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 2장. 이세벨과 리제 (7)
(12/47)
12 # 2장. 이세벨과 리제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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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 2장. 이세벨과 리제 (7)
2023.02.10.
유릭과 내 사이에 잠깐 침묵이 생겼다.
‘아, 너무 갑자기 줘버렸나?’
뻗은 손이 머쓱해 다시 뒤로 빼려 했다. 그 순간 유릭이 내 선물을 가져갔다. 내 선물은 예상치도 못했는지 그의 입술이 살짝 벌어져 있다. 아직 얼떨떨한 모양이다.
그래도 기뻐 보였다. 선물 상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 기대감이 잔뜩 있다. 그 표정이 딱 산타에게 선물을 받은 어린아이 같았다.
“……뜯어봐도 돼?”
“응? 당연하지.”
유릭은 포장지를 뜨기 시작했다.
‘왜 내가 떨리는 거지?’
손끝이 떨려서 나도 모르게 손을 뒤로 숨겼다. 상자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고 있음에도 물건이 어떨까 걱정이 앞섰다. 그 사이 흠집이라도 나거나 보석이 하나 떨어져 있으면 어쩌지.
“…….”
포장지가 다 뜯어지고 작은 상자가 나왔다. 뜸 들이던 유릭이 상자를 열자 전보다 반짝거리는 토끼 장식 고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우려와 달리 장식 고리는 보석숍에서 보았을 때보다 더 반짝거리고 화려했다. 흠집 하나 없이 제 모습을 드러낸 토끼 장식 고리는 노을 때문인지 처음 보았을 때보다 빛을 뽐냈다.
그중 내 취향을 저격했던 새초롬한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골랐지만 사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유릭 펜턴이었다. 그는 과연 마음에 들어 할까?
“……딱 하나밖에 남지 않았더라고. 어린이용이라 하지만……우린 아직 어리고.”
말을 더듬어가며 그의 표정을 살폈다. 유릭은 멍하니 장식 고리를 보다가 끝내 상자 안에서 물건을 꺼냈다.
자신의 손바닥 안에 있는 물건을 몇 번이나 살피던 그의 얼굴에 미소가 서서히 그려졌다. 옅은 미소였다.
예스!
“괜찮아? 마음에 들어?”
그의 미소를 본 나는 자신감을 가지고 물었다.
“……어떻게 산 거야?”
“어떻게 샀냐니? 가게 안에 들어가서 골랐어.”
“아니, 비싸 보이는 물건 같아서.”
유릭은 상자 안을 보다가 그곳에 적힌 로고를 뒤늦게 발견하고 흠칫했다.
「인어의 눈물」로고였다.
그러더니 그는 다시 장식 고리를 상자 안에 넣고 나에게 내밀었다. 유릭의 표정 또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미안하지만 난 이거 못 받아.”
“뭐? 설마 마음에 안 드는 거야?”
“「인어의 눈물」 물건이라니. 어떻게 받아.”
가격이 문제였다. 유릭의 말대로 열 살짜리 아이가 선물하기엔 「인어의 눈물」은 워낙 고가의 상품이었다. 당연히 부담스러울 수 있었다.
“걱정하지 마. 내가 산 게 아니야. 내가 고른 건 맞지만.”
“무슨 소리야?”
“우연히 보석숍에서 펜턴 부인을 만났어. 부인께서 나에게 부탁하신 거야. 너에게 이 물건을 전해 달라고. 네가 저택에 머물고 계신 할아버지로 인해 원치 않은 선물만 받을 테니 말이야.”
“……어머니께서?”
그는 다시 상자를 물끄러미 보았다. 어머니의 선물이라는 말에 나에게 뻗은 손을 도로 접었다.
받을지 말지 고민하는 유릭의 태도가 미적거렸다. 그 행동이 조금 답답했다.
“하지만 어머니께 이미 선물을 받았고…….”
“뭐?”
“이미 책 세트를 받았거든.”
“그건 네가 원하는 선물이 아니잖아?”
“…….”
“하아. 줘 봐!”
선물을 앞에 두고 생각에만 빠진 유릭을 보던 나는 상자를 가로챘다.
“가지고 있는 물건 없어?”
“물건이라니?”
“아무거나! 빨리!”
내가 재촉하자 그는 주머니를 뒤적거리고선 물건 하나를 꺼냈다. 열쇠묶음이었다.
