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 # 3장. 고립된 폰 (4) (16/47)


16 # 3장. 고립된 폰 (4)
2023.02.24.


체스 말이 계속 움직였다. 처음부터 힘을 쏟지 않고 천천히 나아가는 나와 달리 공작이 움직이는 기물들은 한결같았다. 폰(pawn).

공격적인 오프닝 방식이었다.

그가 폰이 아닌 다른 말을 선택했을 때, 이는 예상했듯이 비숍이었다. 킹을 수비하면서도 상대방 기물을 공격할 자리에 그는 자신이 선택한 말을 두었다.


‘우선 비숍의 길을 막아야겠지.’

게임이 진행된 체스보드를 가만히 내려보았다. 기물들의 이동 경로를 차근차근 살폈다. 아직까지 승률은 내가 높아 보였지만 유릭의 말대로 펜턴 공작은 상당한 실력자였다. 키토 남작만큼의 임팩트는 없어도 공격들이 하나같이 묵직하다.


‘날 무시한 대가는 크다고요. 공작님.’

현관 어딘가에 있는 시곗바늘 소리가 첨예하게 들렸다.

똑.딱.똑.딱.


“음……. 이러면 여기가 막힐 텐데, 리제.”

시간이 갈수록 나의 계획이 수틀려졌음을 느꼈다. 공작이 룩을 움직이자 나는 내가 여태 자만했음을 알아차리고 말았다.

나도 모르게 입술을 물어뜯었다.

판세가 완전히 뒤집혔다.

유리한 상황에서 역전이 되자 침착함이 무너졌다. 그간 그려놓았던 전략들과 수들이 파도에 휩쓸려간 것처럼 내 안에 남은 건 원래 있었던 백지뿐이었다. 희망과 달리 그 뒤부터 나는 어이없는 실수를 남발했다.

끝까지 도망가 무승부를 유도하려 했지만 공작은 오포지션(킹과 킹이 마주봄.)을 만든 후, 나를 억압했던 룩으로 그대로 체크메이트 시켰다.


“체크메이트.”

허망한 패배에 악수를 잊은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 정신을 차린 후에도 체스보드를 다시 보며 어디서부터 실수를 했는지 찬찬히 살폈다. 기물들의 경로를 눈으로 좇고 있을 때, 헛기침을 내뱉은 공작의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올리자 그는 무심한 얼굴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나는 패배를 인정하는 악수를 청했다.


“아, 감사합니다.”

“그래, 리제. 이제 어디서부터 실수를 했는지…….”

“아, 아뇨! 저 혼자서, 저 혼자서 찾을 수 있을 거 같아요!”

다급하게 공작의 말을 막고선 체스보드로 시선을 옮겼다. 보아하니 폰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만약 저 폰이 제 위치를 해주었다면…….


“한 번 더 저와 대결해 주실 수 있나요?”

“……한 번 더?”

“안 될까요?”

나의 요청에 펜턴 공작은 대답 없이 기물들을 정리했다. 이대로 끝나는 건가 싶었는데 펜턴 공작은 정리한 기물들을 배치했다. 내 요청에 응답해준 거였다.

대결이 다시 시작했다. 이번에는 평소 손에 익혔던 오프닝으로 체스 기물을 움직였다. 모험보다는 안정적으로 가 승률을 차차 높인 다음 미들 게임으로 갈 셈이었다. 실수는 한 번이면 되었다.

아까보다 더 무거운 마음으로 경기에 임했다. 불안할 때마다 이길 수 있다며 스스로 되새김질했다.

긴 시간 동안 말없이 손만 움직였다.

그 결과, 모든 게임에서 다 졌다.

* * *



“날 얕봤구나.”

마지막 게임까지 진 뒤, 공작이 묵직하게 한마디 했다.


“네?”

“……악수는 안 할 거니?”

“아, 같이 게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애써 대답하면서도 손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있다. 마지막으로 공작과 악수를 한 뒤 바로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모든 게임에서 내가 진 이유를 알고 있었다. 또한 내가 어떻게 하면 이길 것인지도 알고 있었다. 미래를 알고, 상황을 아는데도 내 앞에 온 것은 승리가 아닌 패배였다.


“마음이 급해.”

“…….”

“너 자신을 너무 믿었다.”

공작은 체스보드를 정리하며 말했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욕심이 컸구나.”

“아.”

“부족한 널 다시 되새겨보렴. 막연히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말고. 믿음이란 항상 좋은 것이 아니야. 어느 때는 실패의 원인이 되지.”

실패의 원인.

뼈아픈 충고에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무거운 공기가 내 어깨에 내려앉았다. 패배에 입맛이 쓰다기보다는 막연히 할 수 있을 거라던 헛된 희망마저 송두리째 뽑힌 느낌이었다.

