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 # 3장. 고립된 폰 (1) (13/47)


13 # 3장. 고립된 폰 (1)
2023.02.14.


앞에 앉아 있는 로저를 흘끗 보다가 그의 따가운 눈초리에 바로 시선을 피했다.

로저는 의자를 거꾸로 돌려 등받이 위에 자신의 턱을 올려두었다. 무서운 건 날카로운 눈빛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내 자세가 어정쩡하면 바로 쥐고 있던 활로 내 몸을 가격했다.

지금도.


“아프잖아!”

참다못한 내가 불만스러운 목소리를 터트리자 로저가 바로 눈살을 찌푸렸다. 세상에. 처음 바이올린을 가르쳐주었을 때, 그 상냥함은 어디에도 볼 수 없었다.

차근차근 알려주었던 그때와 다르게 지금은 웬 호랑이 선생님 한 명이 앞에 서 있었다.

홀라당 속은 거였다.


“자세 불량.”

“……!”

“자꾸 이상한 곳을 짚고.”

“…….”

로저가 지적하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내게 바이올린에 재능이 없다는 로저의 말은 백 퍼센트 진실이었다. 아직까지 자세가 어색했고, 고작 줄 하나 짚는 건데 자꾸만 이상한 곳을 짚었다.

더 큰 문제는 이상한 곳을 짚어 소리를 냈는데도 그 소리가 틀렸다는 걸 모른다는 거다. 반면 로저는 타고난 절대음감을 가지고 태어났는지 음이 약간 미세해도 바로 잡아냈다. 심지어 로저는 지나친 완벽주의였다.

조금만 실수하면 버럭 하는 아주 기가 찬 성격도 가지고 있었다.


“리제.”

“네, 네. 잘못했습니다. 처음부터 다시 하겠습니다.”

그와 나의 성격이 상극인 건 더 최악이었다. 로저는 나와 친해질수록 숨겼던 괴팍한 성격을 아낌없이 보여주었다.


“거기가 아니라고 했잖아. 리제.”

“그렇군요. 다시 해보겠습니다.”

다시 용기를 내 소리를 내는데 어김없이 로저의 한숨이 들렸다. 나 또한 슬슬 화가 나고 답답해 쥐고 있던 바이올린을 내려놓고 싶었다.


‘이놈의 바이올린!’

바이올린은 생각보다 매우 까다로운 악기라 조금만 잘못 짚어도 소리가 이상하게 났다. 나는 때때로 손가락이 큰 사람들은 바이올린을 연주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로저는 헤매는 날 위해 줄을 짚어야 하는 위치에 스티커를 붙어주었다. 그래도 정확한 음 찾기가 어려웠다.

인내심 한계로 인해 활을 내려놓기 직전이었다.


“얘들아. 간식 가져 왔단다. 먹고 하렴.”

타이밍 좋게 버커스 부인이 마카롱이 든 접시를 가지고 안으로 슬며시 들어왔다. 저번 주에는 손수 만든 과자를 주셨는데 이번에도 직접 만드셨는지 마카롱이 살짝 뜨거웠다.

기쁜 나머지 로저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바이올린과 활을 조심히 내려뒀다. 로저도 고생한 나에게 더 이상 꼬투리잡지 않았다.


“연습은 잘 되어 가니?”

“네. 완전히 잘 되어 가고 있어요.”

기계처럼 나오는 로저의 대답에 나는 어이가 없었다. 누가 마마보이 아니랄까봐.

방금까지 나에게 화를 낸 건 언제고 이제는 연습이 순조롭게 잘 되어가고 있다고 한다.


‘그게 연습이 잘 되어 가고 있었던 거군요. 선생님.’

로저를 바라보는데 그가 나의 허리를 팔꿈치로 툭 쳤다. 그 때문에 손에 있던 마카롱을 떨어트릴 뻔했다. 하지만 부인 앞에서 로저와 싸울 수 없어 그를 살짝 쏘아보기만 했다.


“리제는 어때? 이제 2주째인데 재미는 있어?”

부인이 나에게 질문했다.


“네. 무척 재밌어요.”

근데 나도 만만치 않다. 자연스레 웃는 얼굴로 거짓말을 했다.

이번에는 로저가 의심스럽다는 눈빛으로 날 쳐다보았다. 나는 그가 했던 거처럼 몰래 팔꿈치로 그의 허리를 찔렀다. 나와 달리 로저는 참지 못하고 바로 마카롱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부인이 기껏 만든 마카롱의 겉 부분이 살짝 부서졌다.


“어머, 로저! 조심하렴!”

“죄, 죄송해요. 어머니.”

로저는 마카롱을 주우면서 나를 한 번 쳐다보았다.


“언젠간 너희 둘이 합주를 했으면 좋겠구나. 그럼 이세벨도 좋아할 거야.”

“그게 가능할까요?”

