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 # 2장. 이세벨과 리제 (6) (11/47)


11 # 2장. 이세벨과 리제 (6)
2023.02.07.



“정말이니?”

“네. 정말이요.”

똑 부러지는 로저의 대답에 할 말을 잃었다.

날 몇 시간 봤다고!

바커스 부인 말이면 무조건 굽히고 들어가는 로저로 인해 정말로 약혼하게 생겼다.


“지금부터 성당을 잡아야 하는 건 아닐까요? 호호.”

“제가 이미 생각해둔 곳이 있어요.”

“어머, 어디요?”

이세벨과 바커스 부인이 진심인지 모를 대화를 나누었다. 그사이 나는 로저를 쏘아보며 식탁 밑에 있는 다리로 그의 무릎을 툭툭 쳤다.


‘너어, 무슨 짓이야?’

로저는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아무렇지 않게 식사했다. 그 모습이 얄미워 발을 뻗어 그의 무릎을 확 쳤다.


“윽!”

“로저, 왜 그러니?”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바이올린을 가르쳐 준다는 제안을 거절하고 책이나 읽었어야 했는데! 로저는 날 보더니 한쪽 입꼬리를 씩 올렸다. 뭔가 좋지 않은 예감이다. 일이 벌어지기 전에 로저의 입을 막으려 했지만, 그의 시선이 이세벨에게 닿았다.

늦었다.


“저기. 마르센 부인.”

“왜 그러니?”

“일주일에 한 번 리제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쳐주고 싶은데요.”

불난 집에 기름 붓는 격이었다. 하필 약혼 얘기로 들뜬 분위기인 지금 그는 나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쳐주겠다며 바커스 부인의 흥을 더 돋우었다.


“오, 그거 좋은 생각이구나, 로저!”

“……바이올린?”

반면 이세벨의 표정은 일그러졌다.


“리제가 바이올린을 배운다고?”

이세벨의 말투가 돋아 있었다.

달라진 이세벨의 태도에 잠시 흥분된 감정을 가라앉았다. 나에게 가정교사 한 명 곁에 두지 않던 이세벨은 로저 말이 달갑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녀는 내가 무언가를 배운다고 하면 질색을 하며 무조건 차단을 하는 사람이니까.

기회다. 이세벨이 단호하게 거절하면 분위기가 가라 앉을테고……. 그럼 저절로 결혼에 대한 얘기도 쏙 들어가지 않을까.


‘로저, 나이스!’

어느새 로저를 응원했다.


“네, 리제도 배우고 싶어 하고 저도 가르쳐주고 싶어서요.”

“리제가 바이올린을 배우고 싶어 한다고?”

“음, 관심은 있는 거 같아요.”

“혹시 리제가 바이올린에 재능이 있니?”

말과 다르게 이세벨은 내가 재능이 없길 바랐다.


“네? 아뇨.”

이세벨의 일과 별개로 나는 약간 자존심이 상했다.


“배우면 어느 정도 하겠지만요. 하지만 재능까지는 아니에요.”

“…….”

“활 짚는 것도 아직 능숙하지 못하고요. 그냥 평범해요.”

로저의 단호한 말이 분위기를 싸늘하게 만들었다. 이건……예상하지 못한 상황이다.


“하하. 이 애가 무슨 소릴 하는 거니? 이세벨, 너무 신경 쓰지 마요. 로저가 오늘 처음 가르치는 거라서 그런가 봐요.”

버커스 부인은 눈치를 보며 아들의 뒤처리를 했다. 그제야 로저는 분위기를 파악하고 쥐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았다.


“……아, 죄송해요. 재능이 없는 건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좀 없다고 해야 하나…….”

그건 그냥 없다는 말이잖아.


“로저, 말은 똑바로 해야지. 그리고 리제는 오늘 처음으로 배웠는데 어떻게 재능이 없다고 그러니?”

“…….”

“후천적 재능을 배제하면 안 되지. 그렇지 않나요? 이세벨.”

“로저. 네가 리제를 가르쳐줬으면 좋겠구나.”

바커스 부인이 상황을 무마하려 할 때, 이세벨이 대답했다. 흥미롭다는 듯 살짝 웃는 이세벨 표정에 바커스 부인은 그대로 입술을 벌렸다.


“정말요? 그래도 되나요? 부인?”

“그래. 그런 취미쯤 하나 있어야 나중에 써먹겠지.”

“그럼 지금 당장 시간을 정해도 돼요?”

“물론.”

“리제! 월요일은 어때? 아님 수요일은?”

