마을엔 내 또래가 없어서 말이야.”

“학교 안 다녀?”

“시시해.”

고마운 제안이라 마음 같아선 고개를 끄덕이고 싶었지만 걸리는 문제가 여러 가지였다. 이세벨이 반대할 게 분명하고 또 돈이 없었다. 로저는 무료로 가르쳐준다고 했지만 영 찝찝했다.

나중에 이를 꼬집어 나에게 부당한 요구를 하는 건 아닐까.


“나, 나한테 뭘 원하는 건 아니지?”

“뭐라는 거야. 난 바이올린 갖고 그런 짓 절대 안 해.”

“정말? 처음 만나는 널 어떻게 믿어?”

“음, 손목이라도 걸까?”

“……끔찍한데.”

“못 믿겠으면 우선 오늘 한 번 배워보고 결정해. 분명 재미있을 거야.”

로저는 적극적이었다.


 

* * *

어느덧 점심시간이 되었다. 하도 음을 냈더니 그 진동이 머리까지 울려 퍼질 때였다. 잠시 방에 들어온 하녀가 식사를 위해 내려오라고 말했다.

나와 로저는 바이올린을 내려놓고 식당으로 향했다. 맛있는 냄새가 내 코를 자극했다. 식탁에는 각종 고기 요리를 비롯해 맛있는 디저트까지 식탁 위에 잔뜩 있었다.


“배가 고프지? 앉으렴.”

바커스 부인은 나에게 자리를 안내했다. 이세벨의 옆자리였다. 이세벨은 바커스 부인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는지 아까보다 표정이 한결 좋아 보였다.

내가 그녀 옆에 앉자 이세벨은 아무 말 없이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먼저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바이올린 소리가 들리던데.”

바커스 부인은 나에게 물었다.


“아, 로저가 알려줬어요.”

“정말이니? 로저가 바이올린을 누구에게 가르쳐주는 일은 아주 드문데.”

바커스 부인의 말에 나와 활발하게 소통했던 로저는 고개를 푹 숙였다. 이제 와 보니, 로저는 바커스 부인 앞에서는 맥도 못 추리는구나.

그의 실상을 알아서 그런지 로저의 행동이 모두 뻔뻔스러워 보였다. 그가 부인을 대하는 것처럼 날 대해줬으면 하는데……. 물론 불가능하겠지만 말이다.


“재밌었어요.”

“둘이 친해졌구나. 로저는 누가 자신의 물건을 함부로 만지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 가끔 친척들이 놀러 와도 자신의 악기는 절대 못 만지게 해. 그거뿐이겠니? 아주 예민하단다.”

“그런가요?”

앞에 있는 고기 하나를 입안에 넣었다. 갓 구운 건지 씹을 때마다 육즙이 흘러나와 고소했다.


“음식은 어떻니?”

“맛있어요. 부인.”

바커스 부인은 싱긋 웃더니 다시 이세벨에게 시선을 옮겼다.


“딸이 참 똑똑하네요. 이세벨.”

“로저만 할까요.”

“로저는 이 가문의 피를 많이 이어받아서 그래요. 하지만 리제는…… 이세벨, 당신과 많이 닮았어요.”

그 말에 포크를 떨어트릴 뻔했다. 내가 누구와 닮았다고? 어쩐지 세상에서 가장 심한 욕을 들은 기분이다.


 
그건 이세벨도 마찬가진지 평온했던 그녀의 얼굴에 약간 주름이 잡혔다. 나중에 이세벨이 이 일로 나에게 화풀이를 하는 건 아닐까 좀 걱정됐다.


“꼭 이세벨, 당신의 어렸을 때 모습을 보는 것만 같아요. 정말, 이세벨이 결혼해서 이렇게 자신과 똑 닮은 딸을 낳을 줄은 몰랐는데…….”

이세벨이 고개를 들어 바커스 부인을 보았다.


“왜요?”

“당신은 예전부터 결혼하고 싶지 않아 했으니까요.”

“다 지난 일이죠. 또 그때는 너무 어렸어요.”

“그래도 나는 당신이 결혼하지 않고, 당신의 길로 가려는 줄 알았어요. 그래서 처음 당신의 결혼 소식을 들었을 때 매우 놀랐죠. 하지만 오늘 리제를 보고 나니 왜 당신이 결혼했는지 알 거 같아요.”

이러다 이세벨이 화를 내는 건 아닐까 걱정되었다. 하지만 적의 하나 없는 다정한 소리에 이세벨도 차마 침을 뱉지 못했다. 그녀는 애써 품위를 유지하며 고기만 씹었다.


“그래요? 그럼 어떤가요? 로저의 신부감으로는요.”

그녀의 입에서 뜬금없이 로저가 거론되었다. 묵묵히 식사하고 있던 로저가 먼저 포크를 떨어트렸다.


“어머. 전 좋죠!”

“그런가요?”

“둘이 사이도 좋아 보이고. 이참에 둘 다 성인식을 치르면 약혼식을 하는 게 어떨까요? 호호.”

나와 로저의 시선이 마주쳤다. 농, 농담이겠지?


“실리만 좋다면요.”

“정말요? 어쩜. 리제 같은 예쁜 아이가 우리 로저의 신부가 돼준다니 얼마나 좋을까요.”

바커스 부인과 이세벨은 정말로 우리를 결혼시킬 작정이었다. 그제야 나는 이세벨이 실케나 스웰이 아닌 날 이곳에 데려왔는지 깨달았다. 괜히 허튼짓하지 말고 빨리 어느 가문 도련님과 결혼이라도 해라, 이 뜻으로 데려왔구나!

안타깝게도 이곳에선 결혼한 여성에게 사회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권리가 꽤 제한되어 있다. 이세벨은 그걸 노린 거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이세벨이 이곳에 오자고 제안할 때 떼를 써서라도 거부해야 했는데.


“로저, 너의 생각은 어떻니?”

바커스 부인이 로저에게 물었다. 로저는 어깨를 약간 떨더니 입술을 달싹였다. 그의 보라색 눈동자가 동요하듯 움직였다.

제발, 말 잘해라. 너의 진심을 보여줘, 로저.


“……어머니가 좋다면야.”

설마.


“전 괜찮아요.”

저 마마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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