키토 남작의 말 한마디에 오만해졌을까, 아니면 운이 좋아 얻은 두 번째 인생에 남들보다 더 뛰어나다고 생각한 걸까.


“여보.”

“아……미안하구나. 나도 모르게 말이 심했다.”

부인의 지적에 공작은 사과했지만 들리지 않았다.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잠시 나를 반성하고 있을 때, 내 어깨에 손이 얹어졌다. 놀라 어깨를 움츠리자 유릭의 향이 확 다가왔다.


“아버지, 이제 리제에게 제 방을 구경시켜줘도 되는 겁니까?”

뭐? 유릭이 끼어들었다.


“리제, 가자.”

유릭도 내 대답은 듣지 않고 날 끌었다. 얼떨결에 자리에 일어난 나는 유릭의 뒷모습을 잠시 멍하니 보았다.


“잠, 잠깐!”

“구경하기로 했잖아.”

내가 패배에 심란해하고 있을 때 유릭은 여태까지 제 방을 언제 보여줄까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거였나?

결론적으로 그는 날 자신의 방으로 끌고 가는 것에 성공했다. 문제는 내 기분이 상당히 좋지 않은 거였지만.


 

* * *



“여기야.”

“그렇구나…….”

유릭은 끝까지 날 방으로 끌고 갔다.

화를 내고 싶어도 기운이 없었다. 적당히 구경하고 호응을 해주다가 빠르게 방 밖으로 나갈 생각만 했다.

유네의 말대로 유릭의 방은 진짜 단조로웠다. 그나마 눈에 들어오는 것이라곤 책장에 가득 찬 그림책이었다. 펼치면 그림들이 입체적으로 나오는 책들인지 두께가 상당했다. 그 외에는 정말로 다 평범해 나를 더 언짢게 만들었다.

하지만 유릭은 나에게 뭘 더 보여주고 싶은지 손을 끌었다. 그는 날 의자에 앉혀두고 기다리게 한 뒤 침대 쪽으로 향했다.

그 몰래 한숨을 푹 내쉬던 나는 책상 위에 있는 열쇠 묶음을 발견했다. 그곳엔 내가 골라 준 장식 고리가 없었다.


“……장식 고리가 없네.”

혼자 말한 거였는데 유릭은 내 목소리를 들었는지 허리를 일으켰다.


“장식 고리는 따로 보관하고 있어. 쓰기 아까워서.”

“…….”

“그것 말고 너와 하고 싶은 게 있어.”

유릭이 내 앞에 와 내민 것은 상자였다. 뭘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지만 영 흥미가 없어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다.

유릭이 상자를 열자 난 그 안에 들어 있는 의외의 물건에 집중했다. 돈다발이었다.


“이걸 왜 보여주는 거야?”

“다 네 거야.”

……너 왜 그래?


“유릭.”

“자, 빨리 집어봐.”

“……뭐 잘못 먹은 거야?”

돈이 궁하긴 했어도 동정으로 돈을 받는 건 기분이 마냥 좋지 않았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지폐만 쳐다보는데 뭔가 이상했다.


“가짜 돈이네.”

잘 보니 지폐에 그려진 그림 하나가 진짜 지폐와 달랐다.


“장난감 돈이지. 여기 밑에 보면 작은 글씨로 ‘호샤마을장난감가게.’라고 쓰여 있어.”

정말이었다. 내 앞에 있는 게 가짜 돈임을 알게 되자 괜히 허탈해졌다.


“찢지 않을래?”

“응? 찢어?”

“이거 말이야. 돈.”

“……?”

“보여줄까?”

뭘?

그는 자신이 먼저 시범이 보여주겠다며 돈 한 다발을 손에 쥐어 찢기 시작했다. 찍- 찍-. 첨예한 소리가 고요한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조각난 지폐가 유릭의 손을 가득 채웠고, 그는 돈뭉치를 허공에 휙 날렸다.

느린 속도로 바닥에 떨어지는 조각들 사이에서 유릭은 미소를 환하게 지어보았다. 그러더니 다시 돈다발을 한 묶음 쥐어 내 앞으로 내밀었다.


“진짜 지폐를 찢을 순 없잖아? 대신 난 기분이 울적하거나 화가 나거나 힘들면 이 돈을 찢어. 그리고 날려버리지.”

신박한 스트레스 해소법이었다.

그는 어서 돈을 찢어보라며 재촉했다. 조각들이 다 바닥에 내려앉을 즈음에 소심하게 지폐를 찢었다. 찍- 하고 듣기 좋은 소리가 났다.


“더 세게 찢어, 리제.”

