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 # 3장. 고립된 폰 (3) (15/47)


15 # 3장. 고립된 폰 (3)
2023.02.21.


내가 뜸 들이자 가만히 서 있던 펜턴 공작이 헛기침을 내뱉었다.


“아주 막무가내군. 키토.”

“왜 그래? 설마 마르센 가 자녀라고 해서 불만스러운 거야? 리제는 고작 열 살 어린 소녀인데 말이야. 보기와 다르게 뒤끝이 상당하군, 아이마르.”

“……키토.”

정작 나는 체스를 두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는데.

키토 남작과 펜턴 공작은 날 앞에 두고 티격태격 말다툼했다. 하지만 결론이 났는지 대화가 끝났다.


“어때? 리제. 괜찮겠니? 일주일에 한 번 체스를 둬도.”

키토 남작이 묻자 나는 잠시 생각했다.

사실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오늘처럼 바이올린 교습이 일찍 끝난다면 일주일에 한 번 체스를 두는 것도 괜찮았다. 로저에게 상황을 잘 설명하면 그도 잔소리하다가 납득 해 주겠지.


“아직 확정이 아니야! 펜턴 공작에 와도 좋지만 그 전에 아이들이 먼저 허락해야 하거든.”

공작이 말했다.


“아이들이요?”

“유릭과 유네 말이다. 둘이 싫다고 하면 유감이지만 오지 못해. 근데 그 아이들이 워낙 까다로워서 말이지.”

아, 그거면 그다지 걱정할 필요가 없겠는데.


“미안하구나.”

“아, 아뇨.”

“어쨌든 너무 기대하지 말거라.”

그러니까 난 아직 체스를 두겠다는 대답을 안 했다. 유릭과 유네에게 물어보기 전 나에게 물어볼 생각은…….

음, 이 둘에게 없는 거 같다.


 

* * *

그로부터 정확히 삼일 뒤, 펜턴 저택을 찾았다. 예정된 일이 아니었다.

그 시발점은 이세벨이 자식들을 데리고 바다를 보러 가서였다. 나와 아버지를 제외하고 모처럼 가는 바다 여행이었다.

아침부터 여행 준비로 분주했던 저택이 금세 조용해졌다. 이세벨은 홀로 저택을 지키고 있을 날 보며, 오늘은 잠깐 책을 읽어도 좋다는 말을 했다.

같이 가자는 권유는 없었다. 문이 닫히고 정적이 흘렀다. 이를 기회로 삼아 나는 도서관으로 가기 위해 나섰다. 고작 책 한 권으로 이 허전함을 달래기에 부족하다는 걸 이세벨이 간과한 거였다.

비티가 내 앞을 막아도 소용없었다. 비티는 결국 내 뒤를 쫓아 저택 밖으로 나섰다.


“아가씨, 지금이라도 좋아요. 다시 저택에 돌아가는 게 어떻겠어요?”

비티는 지치지도 않은지 말을 반복했다.


“들키면 마님께 혼나는 건 물론 책도 다 빼앗길 거라고요!”

“…….”

“아가씨, 듣고 있어요?”

아니, 전혀.

[가족과 함께 바다 여행 어떠신가요?]

바다로 여행을 가지 않겠냐는 관광포스터를 우연히 발견했다. 이세벨과 형제들이 향한 곳도 저 포스터에 그려진 바다일 터다. 멍하니 포스터를 보고 있는데 이를 발견한 비티가 살짝 웃었다.


“……아가씨도 사실 바다에 가고 싶었던 거죠?”

“내가 왜?”

바로 부정했지만 바다를 꽤 좋아했다. 특히나 파도가 세게 몰아치는 겨울 바다를 좋아했다.

한참 포스터를 바라보다가 아쉽게 발걸음을 뗐다. 그리고 광장에 도착했는데,


“어? 리제 마르센 아니니?”

마차를 타고 저택으로 향하던 펜턴 공작과 마주쳤다. 살짝 놀라 경직된 나와 달리 그는 마차 문을 열었다.


“잘 됐다. 시간 있니?”

“네?”

“같이 펜턴 저택에 가지 않을래? 아이들의 허락은 받았다.”

그는 같이 저택에 갈 것을 권유했다. 유릭과 유네에게 이미 허락을 맡았다며 날 마차에 태우려는 공작이 조금 낯설었다. 얼마 전까지 날 반기지 않은 사람이었다.


“굳이 약속 날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잖아.”

“……그렇긴 하죠.”

“먼저 저택에 와서 체스를 둬보렴. 그리고 뭔가 불편하거나 그러면 그때 다시 결정해도 좋아.”

펜턴 공작의 말에 나는 여전히 그가 날 경계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는 내 방문을 허락한 자기 자식들 또한 예의상 승낙한 건 아닐까 의심하고 있는 거였다.


