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 # 3장. 고립된 폰 (2) (14/47)


14 # 3장. 고립된 폰 (2)
2023.02.17.



 
인적이 드문 광장 구석에 도착한 키토 남작은 비어 있는 벤치에 앉았다. 그는 잔뜩 움츠러든 내 경계심을 풀어주기 위해 몇 번이나 다정한 말을 내뱉었다.


“나는 수상한 사람이 아니란다. 걱정 말렴.”

솔직히 그가 날 납치하거나 협박할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키토 남작을 신뢰하기보다는 옆에 펜턴 공작이 있기 때문이었다. 즉, 내가 그를 따라온 이유는 펜턴 공작의 존재가 컸다.

그 때문에 나는 펜턴 공작이 어디 멀리 사라지는 건 아닐까 불안했다. 그가 자리를 지킨다면 나도 생각해둔 변명 중 하나를 꺼내 저택으로 도망갈 생각이었다.


“……저놈이 바보 같아도 너에게 해를 끼칠 만한 사람이 아니란다.”

펜턴 공작은 내 걱정을 알아차리듯 한마디 했다. 그래도 내가 쉽게 믿지 못하자 공작은 자리를 비키는 대신 내 옆을 꼭 지켰다.


“잠깐만 기다리렴. 이럴 줄 알고 내가 항상 챙기거든!”

무엇을? 키토 남작이 웃으며 말했다.


“이런. 하필이면 맨 밑 구석에 있는 모양이군!”

키토 남작은 날 앞에 앉혀두고 가방을 뒤적거렸다. 의사들이 들고 다닐법한 가죽 가방이었다. 밑은 다 닳은 채였고, 군데군데 구멍이 뚫려 있어 외관적으로 보기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가 손을 뒤적일 때마다 가방이 터지는 게 아닐까 걱정되었다.

낑낑거리며 가방 깊숙이 손을 넣던 키토남작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는 물건을 놓칠세라 빠르게 가방 밖으로 손을 꺼냈다. 그러자 접이식 체스보드가 나왔다.


‘웬 체스보드?’

키토 남작은 체스보드를 펴고선 그 안에 들어 있는 기물들을 빼내었다.


“도대체 뭘 할 생각이야? 키토.”

“가만히 있어 봐! 자네는 너무 급해서 탈이야.”

키토 남작의 호통에 펜턴 공작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 둘을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그나저나 키토 남작과 펜턴 공작이 꽤 친하구나.’

작위가 꽤 차이 나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서로 이름을 부르는 걸 보아하니.

펜턴 공작은 막무가내인 키토 남작을 못마땅해하면서 성질을 부리거나 협박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상황이 익숙한 듯 자신의 성질을 가라앉힐 뿐이다.


“말을 정정해야겠구나. 저놈은 아주 바보인 데다가 너의 귀한 시간을 뺏는 짓을 하고 있지.”

펜턴 공작이 작게 실소를 내뱉었다.


“무슨 섭섭한 소리, 아이마르! 난 지금 유망주를 발굴하고 있는 거라고. 아주 위대한 일이지!”

키토 남작은 체스보드 위에 말을 다 올려놓은 뒤 날 빤히 바라보았다. 설마, 지금 나와 체스를 둘 생각인가?


“이 아이의 의견은 물어보지도 않고 너 혼자 신났군.”

“이 아이 체스 두는 걸 보면 네 생각도 달라질걸.”

“자네, 정말 유력한 다음 챔피언 후보가 맞나?”

펜턴 공작이 불만스럽게 말했지만 키토 남작은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준비한 체스용 시계까지 옆에 둔 남작은 기물을 제 손으로 움직이고 싶어 손이 근질거리는 거 같았다.


“……자, 리제.”

기대에 찬 눈으로 날 바라보는 남작을 보면 체스 말을 움직이는 게 맞는 거 같다. 하지만 내 손이 선뜻 움직여지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것도 있지만 왜 키토 남작과 체스를 둬야 하는지 상황파악이 덜 됐다.


“리제?”

“……저기, 죄송하지만 어머니께서 기다리셔서…….”

“흠, 그럼 이건 어때? 날 이기면 50금화를 주마.”

50금화? 입이 자연스레 벌어졌다.


“쯧쯧, 이제는 돈으로 유혹하다니.”

“아이마르. 자네는 입 다물게.”

50금화면 내가 사고 싶은 것들은 다 사고도 남는 금액이었다.


“정말 줄 수 있어요?”

“그럼.”

물끄러미 체스보드를 바라보았다. 다행히 난 체스를 좋아했다.

이곳에 태어난 후 나의 지루함을 달래주는 건 바로 체스였다. 스웰 방구석에 있는 체스보드를 가져와 혼자 두기 시작한 것이 계기였다. 규칙 같은 경우 빙의 전 체스를 배우는 친구의 말을 흘려들었던 적이 있었다.


“체스는 언제부터 뒀니?”

“……아마 다섯 살 때부터 해본 거 같아요.”

