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 4장. 원래 싸우면서 친해지는 법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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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 4장. 원래 싸우면서 친해지는 법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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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 4장. 원래 싸우면서 친해지는 법 (2)
2023.03.10.
한참을 걸어 장터에서 벗어났다.
“그래, 체스는 어디서 배우는 거야? 스승은 누군데. 유명한 사람이야?”
로저가 연달아 물었다.
“……유명해. 좀 많이…….”
“음, 그래도 너무 스승에게 의존하진 마. 근데 유명하면 나도 알 정도야?”
체스 쪽이 아니라 마르센 가와 사이가 좋지 않다는 쪽으로.
“응, 유명해.”
“그럼 그 유릭이란 애는?”
“뭐?”
“걘 어때?”
“어떠냐니.”
로저는 유릭에게 관심이 많았다. 자신과 같은 또래라서 그런 걸까 아니면 내가 자신과 그를 비교해서일까.
“네가 저번에 그랬잖아. 나랑 비슷하다며.”
“그래, 유릭은 저번에 말했듯이 똑똑하고 비범하고 지혜롭고 배려심도 넘쳐. 나중에 큰 사람이 될 거야.”
“…….”
“생각해보면 너랑 참 다르다, 그렇지?”
로저의 표정이 약간 뾰로통해졌다. 자꾸 질문을 던지는 것이 귀찮아 미운 소리를 했는데 로저가 삐쳤다.
“저기, 로저?”
“……큰 사람은 무슨. 그건 아무도 모르는 거야.”
음, 나중에 펜턴 가문을 이어받은 후 시장을 부흥시킬 영웅이긴 하지만.
“그래. 그렇다고 치자.”
“넌 너무 물러. 사람을 잘 믿는다고 해야 할까?”
“나 사람 잘 안 믿는데?”
“스승에 대해 의심 안 해봤지? 아무리 유명하다 하더라도 이상한 음모를 가지고 있을지 몰라.”
그는 웃음기를 싹 빼고 말했다.
“괜찮아. 믿을만한 사람이야.”
“그래. 그렇다고 치자.”
그는 내 말투를 따라 했다.
* * *
“……네가 말한 가문이 펜턴 가문이었어?”
자신의 두 눈을 의심했던 로저가 정신 차린 후 물었다.
말로 백번 설명하는 것보다는 보여주는 게 더 좋을 거 같아 문고리를 몇 번 내쳤다. 잠시 기다리자 하인이 정원 밖으로 나왔다.
“아가씨? 어쩐 일이세요?”
“아, 친구와 함께 온다고 편지를 보냈는데 받지 못하셨나요?”
“어머, 편지가 아직 안 온 모양이에요.”
어제 우체국 청년한테 돈을 더 얹어주며 펜턴 저택으로 가는 길에 편지를 전해달라 일렀는데. 돈만 채간 채 내 편지는 가방 구석에 껴 넣은 거 같았다.
이를 어쩌지. 난감했다.
“우선 들어오시겠어요?”
“그래도 돼요?”
하인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문을 열어주자 로저가 내 팔을 살짝 잡았다.
“어떻게 된 거야?”
“말했잖아. 나의 체스를 지도해주실 스승님이라고.”
“그분이 펜턴 공작이라고?”
로저는 말도 안 된다며 입을 벌렸다.
“설마, 유릭이라는 그 아이도…….”
“유릭 펜턴. 펜턴 가의 장남이지.”
“네 어머니께선 이 사실을 알아?”
“몰라. 이건 나와 펜턴 공작 가의 비밀이니까 절대로, 절대로 말하지 마. 아니면 다시는 널 보지 않을 거야.”
엄중한 목소리로 경고하자 로저가 어깨를 움찔했다.
“정, 정말로 들어갈 거야?”
저택으로 들어가는 그의 표정에는 경계심이 가득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내 팔을 놓지 않은 로저는 꼭 짐승 우리에 들어가는 사람 같다.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줄 테니까 겁먹지 마.”
나는 로저의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키토 남작과 만남, 펜턴 공작과 체스를 둔 것까지 다 설명했다. 그래도 굳은 로저의 표정이 풀어질 기색 없다.
“체스 대결이 끝나면 키토 남작께서 직접 날 지도해주신다 했어. 그때까지 펜턴 공작에서 두는 거고.”
내 얘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로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키토 남작은 분명 대단한 사람이지. 펜턴 공작도……. 근데 이상하지 않아? 무보수로, 그것도 아무런 조건 없이 널 가르쳐준다고 하니까 말이야.”