“가능하다니?”

“저와 같이 합주를 하기엔 리제의 실력이…….”

로저가 진심으로 말했다. 솔직하게 말하는 그에게 심통이 나 다시 한번 그의 옆구리를 치려고 했지만 꾹 참았다.


“제가 열심히 노력할게요. 부인.”

“그래. 아, 내가 너무 방해했지? 이제 나갈 테니 계속 연습하렴.”

바커스 부인은 그 말을 하고선 바로 방 밖으로 나갔다.

다시 로저와 나만이 남았을 때, 우리는 뭐라 할 것 없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그 실력으로 이번 생에 나랑 합주할 수 있겠어?”

“흥, 그럼 다음 생에 하면 되지. 한 번 생 마감하고 살아 있는데, 다음 생이라고 없겠어?”

“뭔 소린지 모르겠지만 넌 다다음 생에도 안 될걸.”

“너 바이올린 활로 맞아본 적 있어?”

이 꼬맹이가 나의 승부욕을 자극했다.


“맞아본 적은 없지만 너야말로 조심해. 괜히 휘둘렀다가 네가 도로 맞을 거 같으니까.”

“이 마마보이가.”

“마마보이? 그게 뭐야?”

로저가 물었다.


“부인과 네가 아주 사이좋다는 뜻이야.”

“그런 뜻이 아닌 거 같지만. 뭐, 사이가 좋은 건 맞긴 하지.”

그래, 사이가 좋아서 정말 부럽다!

나와 로저는 서로 몇 마디 나눈 뒤 다시 연습했다. 재능이 중요하다 하지만 노력을 이길 순 없다 하였다. 매일 같이 연습해서 저 로저의 입을 딱 벌어지게 만들어 줄 생각이었다.

그 마음가짐으로 열심히 배웠다.


 

* * *

마차에 올라탄 나는 몸을 늘어트렸다. 로저에게 일이 생겨 평소와 달리 한 시간가량 밖에 연습을 못 했지만 기력이 소진되었다. 바이올린 연습을 하면서 로저와 계속 말다툼을 해 그런 것일 거다.


‘이제 저택에 가서 뭘 하지?’

누워있으면 이세벨이 게으르고 느리다며 날 혼낼 테고……. 책을 읽으면 또 뭐라고 할 테고……. 체스를 두면 바로 치워 버릴 테고…….

스웰이나 실케의 뒤처리만 하다 저녁때 즈음에는 학교에서 돌아온 펠리시아와 버나드에게 이리저리 끌려다닐지도 모른다.


‘버나드는 유릭과 동갑인데 왜 그렇게 하는 행동이 다르지?’

차남인 버나드가 유릭의 반만 닮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내내 했다. 그게 어렵다면 기숙사학교에서 지내고 있는 장남인 로드니 마르센이 어서 빨리 집에 왔으면. 그도 약간 제멋대로 하는 경향이 있으나 그래도 형제 중 나랑 가장 말이 잘 통했다.


‘그냥 저택에 들어가기 싫다.’

한 시간이나 일찍 끝났으니 농땡이나 피워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은 얼마 안 가 계획으로 바뀌었고 곧장 실현했다. 마르센 저택이 있는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마차에서 내렸다.


“아가씨! 또 몰래 돌아다녔다가 마님께 혼나요!”

“언제는 안 혼났어? 먼저 저택에 가 있어. 내 얘기는 하지 말고!”

마차를 저택에 보낸 후 재빠르게 도서관으로 향했다. 어쩌면 그곳에서 유릭을 만날 수도 있었다.

도서관으로 가는 지름길인 장터를 보았다. 호샤 마을 장터는 워낙 유명하고 넓어 언제나 사람이 북적거렸지만 이곳을 지나치지 않고 목적지까지 가려면 마을 반 바퀴를 돌아야 한다.

바이올린 가방을 뒤로 메고 장터로 걷는 나는 「인어의 눈물」을 지나쳤다. 그러던 중 상점 안 커튼을 정리하려는 마스터와 눈이 잠깐 마주쳤다.


“…….”

“…….”

멀뚱히 보는 나와 다르게 마스터는 어색하게 웃더니 바로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정리하던 커튼을 마저 건드리지 않고 상점 안으로 몸을 돌렸다.

까칠하긴.

나도 다시 걸음을 옮겼다. 바이올린 가방을 보호하며 조심히 걷는데 자꾸만 어깨가 부딪쳤다. 걸음이 불안정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반 바퀴 돌걸. 이러다 넘어지면 드레스가 더럽혀질 거다.


‘넘어지지 말자. 넘어지지 말……!’

“아!”

그 염려대로 넘어지고 말았다. 등이 아닌 앞으로 넘어져 매고 있던 바이올린을 지켜낼 수 있었지만 손바닥이 다 까졌는지 따가웠다. 이세벨이 까진 손을 보면 또 뭐라고 할 텐데…….