“가르쳐주는 사람은 없었고?”

“저 혼자 익혔어요.”

키토 남작은 연달아 물었다.


“너 혼자서? 정말이니?”

“네. 혼자 교본을 찾아서.”

“그럼 체스는 여태 누구랑 둔 거니?”

“……혼자요.”

키토 남작은 믿을 수 없다는 듯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한 번은 형제들을 꼬드겨 체스를 둔 적이 있었지만 다들 빠른 패배에 금방 흥미를 잃었다. 그때부터 늘 내 상대는 나였다.

눈을 감고 둔 적도 있었다. 경기 기록을 하나하나 따라가며 둔 적도 있다. 혼자 전략을 익히고 복기를 해보았다. 마침내 이를 처음 실전으로 써먹고 체크메이트를 외쳤을 때 나는 희열에 가득 차 설레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엔 체스를 거의 두지 못했어요.”

“뭐? 왜?”

키토 남작의 물음에 나는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원인을 물으신다면 내 앞에 있는 이 사람이 보낸 편지 때문이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들뜬 키토 남작은 내가 입을 열기 기다렸다.

근데 또 키토 남작과 만났다. 이를 이세벨이 알아 차라기라도 하면…….


“죄송하지만……50금화를 건다고 하셔도 체스 경기는 힘들 거 같아요.”

삼십 분 안에 저택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그 이유 말고도 여기서 남작과 친해지면 그가 또 마르센 저택에 편지를 보낼 수 있었다. 그럼 이세벨은 내 방에 숨겨진 체스보드를 빼앗을 게 분명했다.


“갑자기 왜 그러니?”

“저택으로 가야 해요. 어머니께서 절 찾으실 거예요.”

“그럼 내가 직접 가 마르센 부인에게 상황을 말해줄게.”

큰일 날 소리였다.


“안 돼요!”

내 다급한 소리에 키토 남작과 펜턴 공작은 살짝 놀랬다.


“사실 제 어머니께서 제가 체스 두는 걸 아주 싫어하세요.”

“이유를 모르겠구나. 체스는 아주 유익한 게임인데 말이야.”

키토 남작은 정말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물었다. 여기서 어떤 대답을 꺼내야 할까.


“이유를 알 것 같군. 너 같이 재능이 있지 않고서야 누가 체스로 밥벌이를 하나. 마르센 부인은 저 애가 취미로만 하길 바라겠지.”

듣고 있던 공작이 날 도왔다. 그러자 키토 남작도 이해가 간다는 듯 인상을 폈다.


“아, 그렇구나! 너 챔피언이 꿈이니?”

“네? 그건 아닌데요.”

“뭐?”

“어머니께서 취미로 두는 것도 싫어하세요. 그리고 정말 30분 안에 저택에 돌아가지 않으면 어머니께서 화내실 거예요.”

이 정도 얘기했으면 알아차리고 날 보내주겠지, 싶었다. 키토 남작은 잠시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럼 이건 어떠니? 내가 즐겨하지 않지만 불릿 체스를 하는 거야.”

‘기어코 체스를 두겠단 말이구나.’

체스를 두지 않으면 끝까지 안 보내줄 거 같다. 슬쩍 그의 눈치를 보던 나는 일어날 타이밍을 놓쳤다.


“불릿 체스가 무엇인 줄 알지?”

고개를 끄덕였다.

쉽게 말하면 속기 체스였다. 보통 오랜 기간 동안 수를 두는 방식과 달리 불릿 체스는 단 몇 분 만에 수를 읽고 생각해 말을 옮겨야 했다.


“그리고 네 어머니께 오늘 일은 말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마.”

“하지만…….”

“네가 그냥 가버리면 아쉬운 내가 체스를 한 번만 둬달라고 편지를 보낼 거 같은데.”

그는 상당히 고집이 있었다.

어차피 상대는 유명한 키토 남작이었다. 내가 전력을 다한다 해도 몇 분 못 가서 질 게 뻔했다.


“딱 한 판만이에요.”

“좋아, 그럼 바로 하자꾸나.”

키토 남작은 혹여 내가 말을 바꿀까 서둘러 게임을 진행했다.

오랜만에 두는 체스에 갑자기 가슴이 뛰었다. 자리를 지키는 기물들을 보자 머리가 순식간에 복잡해졌다.

심지어 불릿 체스였다. 상당한 집중력이 필요했다. 시간에 쫓겨 한 번 기물을 잘못 이동시켰다가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하게 된다.


“그래, 처음엔 폰을 움직이는구나. 정석이지.”

게임이 시작됐다.

웃음기가 가득했던 키토 남작의 얼굴도 사뭇 진지해졌다. 나와 키토 남작은 서로 말없이 오프닝 게임에 집중하며 기물들을 빠르게 움직였다.


“빠르군.”

구경하던 공작이 말했다. 그 말대로 나와 키토 남작은 몇 분이 아닌 거의 몇 초로, 빠르게 말을 잡았다. 원래 이렇게 속도가 빨랐나?

