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 # 3장. 고립된 폰 (6) (18/47)


18 # 3장. 고립된 폰 (6)
2023.03.03.



“제일……큰 빵이 되고 싶어요.”

“그럼 체스 대회를 나가겠다는 말이구나.”

고개를 끄덕였다. 저 말을 듣고도 체스 대회에 나가길 거부한다면 그건 또 무슨 베짱일까. 마음 같아선 키토 남작이 말렸던 청소년 체스 대회부터 나가고 싶지만 걸리는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 중 이세벨의 반응이 제일 컸다.

……안 되겠다. 그녀를 설득하는 건 나중으로 미루자. 그전까지 이세벨의 시선을 피해 체스를 둘 수 있을까.

생각에 잠겼다. 자연스레 식사를 중단했는데 유릭이 내 앞에 닭 요리를 내밀었다. 훅 들어오는 구운 요리의 냄새에 정신이 번뜩 들었다.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유릭이 내 입에 닭 요리를 넣어주었다. 불 향이 입안에 퍼졌다. 끝에는 쌉싸름한 맛이 고민거리가 확 날아가게 해주었다.


“더 먹을래?”

“응, 응.”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유릭은 닭 다리를 하나 뜯었다. 살이 튀어나온 다리를 바라보았다. 그대로 내 앞에 놓이는 줄 알았다.

예상과 달리 닭 다리는 유릭 앞에 있는 접시에 들어갔다. 유릭은 노련한 칼질로 살들을 먹기 좋게 잘라내 내 접시에 두었다. 엄마가 자식들을 위해 살을 발라주는 것과 같은 의미일까?


“미안. 너무 잘개 잘랐어?”

“아, 아니야. 맛있어. 고마워, 유릭.”

내가 접시에 있는 고기들을 다 입에 넣자 유릭이 작게 웃었다. 그는 이 일이 꽤 뿌듯한지 몇 번이고 자른 고기들을 내 접시에 두며 날 빤히 쳐다봤다.


“엇, 나도 나도! 언니한테 줄래!”

뭐?

이를 지켜보던 유네가 저 끝에 있는 닭 요리로 팔을 뻗었다. 유네의 짧은 팔이 잘 닿지 않았다. 생각대로 잘되지 않자 유네는 끙끙거리며 허리를 일으켰다.

아슬아슬하게 손에 닿은 닭 요리에 유네가 미소를 그릴 때였다.

유네의 몸이 중심을 잃었다. 식탁에 엎어진 상체와 함께 버둥거리던 유릭의 팔이 그릇들을 옆으로 밀어냈다.


“앗!”

“조심해!”

날카로운 파열음이 났다. 바닥에 떨어진 그릇들이 모두 조각났다. 유네도 넘어질 뻔했지만 옆에 있던 내가 가까스로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의자 밑에는 부서진 그릇의 잔해들이 위협적으로 흩어져 있었다. 모두 동작을 멈추고 그 잔해들을 멍하니 보았다.


“유네!”

펜턴 부인이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유네의 몸을 살폈다. 유네의 드레스가 더러워졌을 뿐, 다행히 유리에 긁히거나 다친 곳은 없었다.


“도대체 무슨 짓이니? 다치면 어쩔 뻔했어?!”

펜턴 부인은 고개를 돌려 깨진 그릇들을 보았다. 꽤 멀리까지 떨어진 조각들을 보며 부인은 일어나지 말라고 당부했다. 소란스러운 소리에 멀찍이 떨어져 있던 하녀들도 급히 움직였다.

유네는 놀라 울음을 터트리지도 못하고 굳어 있었다. 펜턴 공작은 그런 유네를 무섭게 쳐다보았다.


“유네! 네 어머니 말대로 다치면 어쩌려고 그래?”

“죄, 죄송…….”

유네의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울음을 그친 지 얼마 안 되어 유네가 또 울려고 하자 당황했다. 그렇다고 유네를 달래주기엔 분위기가 험악했다.


“유네.”

상황이 혼란스러웠다. 그 틈을 타 유릭은 유네를 불렀다.

그는 놀라 몸이 뻣뻣하게 굳어 있는 유네의 팔과 다리를 살폈다. 유네의 손에 소스가 묻어 있자 가지고 있던 손수건으로 닦아주기도 했다. 유네의 손가락 마디마디를 유릭이 정성스레 닦아준다.


“오빠…….”

“유네. 네가 다치지 않았다는 게 가장 중요한 거야. 그릇들은 다시 새로 사면 되잖아.”

“……정말?”