아주 좋단다. 나를 가르치는 게 그리도 기쁜가? 지금 우리는 꼼짝없이 약혼하게 생겼는데. 그래도 저리 환한 표정을 보면 나도 마음이 들뜨지 않을 수 없다.

어쩔 도리가 없다. 생각해보면 로저에게 바이올린을 배우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일주일에 한 번씩 지긋지긋한 저택과 마을을 벗어날 수 있으니 어쩌면 행운이지 않을까.


“목요일이 좋아.”

“그래, 그럼 시간을 정하자. 난 오전이 좋은데, 넌?”

어느새 적극적으로 로저와 날짜, 시간을 의논하고 있었다. 끝내 합의 본 요일은 목요일 낮 11시였다.


“리제, 그럼 다음 주도 널 볼 수 있겠네?”

“잘 부탁드려요, 부인.”

“올 때마다 맛있는 걸 해주마.”

바커스 부인이 내 앞에 디저트를 쓱 내밀며 말했다. 직접 만든 건지 모양이 특이한 사과 파이였다. 바삭한 것과 동시에 사과의 달콤함이 입안 가득 퍼져 기분이 좋았다.

최고였다.


“실리. 애 버릇 나빠질 수도 있으니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문만 열어주세요.”

“그럴 수 있나요? 후에 제 아들과 결혼할 아이인데.”

“실리.”

일주일 뒤인 목요일이 기대됐다. 결혼 문제야 후의 일이고.


“그나저나 저번에 그분께 연락이 왔어요. 만났다면서요? 그래서 절 보자고 한 거죠? 이세벨.”

“……아니요. 그저 우연이었어요.”

이세벨과 실리는 다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둘의 이야기에 끼어들지 않은 대신 나와 로저는 식탁 아래에 있는 발로 서로를 툭툭 치며 괴롭혔다.

내가 한 번 그의 발을 툭 치면 로저는 봐주지 않고 내 무릎을 세게 가격했다. 나 또한 지는 건 못 참는 성격이라 발을 최대한 쭉 뻗어 그의 허벅지를 꾹 눌렀다.

전쟁터와 같은 식탁 아래와 달리 식탁 위에서 로저와 나는 편안히 식사를 이어갔다.

* * *

하녀들은 따듯한 차를 가져왔다. 식탁 위에 있는 그릇 안이 말끔하게 비워진 지 오래다. 그 차를 마시며 얼마나 떠들었을까, 노을이 저물었다.


“오늘은 이만 가야겠어요. 실리.”

“그런가요?”

“네.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올 시간이거든요.”

그녀 말대로 바커스와 펠리시아가 저택에 올 시간이었다. 먼저 일어난 이세벨이 살짝 구겨진 드레스 밑단을 정리했다. 그녀를 따라 나도 일어나려 했는데 로저가 마지막으로 나의 발을 툭 쳤다.

이대로 당할 수 없다.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있는 힘껏 발을 뻗었다.


“리제.”

바로 이세벨에게 들켰지만.


‘너 두고 보자.’

입 모양으로 말하자 로저는 천연덕스럽게 웃었다. 얄미운 놈.


“아쉬워요. 그래도 오랜만에 봐서 반가웠어요. 이세벨.”

“저도 마찬가지예요.”

“사실 걱정했거든요. 이세벨이 어렸을 때와 많이 달라져 있을까 봐.”

현관 밖을 나가기 전 바커스 부인이 미소를 지었다.

도대체 이세벨은 어떤 어린 시절을 보냈기에 바커스 부인이 자주 거론하는 것일까. 나에게 이세벨은 순수하고 동심이었던 시절이 존재하지 않는 사람과도 같아 이세벨의 어린 시절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런가요.”

“그때도 무뚝뚝하고 표정 변화가 거의 없었지요. 말을 한다 싶으면 항상 미래 얘기를 해서 지루했지만요. 오늘은 그 얘기를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세벨이네요. 전 그런 이세벨이 좋아요.”

“실리 또한 하나도 안 변했어요.”

둘은 정문까지 나가는 동안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나는 둘의 얘기를 몰래 들으면서 로저를 흘끗 보았다. 비록 오늘은 그에게 마지막 공격을 내어 주었지만 다음에는 없다.


‘잘 있어라, 마마보이.’

내가 손을 흔들자,


‘잘 가, 고지식한 리제.’

로저는 바로 갚았다.


 

* * *

마차에 올라탄 후 이세벨과 나는 그 어떤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사실 얘기할 기력도 없었다. 평소와 달리 오늘은 상황을 도통 예견할 수 없는 날이었다. 여러 가지 일이 있었다. 그중 기억에 남는 건 이세벨과 내가 닮았다는 소리다.


‘어디가 닮았다는 걸까?’