적절한 물건에 나는 열쇠 묶음에 토끼 장식 고리를 걸어 유릭에게 보여주었다. 열쇠가 움직일 때마다 보석이 촘촘하게 박힌 토끼가 빛이 났다. 그 빛 때문인가 토끼의 표정이 살아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어때?”
“……귀여워.”
“이렇게 사용해. 지금처럼 열쇠묶음에다 걸어도 되고, 네 소중한 물건에 걸어도 돼. 알겠지?”
그는 내게 받은 열쇠 묶음을 올려다보았다.
“진짜 예쁘다.”
환한 미소가 유릭의 입가에 그려졌다. 정말로 좋아하는 그의 모습에 나는 내가 선물을 받은 것처럼 기뻐 덩달아 웃었다.
“정말? 정말 예뻐?”
“귀여워. 진짜 네가 고른 거야?”
유릭은 살짝 들뜨기도 했다. 그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몇 번이나 끄덕였다.
“딱 보고 네가 생각났어. 네가 좋아할 거 같아서.”
“뭐?”
“좋아하지? 이런 모양의 캐릭터 말이야. 사실 나도 그래.”
유릭의 볼이 약간 상기되었다. 부끄러워하기는.
“정말 고마워.”
유릭을 고맙다며 수줍게 말했다. 그의 진심이 느껴져서 나는 몇 번이나 그에게 선물을 더 주고 싶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내가 산 거 아니니까 부인께 감사하다 해.”
“그래도 고마워. 난 너한테……못된 소리도 했는데.”
그는 아직까지 공원에서 있었던 일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난 원래 그런 건 빨리 잊어.”
“……넌 생일이 언제야?”
유릭이 대뜸 물었다.
“나? 생일?”
“응.”
“…….”
입이 다물어졌다.
“왜 그래?”
“아, 아직 멀어. 9월이거든.”
“그래?”
유릭은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꼭 기억하고 있을게.”
“흠.”
“정말로.”
“좋아, 믿어줄게.”
내가 웃자 유릭도 따라 웃었다.
‘생일이라.’
얼떨결에 생일을 말했지만 실제 내가 태어난 일은 모른다. 날 낳은 그 여자는 내 생일조차 알려주지 않고 마르센 저택에 떠넘겼다고 했다.
그렇게 다섯 살 때까지는 생일 없이 지냈다. 내 기억 속 나의 생일 파티를 치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여섯 살이 되던 해 이세벨이 나에게 와 ‘9월 26일’이라는 날짜를 알려주었다.
‘네가 우리 저택에 처음 온 날이다. 생일을 모르니 그때를 생일로 하자. 애초에 널 그날로 출생 신고를 했고.’
‘…….’
‘그래야 나중에 성인식을 치를 때 골치 안 아프니 말이야.’
이세벨은 그 말을 끝으로 내 생일에 대해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 후 9월 26일이 몇 번이나 찾아왔지만 저택은 평상시처럼 단조롭게 흘러갔다. 누군가 나의 생일이라며 축하의 인사를 건네지도 않았다.
그렇게 9월 26일이란 날짜가 기억 속에서 사라질 줄 알았는데…….
“리제.”
“……응?”
“넌 뭘 좋아해?”
유릭은 나에게 이것저것 물어봤다. 나의 취미, 특기, 하고 싶은 거, 좋아하는 거. 그러면서 유릭도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나에게 말해주었다.
유릭은 책에서 읽었던 것보다 더 세심했고, 좀 더 부드러웠다. 비밀도 많이 가지고 있었다.
“재능이 많구나. 체스도 둘 줄 알아? 나도 조금 둘 줄 아는데 나중에 같이 대결해보자.”
“응, 좋아.”
그도 나에 대해서 알아가는 시간을 가졌다. 어느새 우리는 펜턴 가와 마르센 가의 사이를 잊고 평범한 친구처럼 이야기를 나누었다.
유릭이 두 살 위이긴 했지만 유릭도 날 편안하게 대했고,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와 유릭은 날이 어두워져 언덕 아래에 불빛이 보일 때까지 얘기했다. 얘기하느라 시간을 다 소모한 나는 뒤늦게 자리에 일어났다.
“이제 가봐야겠다.”
“벌써?”
“너도 빨리 들어가 봐, 부인이 걱정하실 거야.”
“……그래.”
“다음에 또 만나면 얘기하자!”
유릭은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고 몸을 일으켰다. 마르센 저택으로 향한 나는 저 멀리 터벅터벅 걷고 있는 유릭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유릭!”