유릭의 다정스러운 말에 유네는 다시 울음을 크게 터트렸다. 그녀는 이번에 엄마 품이 아닌 자신의 오빠 품에 들어갔다.

그녀의 큰 울음소리에 그릇을 치우던 하녀들도, 이를 살피던 공작과 부인도 잠시 멈칫했다.

공작과 부인은 찡그렸던 인상을 누그러뜨리고 유릭의 품에 갇혀 있는 유네를 바라보았다. 유네가 유릭의 옷자락을 잡고 슬퍼하자 화를 냈던 공작과 부인이 아무 말 없었다.

그들은 방금 유네에게 큰소리를 친 걸 후회하고 있는 거 같았다.


“미안하구나. 유네도 많이 놀랐을 텐데…….”

“유네, 나도 미안하다. 네가 다쳤을까 봐 나도 모르게 화를 낸 거야. 정말이란다.”

부인과 펜턴 공작의 말에 유네는 고개를 약간 끄덕였다. 하지만 자신의 얼굴을 보여주고 싶지 않은지 계속 유릭의 품에 숨어 끅끅거렸다.

어떤 이들은 유리 파편을 치우고, 어떤 이들은 반성했다. 그리고 어떤 이는 이 모든 것을 멀리서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조용히 쳐다만 봤다.

이때만큼 나는 존재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이 펜턴 가문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서로 끈끈이 묶여 있는 밧줄에, 나는 포함되지 않았다.

리제 마르센은, 이곳에서 그저 손님이었다. 그 사실이 날 초라하게 만들었다.


“리제, 미안해. 갑자기 소란스러웠지?”

부인은 멍하니 있는 나에게 말했다.


“……아뇨. 괜찮아요.”

정말로 괜찮았다. 정말로 이 일이 나에게 불편함을 주지 않았다.

다만, 어딘가 허전한 감정만이 나의 가슴이 머물렀다.


 

* * *

식사를 마쳤을 때, 분명 낮이었던 하늘이 깜깜해졌다. 펜턴 가족들의 인사를 받으며 저택 밖으로 나서자 비티가 오돌오돌 떨고 있는 게 보였다.


“아가씨! 드디어 나오셨군요!”

“여태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분명 펜턴 하녀를 시켜 따뜻한 곳으로 데리고 달라 했는데.”

“눈치가 보여서 들어갈 수나 있어야죠. 하지만 아가씨께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들어가려 했어요! 정말요!”

벽창호 같으니라고.


“아가씨, 이제 돌아가는거죠?”

“그래, 어서 돌아가자.”

바닷가로 갔던 이세벨도 슬슬 돌아올 터였다. 비티와 같이 마르센 저택으로 향했다. 칼바람을 맞으며 팔로 가슴을 감싼 채 걸었다. 아직 불이 켜지지 않은 저택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무도 안 왔구나.

저택 안으로 들어가자 따듯했던 펜턴 저택과 다르게 싸늘한 한기가 맴돌았다.

차가운 저택에 온도를 높이기 위해 비티는 바로 벽난로로 가 모닥불을 피웠다. 나는 그 앞에 앉아 딱딱한 몸을 녹였다. 그 사이 방에서 쉬고 있던 하녀들이 나와 저녁준비를 했다.

칼질 소리에 그제야 사람 사는 집 같았다.

시간이 조금 지났을까. 문 앞에서 실케의 목소리가 뭉쳐 들렸다.


“정말 재밌었어!”

“겨울 바다가 그렇게 아름다운지 처음 알았어요!”

저택의 문이 열렸다. 다시 한번 칼바람이 문을 통해 내부로 들어왔다. 입술이 덜덜 떨려왔다. 그건 실케와 스웰도 마찬가지인지 모닥불을 보자마자 그 앞으로 달려들었다.

겉옷을 벗던 펠리시아도 내 옆에 앉았다. 어느새 모닥불 앞에 자리가 꽉 찼다.


“저기 리제, 그 자리 나한테 양보해주지 않을래?”

고개를 돌려 뒤에 있는 버나드를 보았다. 그는 아직까지 겉옷을 벗지 않은 채 떨고 있다. 콧잔등은 새빨갛고, 입술엔 혈색이 없었다. 자리를 비켜주지 않으면 곧 얼어 죽을 모습이다.

결국 버나드에게 자리를 양보하기 위해 일어났다.


“리제.”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이세벨이 날 불렀다.


“네, 어머니.”

“오늘은 혼자 뭘 했니?”

역시. 물어볼 줄 알았다.