“아가씨, 이게 무슨 일이에요?”

비티는 내가 마차에 타기 전, 나의 팔을 붙잡았다.


“미안. 사정은 나중에 설명해줄게. 그러니 우선 펜턴 저택에 가자.”

“하, 하지만…….”

“비티.”

“전, 전 안에 들어가지 않을 거예요. 절대로.”

내 애절한 말투에 비티는 한숨을 내쉬며 한발 양보했다.

* * *

펜턴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정원 앞에 굳건히 선 비티를 보았다. 그녀는 정말로 저택에 들어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녀에게 몇 번이나 같이 들어갈 것을 부탁했지만 그때마다 비티는 단칼에 거절했다. 어떤 수를 써도 그녀 고집을 꺾을 수 없을 거 같았다. 나는 포기하고 공작의 뒤를 따라갔다.


“리제.”

“네?”

“아이들이 좀 까다롭다는 걸 양해해주렴.”

공작은 펜턴 저택에 들어가자마자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날 초대했지만 막상 같이 저택에 들어오니 걱정이 되었나. 그때, 그 걱정을 한 번에 잊게 만드는 발소리가 들렸다.


“언니! 언니! 리제 언니!”

유네가 토끼처럼 껑충껑충 뛰어와 그대로 내 품에 안긴 거였다.


 


“정말로 언니야?”

“안, 안녕.”

“멀리서 봤을 때 살짝 긴가민가했는데 역시 언니구나! 어떻게 온 거야? 언니가 와서 정말 기뻐!”

유네의 모습에 펜턴 공작은 손에 쥐고 있던 모자를 떨어트렸다.


“아버지. 모자 떨어트리셨어요!”

“그, 그래.”

얼떨결에 펜턴 공작은 자신이 떨어트린 모자를 줍기 위해 허리를 약간 굽혔다. 그 사이 유릭이 내 앞으로 걸어왔다.


“아버지, 오셨어요?”

“유릭. 잘 있었…….”

“어? 리제? 여긴 어쩐 일이야? 목요일 날 온다고 들었는데.”

유릭은 날 발견하자마자 환하게 웃었다. 유네는 그렇다쳐도 유릭까지 날 반기자 펜턴 공작은 기껏 주운 모자를 다시 떨구었다.


“유릭……?”

“네, 아버지.”

“나한테는 인사하지…….”

“아버지, 리제에게 제 방 구경시켜줘도 되나요?”

유릭은 기어코 공작의 말을 끊었다.

펜턴 공작은 자신 아들을 낯선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러자 이 상황을 마무리해 줄 펜턴 부인이 마지막으로 나타났다. 그녀는 책을 읽고 있었는지 돋보기안경을 쓰고 나왔다가 내 모습을 보고 바로 벗었다.


“어머, 진짜로 리제가 왔네.”

“아내까지…….”

상황을 뒤늦게 이해한 펜턴 공작은 한숨을 푹 내쉬며 날 보았다.


“내가 괜한 고민을 한 거 같구나.”

“친해진 지는 얼마 안 되었어요.”

“그래도 이 정도로 널 좋아할 줄이야. 그것이 나쁘다고 하는 건 아니야. 그저…….”

펜턴 공작은 떨어진 모자를 다시 줍고선 겉옷마저 벗었다. 공작은 순식간에 나보다 뒷전이 된 자신의 신세를 알아차리고 어깨를 늘어트렸다. 부인은 공작을 보며 호호 웃더니 내 앞으로 다가왔다.


“리제, 반갑구나. 이참에 저택을 구경해보는 건 어떻겠니?”

“어? 언니한테 내 방을 구경시켜주고 싶어!”

유네가 바로 손을 뻗자, 유릭이 동생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자신이 먼저라는 거였다.


“그럼 오늘은 유네 방에 먼저 가보렴. 유네의 방에 신기한 게 많이 있으니까 말이야.”

부인은 남매가 싸우지 않도록 먼저 순서를 정해주었다. 유릭은 두 번째 순서를 마음에 들지 않아 했지만 그렇다고 어머니께 투정을 부리지 않았다.


“그럼 언니. 빨리 올라가자! 방은 2층에 있어!”

유네는 나를 끌고 방으로 향했다. 유네의 손을 잡고 계단에 올라선 나는 마르센 저택과 다른 색상의 벽지와 바닥을 보았다. 적갈색의 바닥과 함께 벽지는 인동무늬로 장식되어 있다.

무역회사 집안답게 곳곳에 처음 보는 낯선 물건이 많았고, 심지어 값이 어마어마해 보이는 금속도 있었다.


“언니가 우리 집에 놀러 올 줄은 몰랐어!”

나 또한 생각보다 일찍 펜턴 공작 저에 와 놀랐다.


“언니! 여기가 내 방이야!”

유네의 방에 도착했다.