유릭의 목소리에 더 세게 돈을 찢었다. 거침없이 갈라지는 지폐와 함께 후련함이 느껴졌다.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나쁜 짓을 하는 것 같으면서도 이를 두려워하지 않은 나를 보며 더이상 무서울 게 없구나, 느꼈다.

유릭과 나는 본격적으로 돈을 찢기 시작했다. 손안에 가득한 조각을 허공에 날려서 입으로 후 불었다. 조각이 유릭의 머리에 붙고 얼굴에도 붙었다.

그게 조금 우스꽝스러워 웃자 유릭은 질세라 내 쪽으로 조각을 뿌렸다. 우리는 돈을 찢기 바빴고 웃기 바빴다.


“이렇게 날리는 거야, 높게! 더 높게!”

“이렇게? 아!”

지폐 조각을 더 높게 날리다가 미끄러져 넘어졌다. 다행히 푹신한 침대 위인지라 아픔은 없었다.


“리제! 괜찮아?”

“……아니. 머리가 새하얘지는 기분이야.”

“병원에 가자, 어서!”

“그것보다 돈은 아직 있어?”

내 물음에 유릭은 텅텅 빈 상자를 보고 고개를 저었다. 그제야 나는 내가 얼마나 이상한 짓을 했는지 알아채고 말았다.

가짜 돈을 찢는 유릭이라니!

원작에서 한 번도 나오지 않았던 그의 스트레스 푸는 법이 신기했다가도 웃음이 나왔다. 뒤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자 유릭의 푸른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그 안에 내 모습이 담겨 있어 빤히 쳐다보았다.

유릭의 얼굴이 점차 빨개졌다. 그는 급하게 침대에 몸을 눕혔다.


“……기분은 어때?”

“응?”

“안 좋았잖아.”

날 배려한 거였구나.


“최고였어.”

“다행이다……. 네가 자꾸 심란하면 어쩌나 걱정했어.”

“왜 하필이면 돈을 찢는 거야?”

“돈이 싫어서. 너도 내 할아버지를 보면 이해가 갈 거야.”

유릭의 목소리가 살짝 내려앉았다. 책에서만 보았던 ‘유릭 펜턴.’이란 인물에서 난 저런 목소리를 상상했던 적이 있었나.


 
처음 유릭을 보았을 때, 그를 원작주인공과 다른 인물이라 생각했는데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낯설고 늘 새로웠다.


“리제, 넌 뭘 싫어하고 뭘 좋아해?”

유릭이 물음에 나는 고민했다. 싫어하는 건 너무 많아 어떤 거부터 꺼내야 할지 몰랐고, 좋아하는 건 딱히 없어 말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이대로 대화가 끊기기엔 아쉬워 최대한 머리를 쥐어짰다.


“아, 너는 바이올린을 켤 줄 알아?”

“바이올린?”

처음으로 배우게 된 악기에 대해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응, 우연히 배우게 되었는데 신기하더라고. 아직 낼 수 있는 음은 두 개뿐이지만 말이야. 어서 빨리 다른 음들을 배우고 싶어.”

마음이 앞서 나도 모르게 얘기를 주절주절했다. 내 얘기를 묵묵히 들어주던 유릭에게 이것저것 다 말한 뒤에야 나는 아차, 했다. 너무 아는 척했다.

유릭이 바이올린을 능숙하게 연주할 수도 있었다. 그러면 숙련자에게 거드름을 피우게 되는 꼴밖에 더 될까.


“아, 미안. 너무 아는 척했지?”

“아니. 전혀. 난 바이올린에 대해 아예 몰라.”

“그럼 내 얘기가 지루했겠다.”

“왜 그렇게 생각해? 난 재미있게 듣고 있었는데.”

유릭의 말에 나는 안심했다. 이왕 입이 트인 거 말을 더 하려 했는데 방문이 다시 열렸다.


“도련님, 아가씨. 식사 준비가 끝났으니 식당으로 내려오세요.”

펜턴 가 하녀였다.

식사라니……. 내가 그 자리에 껴도 될까. 그것보다 사실 공작을 마주 볼 자신이 없었다.


“리제.”

유릭이 나의 손등을 툭 쳤다.


“같이 가자.”

유릭이 작게 웃는다. 그 미소에 약간 마음이 놓인 나는 침대에 내려갔다. 방 곳곳에 떨어진 지폐 조각이 가득했다. 식사를 한 뒤 치워야겠다고 다짐할 찰나 나의 눈에 들어오는 물건이 하나 있었다.

[유릭 펜턴.]

바이올린 가방이다. 오래된 가방 모서리는 천이 닳아 너덜너덜했다. 그 닳은 천에는 희미하게 유릭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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