빠른 스피드에 자신 없다던 키토 남작이 속도를 점차 올렸다. 그 속도에 휩쓸렸다.

초첨은 오로지 체스보드. 그리고 체스보드 위에 올라가 있는 기물들에게 향해 있었다.

키토 남작은 빠르게 나의 약점을 치고 들어왔다. 짧은 시간에 생각한 수라고 믿기지 못할 만큼 정확하게 날 공격했다. 심지어 내가 그럴싸한 사잇수를 두어도 통하지 않았다.

당황한 내가 왼쪽에 있는 룩을 보지 못하고 무심코 기물을 옳긴 건 명백한 실수였다. 그 탓에 키토 남작은 바로 높은 기물을 잡고 자신의 판을 유리하게 만들 수 있는 분위기를 갖게 되었다.


‘망했다.’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처음부터 진 게임이었는데……. 초조했다.


“……너무 시간에 쫓기지 말렴. 생각해.”

키토 남작은 진땀을 흐르는 날 보며 속삭였다. 그의 말대로 잠시 시간을 두고 이 위기를 어떻게 헤쳐나갈까 탐색했지만 마땅한 수가 없다.

더 시간을 쓸 수 없다.

이대로 먼저 악수를 청하고 저택에 가려 했지만 손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의 눈은 작은 희망이라도 찾는 듯 체스보드를 뚫어지게 보고 있다.


‘…….’

내 머릿속엔 앞에 있는 체스판이 그대로 그려졌다. 그곳에서 말이 스스로 움직이며 수만 가지의 확률과 그에 따른 전략을 만들어낸다. 기물들의 이동이 반복되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고 반복되고를 번복하며.


 
그리고 현실로 돌아온 나는 과감히 기물의 위치를 움직였다.


“……!”

“……오.”

체스판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던 펜턴 공작의 입에서 감탄사가 나왔다. 동시에 키토 남작은 기물을 잡다가 말고 나를 보더니 씩 웃는다.

위기에서 벗어나고 조금은 유리해진 걸까, 생각했다. 그것도 잠시였다.

키토 남작은 전략을 바꾸고선 날 구석으로 몰아세웠다. 그는 빠르고 치밀하게 내 킹의 목숨을 내몰며 기물들을 하나씩 무찔러 갔다.


“체크.”

체크. 도망갈 곳이 없다.


“체크.”

궁지에 몰렸다. 이길 확신이 없던 나는 무승부를 이끌려 했지만 키토 남작은 노련했다. 무승부는 허락하지 않았다.


“체크메이트.”

나의 패였다.


“아…….”

게임이 끝나고 나는 한동안 체스보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표정을 보니 아쉬운 모양이구나.”

“……죄송해요.”

정신을 차린 뒤 서둘러 키토 남작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는 내 악수를 받아준 뒤, 나와 같이 체스보드를 바라보았다.


“아까 그 수도 놀라웠지만 오프닝 때 둔 수도 놀라웠지. 여태 체스 대결에서 네가 둔 오프닝 수는 거의 보지 못했거든. 처음엔 신수를 발견한 줄 알았지.”

“그런가요?”

“좀 불리한 수이긴 했으나, 아주 색다른 수였단다.”

키토 남작은 흐뭇하게 웃더니 굽혔던 허리를 일으켰다. 정각이 되었는지 근처에 있는 시계탑에서 종소리가 둔탁하게 울렸다.


“편지를 보지 못했다고 했지?”

“네…….”

“사실 널 찾은 이유는 너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어서였단다. 내가 보낸 편지의 내용 이 그 제안이었지.”

키토 남작과 나의 시선이 마주쳤다.


“제안요?”

“그래, 리제. 체스 대회에 나가보지 않을래?”

“…….”

“지금 당장 나가자는 게 아니야. 너도 알다시피 체스 대회는 16살부터 참가가 가능하지. 그전에는 주니어 체스 대회를 참가할 수 있지만, 사실 그 대회는 생긴 지 얼마 안 돼서 운영 문제가 많이 미흡하지. 너에겐 도움이 되지 않을 거 같구나.”

“모르겠어요. 하고 싶어도 어머니께서 반대할 게 뻔하니까요.”

“하고 싶은 건 맞고?”

키토 남작이 예리하게 물었다. 내가 침묵하자 남작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럼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체스를 둘 순 없을까?”

“저희 저택에 찾아오시는 건 안 돼요.”

“물론. 사실 내 저택에서 두고 싶지만 일주일 뒤에 예선 경기를 위해 수도로 가서 말이야. 아마 그곳에서 세 달 정도 머물거란다.”

키토 남작은 곰곰이 고민했다. 그리고 뭔가 대책이 있는 듯 펜턴 공작을 보았다.


“그래, 펜턴 가문에 가서 두렴!”

“네?”

“나만큼은 아니지만 저놈도 꽤 실력자거든. 분명 도움이 될 거다.”

아무리 그래도 마르센 가의 딸이 펜턴 저택에 간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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