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 4장. 원래 싸우면서 친해지는 법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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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 4장. 원래 싸우면서 친해지는 법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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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 4장. 원래 싸우면서 친해지는 법 (1)
2023.03.07.
드디어 때가 왔다. 전장에 선 사람처럼 우두커니 서 있던 나는 비장한 눈으로 적의 요새를 올려다보았다. 로스코프 마을의 바커스 저택, 즉 로저의 집이었다.
하늘은 맑았고 날씨는 꽤 좋았다. 바람도 적당히 서늘한 것이 춥지도 않다. 날씨에 약간 영향을 받는 로저의 기분을 생각하자면 운이 좋은 거였다.
오늘을 위해 내가 얼마나 많은 변명거리를 생각했는가. 어떻게 하면 로저를 무찌를 수 있을까 하여 방안들과 그에 맞는 적절한 상황 대처를 짜왔다.
완벽했다. 이제 두려워할 건 아무것도 없다.
“어머, 리제 왔니? 로저가 계속 널 기다리고 있단다. 어서 올라가보렴.”
“감사합니다, 부인.”
주먹을 꽉 쥔 채 계단을 올랐다.
* * *
“그게 말이 돼? 설마 벌써 질린 거야?”
로저는 상당히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럴 줄 알았다.
모든 원인은 바이올린 교습을 한 시간으로 줄어 달라는 내 말이었다. 꽤 논리적으로 말한 거 같은데 예상대로 통하지 않았다.
나머지 방안들도 실현해 보았지만 그에게 먹힌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역시 로저는 쉬운 상대가 아니다.
“하지만……체스를 두고 싶단 말이야.”
“그렇다고 지금 연습도 부족한데, 여기서 연습을 덜 하겠다고? 나랑 합주한다며. 하루 두 시간 꼬박 배워도 힘든데, 한 시간으로 되겠어?”
“포기하는 게 아니야. 연습은 잘할게. 하지만……바이올린보다도 나에게 더 중요한 게 있어.”
“그게 체스라고?”
로저의 싸늘한 눈빛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말이 없었다. 무엇을 생각하는 건지 입술을 다문 채 눈살을 찌푸렸다.
로저의 마음이 이해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바이올린 교습을 시작한 지 아직 한 달도 지나지 않았다. 이제 막 연주법을 익히고 있었고, 아직 기초도 익히지 못한 날 위해 로저는 자신의 시간을 할애했다.
근데 대뜸 다른 일을 하고 싶다고 하면 나라도 어이가 없을 거다. 특히 로저 같이 예민하고 완벽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갑자기 절반으로 줄어든 연습시간에 상당히 화가 나겠지. 하지만 나도 나름대로 간절했다.
“체스는 나랑 두면 되잖아.”
예상치도 못한 그의 말에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로저는 바이올린을 내려놓더니 자신의 책상 밑에 있는 체스보드를 꺼냈다.
“뭐?”
바이올린을 내려놓고 체스보드를 물끄러미 보았다.
상당히 오래된 체스보드인지 모서리 부분이 각이 지지 않고 뭉뚝하다. 가까이 다가가 체스보드를 만져보니 오랫동안 사포질하지 않은 건지 꺼칠꺼칠했다.
“나, 체스 꽤 잘 둬.”
“…….”
“거짓말 같아?”
아뇨.
로저를 알게 된 지 얼마 안 되었지만, 그는 자신을 과장하거나 포장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즉, 저 자신만만한 목소리는 그가 정말로 체스를 잘 둔다는 얘기다.
로저가 팔짱을 꼈다.
“그럼 이렇게 해. 지금 당장 나랑 체스를 둬서 지면 체스는 포기해야 할 거야. 애초에 나한테 진다는 건 재능이 그만큼 뿐이라는 소리니까.”
“좋아.”
* * *
반전 따위는 없었다. 씩씩거리며 체스보드를 쳐다보는 로저의 얼굴이 그 증거였다. 그는 나한테 손쉽게 져버린 것에 믿지 못했다.
“약속대로 바이올린은 앞으로 한 시간만. 설마 두말하지는 않겠지?”
“……이, 이게 무슨.”
“미안해, 로저. 네가 화나는 것도 다 이해해. 하지만 정말로 어쩔 수 없었어.”
“내, 내가 왜 진 거지?”
로저는 작게 중얼거렸다. 그게 문제였구나. 약속은 이미 잊은 거 같고, 자신의 패배에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었다.