얼굴도, 성격도 모든 게 다 다른데.


‘그러고 보니 그녀는 어떻게 아버지를 만났지?’

이세벨과 아버지인 라치스 백작이 어떻게 만났는지 한 번도 듣지 못했다. 이세벨은 과거에 취한 사랑 얘기를 할 사람이 아니었다.

라치스 백작은 말이 많았지만 항상 일에 바빠 저택에 늦게 들어왔다. 그러니 둘의 결혼에 대한 얘기는 아무것도 들은 게 없다.

운명적인 만남은 절대 아닌 거 같고. 역시 흔한 정략결혼인 걸까?


‘그럼 아버지가 날 데려왔을 때, 이세벨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머리 색깔도, 눈 색깔도 다른 아주 낯선 아이.

내 시선을 느꼈는지 이세벨이 고개를 돌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멍청하게.”

“아무 생각 안 했어요.”

“거짓말이 점점 능숙해지는구나. 로저의 생각을 한 거겠지.”

“아니에요. 그냥…… 어머니의 어린 시절이 궁금했어요.”

솔직하게 말했다. 이세벨은 놀란 듯 눈에 띄게 동요하더니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다시 시선을 창문으로 돌렸다.


“별 걸 다 궁금해하는구나.”

대화는 거기서 끝이었다.

그 침묵 후에 나는 오늘 내가 얼마나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 * *



“잊을 게 따로 있지…….”

책상 위에 놓인 포장된 상자를 잊고 있던 거다. 오늘은 유릭의 생일이었다.

창밖은 벌써 노을이 저물고 있었다. 우체부는 이미 물건을 받고 배달하러 간 뒤였다. 무작정 펜턴 저택을 가기엔 유릭 할아버지에게 물건을 들킬까 봐 불안했다.

물건을 전해준 일은 쉬운 건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어려운 미션이었다. 퀘스트 마감 날짜는 오늘 11:59까지. 보상은 유릭의 환한 미소.


“제기랄.”

꼭 오늘 주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아니, 생일 선물은 생일날 줘야 의미 있지 않나. 하루 뒤에 주면 생일은 잊었다 뒤늦게 생각난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다. 우선 나가야겠다.


“아가씨? 어디 가세요?”

“마구간에! 먹이를 줘야 하거든!”

비티의 물음에 재빨리 답하며 밖으로 나갔다. 숨이 차게 뛰었다. 하늘은 빠르게 어두워지고 있었고, 날이 쌀쌀해졌다. 꽃밭에 도착한 나는 저 멀리 있는 펜턴 가를 발견했다.


‘자,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을까?’

우체부인 척 변장을 할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리 키 작고 어린 우체부는 없었다.


“리제 마르센?”

그때 뒤에서 유릭의 목소리가 들렸다. 환청인가 싶어 고개를 돌리니 아니나 다를까 유릭이 우두커니 서 있다. 그의 손에는 요정과 인어공주가 나오는 두툼한 책이 쥐어져 있다. 환청에 이어 환각까지.


“여기서 뭐해?”

그러다 나는 내 뺨을 찌르는 바람으로 인해 지금이 현실임을 깨달았다.


“너야말로 뭐 하는 거야?”

오늘 생일 인데.

유릭은 말을 머뭇거리다 책을 뒤로 숨겼다. 화려하고 아기자기한 책 표지는 이미 다 보았는데 말이지.


“……읽고 싶은데 할아버지가 계시니까 여기서 몰래 읽는 중이야.”

“이렇게 추운데? 손이 다 얼 거야.”

“이제 들어가려 했어. 넌?”

쥐고 있는 상자를 꽉 쥐었다. 좋아, 신의 뜻인지 적절한 때에 유릭을 만났고 이제 선물을 건네주기만 하면 된다.


“난……. 그게.”

“……왜 그래?”

유릭은 가만히 서 있는 날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도 내가 이상했다. 유릭에게 선물을 건네주는 것뿐인데 가슴이 떨렸다.


‘그러고 보니 나는 무슨 자격으로 유릭에게 선물을 주는 거지?’

그와 친한 사이도 아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유릭은 싫어하지 않았나? 그 오해가 풀렸다고 하지만 그래도 고작 몇 번 마주친 게 다였다.


“어디 아파?”

“전혀!”

“안 되겠다. 추우니까 어서 들어가는 게 좋겠어.”

이대로는 안 된다!


“케이크는 호박 케이크가 좋아, 아님 초콜릿 케이크가 좋아?”

“뭐?”

“아니……그게 아니라. 사실 너에게 주고 싶은 게 있어.”

슬그머니 선물 상자를 내밀었다.


“생일이지? 축하해, 유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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