저 멀리 있는 유릭을 향해 소리치자 그가 고개를 돌렸다. 나는 있는 힘껏 손을 흔들었다.
“다시 한번 생일 축하해!”
너의 생일은 진심으로 축하해. 유릭.
* * *
유릭을 다시 보게 된 건 삼일 뒤였다.
이세벨을 따라 새 바이올린을 사기 위해 장터로 내려왔다.
나를 사주는 겸 스웰과 실케의 악기도 사주기 위해 그들도 동행 할 때였다. 쌍둥이들은 한 시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조잘조잘 떠들었고, 나는 묵묵히 이세벨의 뒤를 졸졸 쫓았다.
‘어? 유릭이다.’
길거리를 지나가는데 유릭은 도서관에 갔다 왔는지 광장에 책을 쥐고 앉아 있었다. 다가가 대화라도 나누고 싶었지만 이세벨과 형제의 눈치가 보였다.
“……!”
그때 유릭과 나의 눈이 마주쳤다. 살짝 웃으며 엉덩이를 떼는 유릭과 달리 나는 안절부절못했다.
그는 내 상황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주머니에 열쇠고리를 꺼내더니 흔들었다.
토끼 모양의 장식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 모습에 뭔가 장난기가 생겨 토끼와 똑같은 새초롬한 표정을 지으며 흉내 냈다. 유릭은 참지 못하고 소리 내 웃었다.
“리제, 뭐 해? 이러다 길 잃어버린다.”
스웰이 우두커니 서 있는 날 불렀다. 나는 뒤로 돌기 전 유릭에게 입 모양으로 크게 말했다.
‘나중에 또 봐!’
뒤로 돌아 저 멀리 있는 이세벨 쪽으로 가려 했다.
“!”
누군가 내 손을 꽉 잡았다. 놀라 고개를 돌아보니 유릭이 뛰어왔는지 거친 숨을 내뱉으며 내 손안에 무언갈 꽉 쥐여줬다.
그리고는 그는 입 모양으로 ‘나중에 봐.’라고 말하며 재빨리 시야에서 사라졌다.
멍하니 서서 손을 펼치자 그 안에 딸기 맛과 레몬 맛 사탕이 있었다. 사탕 껍질에는 유릭이 그린 건지 아이처럼 해맑게 웃는 아기자기한 토끼 그림이 있다.
‘이 사탕……먹을 수 있을까?’
먹기 아까운데.
“리제!”
이번인 이세벨이 나의 이름을 불렀다. 서둘러 사탕을 주머니 안에 집어넣은 다음 이세벨이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 * *
어김없이 호샤 마을 장터는 시끌벅적했다. 사람이 가득한 길거리에 모자를 꾹 눌러쓴 채 천으로 얼굴을 반쯤 가린 남성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그는 장터 구석에서 체스를 두는 사람들을 발견하고 곧바로 발걸음을 옮겼다.
“잠, 잠시만 좀 지나가겠습니다!”
구경꾼으로 인해 그곳에 사람이 많아지자 남성은 더 모자를 꾹 눌러썼다. 사람을 비집고 그 틈으로 들어간 그는 체스보드 앞에 앉아 있는 어엿한 청년들을 보며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자신이 찾는 이가 아니었다.
오늘도 찾지 못하는 것인가. 남자는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이보시오. 사람을 밀치고 가는 게 어딨소?”
그때 모자를 꾹 눌러쓴 남자 뒤에 있던 사람이 불만스러운 목소리를 내뱉었다.
“아, 죄송합니다.”
“비키시오. 거기 앞은 원래 내 자리니까.”
사람은 남자를 밀친 뒤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남자는 어쩔 줄 모르며 머뭇거리다 조심스레 앞에 있는 사람의 등을 툭툭 쳤다. 한참 체스 구경을 하고 있던 그는 자신의 유희를 방해한 남자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저기. 하나만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뭐요?”
“혹시 이곳에 여자아이 안 왔습니까? 빨간색 머리에 키는 이만한 여자아입니다. 옷차림은…….”
“뭐? 여자아이?”
반응이 있자 남자는 앞으로 와 설명했다.
“네. 귀족처럼 보이는 예쁘장한 여자아이인데……!”
“뭐? 모르니까 빨리 나오시오! 빨리!”
성난 호통에 모자를 눌러쓴 남자는 사람들 틈으로 벗어났다.
‘빨리 찾아야 하는데. 그 아이를…….’
남자는 혹여 모자가 벗겨질까 고개를 약간 숙인 채 장터 밖으로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