문을 열자마자 이상한 기운이 방 안에서 풍겼다. 방 안은 환했음에도 불구하고 공포의 집처럼 으스스하고 꺼림칙했다. 도대체 어디서 구한 물건인지 모를 기괴하고 이상한 골동품이 방 곳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유네가 좋아하는 해골 비슷한 인형도 여러 가지다. 심지어 벽지도 범상치 않았다. 적색의 그로테스크한 문양이 음산했다.

천천히 물건을 둘러보던 나는 구석에 있는 책을 발견했다. 상당히 오래된 책인지 먼지가 수북이 쌓여 있다. 먼지를 덜어내자 표지에는 원형거울이 하나 그려져 있었다. 실제 거울인지 원형에 내 얼굴이 그대로 비추어 졌다.


“아, 그 책? 신기해서 가져왔어.”

“가져왔다고?”

“응, 주웠거든. 근데 모르는 언어라 그냥 전시용이야. 읽진 않아.”

왜인지 펼치기 꺼려지는 책이었다. 제자리에 책을 둔 나는 다시 다른 물건에 관심을 두었다.


“이만하면 방 구경 다 했지?”

팔짱을 낀 채 문턱에 기대고 있던 유릭이 끼어들었다.


“뭐? 아직 볼 거 많아! 그리고 어차피 오빠 방은 볼 것도 없잖아!”

“그래도 리제가 좋아하는 책은 잔뜩 있어.”

“다 동화책이면서.”

“그럼 리제가 네 골동품은 좋아하고?”

“좋아하지 않을 수 있지만 적어도 동화책보단 흥미로워.”

사실 흥미로운 건 지금 말다툼을 하는 유릭과 유네였다. 마냥 사이가 좋을 줄 알았던 남매의 싸움을 나는 묵묵히 지켜보았다. 평소 어른스럽다고 생각했던 유릭도 싸우면 제 나이 같았다. 유네는 말할 것도 없다.


“리제, 가자. 내 방을 보여줄게.”

“진짜, 오빠! 치사해!”

“리제는 내 친구야.”

“나도 리제 언니랑 친구야!”

“리제는 너보다 나이가 많잖아?”

“그럼 오빠는? 오빠도 리제 언니보다 나이가 많잖아!”

이러다 유네가 울 거 같았다. 눈물이 맺힌 유네의 얼굴에 유릭은 잠시 멈칫했지만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주먹을 꽉 쥐며 씩씩거리는 유네는 분한 듯 아랫입술을 꽉 물었다. 점차 가열되는 분위기에 이제는 재미있기보다 난처했다. 유네가 울고 유릭이 화를 내면 끝도 없을 거 같다.


‘어쩐담.’

“아주 난리 났구나.”

때마침 소란을 듣고 이곳에 온 펜턴 공작이 나타났다. 그가 상황을 무마시켜주리라 안심하며 나는 숨을 돌렸다.


“너희들, 리제는 이제 나와 체스를 둬야 해.”

“하지만 아버지.”

무마시키기는커녕 공작은 싸움의 시발점인 날 가로채려 했다. 유릭이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대신 리제와 내가 체스 두는 걸 구경하게 해주 마. 리제 괜찮지?”

유릭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쉬움을 감출 수 없는지 입술은 여전히 삐쭉 내민 채였다.

유릭에게 나는 나중에서라도 꼭 네 방을 구경할게, 라는 약속을 해야 했다. 그 말을 하자마자 유릭의 튀어나온 입술이 들어갔다. 기분이 풀린 듯했다.


“따라오렴, 리제.”

공작은 말과 함께 계단 밑으로 내려갔다. 현관으로 내려오자 소파 앞에 준비된 체스보드가 보였다.


“괜찮겠어? 우리 아버지는 상당한 실력자야.”

“연습하러 온 거니까…….”

자리에 앉기 전 유릭이 나에게 속삭였다.

가볍게 하러 온 게임이었다. 옷매무새를 정리한 뒤 자리에 앉자 공작이 규칙과 시간을 설명했다. 전에는 속기 체스였다면 오늘은 일반적인 대결이었다. 공작과 내가 마주 보며 앉자 주방에 있던 부인도 이곳에 와 구경했다.


“시작할까?”

“네.”

공작의 말에 나는 하얀색 폰을 움직였다.


“처음은 폰이구나. 키토가 왜 널 좋아하는지 그 실력 좀 봐야겠다.”

공작은 시간을 한 번 흘끗 보더니 폰를 f5로 두었다. 흥미진진한 얼굴로 나와 체스를 두었던 키토 남작과 다르게 조금 따분한 표정이었다. 여기서 내가 게임을 신중히 하지 않으면 다시는 이 저택에 못 올지도 모른다.


“언니, 파이팅!”

유네가 말했다.

생각이 바뀌었다. 이건 가벼운 게임이 아니다.

이겨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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