로저를 이기기 위해 큰 전략을 세우지 않았다. 무리하게 공격도 안 했다. 입 밖으로 내뱉으면 로저가 발끈할지도 모르겠지만 그의 빈공간이 다 보였다. 다 보이는데, 어떻게 공격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렇다고 로저의 체스 실력이 형편없는 건 아니다. 그는 꽤 잘했다.
“유릭과 비슷할지도…….”
실력이 있다는 말이었다. 내 작은 소리를 들었는지 그가 고개를 올렸다.
“유릭?”
“아. 체스를 가르쳐주시는 분의 아들이야. 우리랑 비슷한 또래의 소년인데, 이름이 유릭이라고 해.”
“내가 그 애와 실력이 같다고?”
“뭐? 유릭은 체스를 상당히 잘 둔다고.”
로저의 표정이 점점 굳어지기 시작했다. 아뿔싸. 말실수했음을 나는 뒤늦게 알아차렸다. 얼굴도 알지 못하는 소년과 자신이 비교당했으니 로저가 기분 나쁠 만도 했다.
왜 로저 앞에서만 말이 이리 꼬일까.
“로저……. 유릭은 그러니까 잘생겼고, 키도 크고, 아주 멋진 소년이야. 체스도 무척 잘 두고 완벽해! 그리고 너, 너도.”
“…….”
안 되겠다. 로저의 얼굴이 굳어지다 못해 날카롭다. 유릭의 얘기는 이쯤에서 그만두고, 다시 꼬리를 내려야 할 때가 왔다.
“한 번만 날 위해 도와줄 수 없는 거야? 네가 시간을 양보해주지 않으면 난 체스를 둘 수 없어.”
“……체스가 그렇게 좋아?”
“응.”
“마르센 부인께서 반대하셔도?”
로저가 콕 집어 말했다. 얼핏 나와 이세벨의 사이를 눈치챈 것일까. 그는 체스보드에 있는 기물들을 하나씩 정리했다. 끝내 자신의 패배를 인정한다는 행동이었다.
“부인 몰래 체스를 두려고 바이올린 시간을 빼려는 거잖아. 아니야?”
“맞, 맞아.”
“어머니와 마르센 부인은 친하셔. 너도 알잖아. 어머니께서 입을 열면 바로 들통나고 말걸?”
“그건 내가 바커스 부인과 따로 얘기를…….”
“어머니께 부탁해도 소용없어. 거짓말을 매우 못하시거든. 아마 마르센 부인은 바로 알아차릴걸?”
이런. 하나의 난관을 넘었더니 더 큰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떡하지?”
“방법은 하나뿐이지. 몰래 나가. 저택 뒤편에 문이 있는데, 그곳에 나가면 아무도 들키지 않을 거야. 고용인들도 모르는 문이거든.”
“그래도 괜찮아?”
“어떻게든 되겠지. 바이올린 연습할 때는 들어오지 말라고 어머니께 일러둘게. 네가 대신 인사하고 나갔다고 내가 전해 줄 테고.”
로저가 얼마나 큰 결심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는 그 누구보다 자신의 어머니를 사랑했다. 어머니 앞에서만 제 나이처럼 수줍어하거나 소심해지는 것만 봐도 그렇다. 결정적으로 그는 바커스 부인에게 거짓말을 못 했다.
근데 그걸 날 위해 하겠다는 거였다.
“넌 내 제자잖아. 스승으로서 제자의 꿈을 막을 순 없지.”
로저의 말에 가슴이 찌르르 울렸다.
내가 여태 널 오해한 거 같아, 로저. 너는 좀 예민하고 좀 까칠하고 좀 엄격했지만 그래도 정말 멋진 놈이야.
“로오저…….”
“대신.”
그가 고개를 내밀었다.
“내일 나랑 만나.”
“……뭐?”
“내일 호샤 마을로 놀러 갈게.”
“갑자기 뭔 소리야?”
혹시 뭘 잘 못 먹은 거니? 로저.
“날 만난다고 마르센 부인께 말하면 널 저택 밖으로 내보내주지 않겠어? 그럼 체스를 두러 가는 거야.”
“왜?”
당황한 나머지 나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궁금하니까. 네가 어디서 체스를 배우고 있는지.”
“……하지만 그분들이 널 반기지 않을 수도 있고.”
“유릭이라는 애가 있다며. 나랑 같은 또래의 소년.”
“그게 왜?”
내가 묻자 로저는 당연한 걸 묻느냐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자기 자식과 같은 또래, 성별인 아이가 놀러 오면 반기지 않겠어? 심지어 그 아이가 바커스 가문 후계자면 말이야.”