“마구간에서 말이랑 놀았어요.”

“정말로?”

“네. 그 탓에 신발이 더러워졌지만요.”

흙이 묻어 있는 신발을 증거로 거짓말했다. 사실 흙이 묻어 있는 건 마구간 때문이 아니라 아까 펜턴 가에서 마르센 가로 향할 때 묻었던 거다.

다행히 이세벨은 큰 의심하지 않고 바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나도 모닥불 앞에 도란도란 모여 있는 넷을 보다 방으로 들어갔다.


‘자, 이제 기억해보자.’

서랍에 있는 종이 한 장과 저번에 샀던 만년필을 꺼냈다.

펜턴 공작과 두었던 체스 기보를 작성해야 했다. 처음 작성해보는 거라 작성법이 좀 헷갈렸지만 다행히 끝까지 써냈다. 만족해 웃다 완성된 것을 보고 또 보았다.

고립된 폰. 펜턴 공작의 말이 맞았다. 폰이 고립되어 있었다.

혼자 쓸쓸히 고립된 폰은 앞으로 나아가 똘똘 뭉치는 말들을 우두커니 지켜보고 있다.

한참 동안 폰을 보다 저녁이 되었을 때 식탁으로 내려갔다. 일을 마치고 온 아버지도 그곳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식사가 나오자마자 기도를 하지 않고 바로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모두 입안에 음식을 집어넣는 걸 집중했다.

먼저 식사를 마친 아버지는 시계를 흘끗 보았다. 아직 일어나기 이른 시간임을 깨닫고 그는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오늘은 무슨 일을 했소?”

“아이들과 바닷가에 갔어요.”

이세벨은 감정 없는 어조로 말했다.


“재밌었겠군.”

“펠리시아가 저를 넘어뜨리지 않았다면요.”

버나드가 투덜거렸다.


“저 쌍둥이들이 날 먼저 넘어뜨렸다고!”

그러자 펠리시아가 발끈했다.


“스웰이 먼저 꾸며낸 짓이야.”

“뭐라는 거야? 실케, 너도 동의했잖아!”

아무래도 많은 일들이 있던 모양이었다. 모두 한마디씩 외치고 있을 때 나만 입을 다물고 있었다. 저 대화에 끼어들고 싶지 않은 것도 있지만, 사실 할 말도 없었다.

저 대화에 나는 끼어들 수 없다.

그러다가 이 상황이 아까와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고 보면 펜턴 가와 내 앞에 있는 이들은 같은 피가 이어진 가족을 가지고 있었다.

유네와 유릭의 몸 안엔 같은 피가 있다. 마찬가지로 쌍둥이와 펠리시아, 버나드도 몸 안에 같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나만 그 두 소속 중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다.

영역을 넓혀 곳곳을 뒤진다고 하더라도 나와 같은 핏줄을 가진 이는 없었다.

그때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약간 돌리자 이세벨과 나의 눈이 마주쳤다.


“멍하니 앉아 뭐 하는 거니?”

그녀가 묻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 * *

정각을 살짝 넘은 시간이었다. 아직 잠들지 않은 유릭은 현관 소파에 앉아 뭔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유릭?”

“……아버지.”

오랜 업무로 이제야 서재에서 나온 펜턴 공작은 아들에게 다가갔다.


“늦었는데 자지 않고 뭐 하니?”

“생각을 좀 하고 있었어요.”

“생각?”

유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 리제는 동생을 갖고 싶은 걸까요?”

“뭐?”

“오늘 리제의 서운한 얼굴을 봤어요. 저와 유네를 보며 리제가 씁쓸하게 웃는 것도요. 리제는 막내잖아요. 그래서 언니 오빠가 아닌 동생을 갖고 싶은 게 아닐까 해서.”

유릭의 말에 공작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공작은 유릭 옆에 앉아 그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음, 씁쓸하게 웃었다고?”

“네.”

“동생은 아닐 거야. 언니 오빠도 아닐 테고.”

“그럼 뭔가요”

“내 생각에 리제가 갖고 싶어 하는 걸 네가 이뤄주지 못할 거 같구나.”

“왜요?”

유릭이 발끈해 말하자 공작은 난감하다는 듯 웃었다.


“왜 그러니? 네가 리제의 소망을 이뤄주고 싶은거야?”

“……전.”

“그것이 너에게 해를 끼친다 해도 말이야?”

“저는……그저 리제가 웃었으면 해요.”

언제나요.

지금도, 그리고 미래에서도.

그저 그뿐이에요.


“그게 제일 값질 테니까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