“미안, 애야. 괜찮니?”

나와 부딪친 사람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날 부축했다. 나는 우선 바이올린이 괜찮은가 확인한 후 드레스에 묻은 흙을 털어냈다.


“미안하구나. 앞이 잘 안 보여서.”

“괜찮아요.”

고개를 올려 나와 넘어진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남성은 딱 봐도 귀족이라고 느껴질 만큼 단정한 옷차림에 말끔한 모습이었다. 반면 얼굴은 모자를 꾹 눌러쓰고 있었고 목도리로 입 주변을 다 가려져 있다.


‘저러니 앞이 잘 안 보이지.’

뭔가 수상해 보이기도 했다.


“정말로 괜찮은 거니? 손이 다 까졌는데.”

“아무렇지도 않아요.”

“미안하구……응?”

내 손을 살피던 남성이 고개를 올려 날 보았다. 그러자마자 그의 표정이 마치 예전에 헤어졌던 자신의 딸을 만난 거처럼 변했다.


“……넌!”

“네?”

날 알고 있나? 하지만 나는 바커스 부인이나 펜턴 부인 외에 다른 귀족들과 안면이 없었다.


“거기서 뭘 하고 있어?”

그 중년 남자에게 동행자가 있었는지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곧 그 동행자가 나타나자 나의 행동이 잠깐 정지되었다. 유릭과 같은 은발 머리에 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저 남자는 분명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아, 아이마르.”

“……무슨 일이지?”

“아, 잠깐 이 아이와 넘어졌는데 말이야.”

저 이름을 들으니 확실해졌다. 그는 펜턴 가 공작이 맞다.

왜 이런 이른 시간에 장터에 있는 거지? 본래라면 수도에 있는 자신의 무역 회사에서 일하고 있을 텐데?

내가 당황하고 있을 때 공작도 날 발견했다.


“……익숙한 얼굴인데.”

“아, 안녕하세요. 리, 리제 마르센이라고 합니다.”

주저하다 결국 인사했다. 그러자 공작은 내가 별로 반갑지 않은지 놀라는 기색 말고는 어떤 표정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 반갑다.”

“…….”

“근데 자네는 장터 구경을 끝냈나? 슬슬 지치는데 말이야.”

펜턴 공작은 나에게 무심했다. 그게 당연했다. 아버지와 펜턴 공작의 사이는 유명할 정도로 좋지 않았다.

괜히 분위기가 어색해질까 자리에서 벗어나려 했다. 근처 강에 가서 더럽혀진 손을 씻는 것이 우선이었다.

조용히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누군가 내 어깨를 잡았다.


“기다려보게! 저 아이야!”

“……?”

나와 부딪쳤던 그 남자다.


“내 말이 맞잖아! 마르센 가의 자식 중 한 명이라 했지! 저 애야, 저 애!”

내가 뭘 어쨌다는 거지? 모르는 사이에 실수라도 한 걸까 겁먹고 있는데 남자는 무척이나 날 반가워하며 환하게 웃고 있다.


“저 아이가? 저 아이는 고작 열 살이야. 키토.”

“맞아! 틀림없네! 아이마르!”

익숙한 이름에 움찔했다. 키토라면 분명……키토 남작?

나에게 편지를 보냈던 사람이었다. 또한 누구나 다 알만한 유명인사였다. 놀란 나는 손이 까진 것도 다 잊은 채 멍청하게 서 있었다.


“이름이 리제라고 했니?”

“……네.”

“갑자기 미안하구나. 사실 널 찾기 위해 마르센 가에 편지를 보냈는데 답장이 오지 않아서 말이야. 그래서 난 네가 마르센 가가 아닌 다른 집안의 자식인 줄 알았단다. 계속 찾고 있었지.”

그는 목도리를 슬쩍 내리더니 인자하게 웃어보았다. 그제야 삐죽 나온 회색 머리와 함께 인자한 얼굴을 드러냈다. 언젠가 신문에서 한 번 보았던 그의 초상화가 떠올랐다.


 
그는 자신의 얼굴을 들킬까 봐 목도리를 다시 끌어 올려 입가를 가렸다.


“왜 답장하지 않았니?”

“아, 보지 못했어요.”

아직 얼떨떨한 상태로 대답했다. 편지라면 이세벨 몰래 보기 위해 공원에 가져갔다가 잃어버렸다.


“이런. 편지가 잘못 간 모양이구나.”

“……근데 왜 저에게 편지를 보내셨나요?”

궁금했다.


“여긴 너무 시끄럽구나. 광장에 나가 얘기할까?”

“네?”

“여태 널 찾은 나를 위해 한 번만 시간을 내주렴. 리제.”

키토 남작의 말에 곁에 있던 펜턴 공작이 한마디 했다.


“진짜 자네는 고집불통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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