그게 무슨 이상한 논리야. 그 말이 목구멍까지 훅 올라왔지만 가까스로 삼켰다. 더이상 말실수했다가는 삐친 로저가 당장이라도 약속을 무를 수 있다.
“진심이야? 로저?”
“난 거짓말 안 해. 못하는 거 알잖아.”
“앞으로 뻔뻔하게 거짓말해야 하는데 그리 말하면 어떡해!”
“서서히 늘려볼게. 어쩌면 거짓말에도 재능이 있을지도 몰라. 난 뭐든 재능 넘치니까.”
“…….”
“어때? 내일 나 만나 줄 거지?”
이제 작전을 바꾸었는지, 그가 애원하며 말했다.
로저가 왜 이 같은 행동을 하는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 괜히 불안해졌다. 하지만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내 부탁을 들어준 로저의 요구를 거부할 수는 없었다.
로저의 말대로 그와 논다고 하면 이세벨이 두손 두발 들어 환영할 테고 나는 이를 이용해 체스를 두면 된다. 어쩌면 좋은 기회였다.
“내 마음대로 해.”
내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고집불통 로저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그려졌다.
* * *
“로저 바커스랑 말이니? 좋구나, 그와 놀다 오렴.”
이세벨은 예상대로 로저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날 밖으로 내보내 주었다.
로저와 만나기로 한 장소는 다름 아닌 분수대가 있는 광장이었다. 저 멀리 시계탑을 보자 약속 시간까지 아직 삼십 분 정도 남아 있었다.
여유가 있으니 그동안 뭘 할까 고민하던 참에 분수대 앞에서 익숙한 실루엣을 발견했다. 물끄러미 바닥을 보며 발로 땅을 툭툭 치는 저 소년은 로저다.
생각보다 로저가 일찍 와서 놀랐지만 더 놀란 건 그의 외관이었다. 평소 로저는 옷차림에 신경 쓰는 편이었다. 다만 저건 좀 과하지 않나…….
‘소개팅 가니?’
큰 장식이 달려 있는 겉옷과 멋들어진 구두까지. 평소 곱슬이었던 머리는 더 곱슬이다. 원래라면 이마를 완전히 덮고 있던 앞머리는 양쪽으로 살짝 벌어져 있었다. 누가 보면 가까운 친척 결혼식에 참석한 아이였다.
“어, 왔어?”
그는 나를 발견하고 한마디 던졌다. 그것도 무심하게.
그는 수수한 내 옷차림을 한 번 훑더니 잠시 멈칫했다.
“……평소랑 똑같네.”
“우린 결혼식에 참석하는 게 아니야, 로저.”
“첫인상이 중요한 거 몰라? 오늘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내 인상이 깔끔하고 차분하다는 걸 알려야지.”
“그래도 정도가 있지.”
“너도 날 처음 만났을 때, 옷차림에 신경 썼잖아.”
그는 이세벨이 골라주었던 내 드레스를 말했다. 그때 이세벨은 하녀를 시켜 내 얼굴에 치장까지 해주었다. 긴 머리를 하나로 깔끔하게 묶었던 기억도 있다.
“그건…….”
“너도 나한테 잘 보이기 위해 그렇게 입은 거 아니야?”
“너도 그때 차려입었잖아.”
로저는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무슨 소리야. 지금이 차려입은 거고, 그때는 평상시 복장이었어.”
그는 어째 단 한마디도 지지 않았다.
“됐어, 이제 가자!”
계속 상대했다간 나만 열불 나 속이 뒤집어질 거 같았다. 어서 빨리 펜턴 저택에 가야지, 안 되겠다.
지름길인 장터로 향하자 로저가 내 뒤를 졸졸 따라왔다. 로스코프 마을엔 이런 큰 장터가 없어서 그런가, 로저는 평일 낮임에도 왁자지껄한 환경이 신기해 계속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이제야 좀 아이 같다고 느껴질 때였다.
“저 간판은 디자인이 이상하네. 누가 만든 건지는 모르겠지만.”
“…….”
“나무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거야? 다 잔가시가 삐죽삐죽 나와서 보기 안 좋잖아.”
순수함이 없었다. 순수함이.
로저는 바람에 날아온 전단지를 발견하고 지적도 했다.
“어린이 캠프 참여단 모집? 이 전단지 디자인으로는 캠프 모집은 턱도 없겠다.”
참자…….
상대는 고작 열 살 소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