“뭐?”
“생각해 봐. 마르센 가와 펜턴 가는 사이가 좋지 않아. 그건 네가 더 잘 알 테지, 리제. 그런 널 제자로 키워주겠다고? 이건 아군이 적군의 왕자를 호랑이로 키우겠다는 것과 무엇이 달라? 뭔가 목적이 있을 수도 있어.”
의심하는 로저가 이해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펜턴 가와 마르센 가 사이의 소문이 유명하니 충분히 경계할 수 있었다.
“로저, 걱정 말라니까. 나 믿지? 응?”
로저를 보며 살짝 미소를 지었지만 소용없었다. 그는 쭈뼛거리며 주변을 둘러보다 현관에 들어서기 전에 침을 꼴깍 삼켰다.
……데려오지 말 걸 그랬나.
* * *
“인기척에 느껴져서 누군가 했더니 리제구나.”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펜턴 부인이 우릴 맞이했다.
“안녕하세요. 부인.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해요.”
“시간이 나면 언제든지 찾아오라고 했잖니. 근데 옆에 있는 저 잘생긴 소년은 누구니?”
“처, 처음 뵙겠습니다. 로저 바커스라 합니다.”
로저가 부인을 보며 인사했다. 아무리 겁이 난 들 예의를 지키는 게 꽤 귀여웠다.
“바커스? 어머, 혹시 오르가니스트 레지날드 바커스의 바커스 가문이니?”
“저의 숙부시죠…….”
“그럼 설마 테너 릭 바커스의…….”
“그분은 제 아버지세요.”
말은 더듬는 로저와 달리 부인은 얼굴이 환해졌다.
“어머! 얼마 전 그분의 음악을 듣기 위해 연주회에 갔었지. 정말이지 아주 놀라웠단다. 아, 날씨가 추운데 어서 들어오렴.”
부인은 우리가 몸을 녹일 동안 하녀를 시켜 간식거리를 가져오라고 일렀다. 로저도 나도 어정쩡한 자세로 간식이 오길 기다렸다.
첫 방문인 로저는 그렇다 쳐도 나도 자리가 어색했다. 편지를 보내긴 했지만 잘 전달되지 않았다. 이를 안 순간부터 부인과 공작의 시간을 빼앗은 건 아닐까 마음이 불편했다.
로저와 나의 시선이 마주쳤다. 내가 어색하게 웃자 로저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그때, 위층에서부터 둔탁한 발소리가 들렸다.
“언니!”
유네가 나에게 뛰어왔다. 그녀는 내 손을 꼭 잡으며 흔들어댔다.
“언니가 와서 기뻐!”
“반가워, 유네. 그리고 유릭.”
그 뒤에는 유릭이 서 있었다. 나를 발견하고 다정하게 미소짓던 유릭이 로저를 발견했다.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
“…….”
유릭을 보자마자 로저는 곱지 않은 눈빛으로 그를 훑었다. 유릭은 미소를 감추고 평소 무뚝뚝한 얼굴로 로저의 시선을 맞받아쳤다.
‘뭐, 뭐지?’
둘 사이에서 기 싸움이 벌어졌다. 펜턴 부인이 우리 앞에 초콜릿 음료를 내주지 않았다면 오래 벌어질 싸움이었다.
“자, 마시렴.”
“저, 부인. 공작께서는요?”
주변을 둘러본 나는 저택에 펜턴 공작이 없음을 알아챘다.
“아마 한 시간 후에 돌아오실 거야. 갑자기 일이 생겨 수도로 갔거든.”
“아……. 제가 너무 갑작스레 찾아왔죠? 죄송해요.”
“아니란다. 이참에 같이 식사를 하겠니? 로저에게도 대접해주고 싶은데.”
부인은 당장 식재료를 사야겠다며 외출 준비를 했다. 당황한 내가 괜찮다고 말해도 부인은 꼭 그러고 싶다며 날 말렸다.
“그럼 유릭은 리제하고 로저와 있겠니?”
“네, 어머니.”
“그럼 유네는 어떡할래?”
부인의 물음에 유네는 행동을 머뭇거렸다. 방금까지 내 손을 잡고 흔들던 유네는 어느새 부인 뒤에 몸을 숨겼다. 처음 보는 로저의 모습에 잔뜩 긴장이라도 한 걸까.
“어머, 유네. 로저가 와서 부끄러운 모양이구나?”
“…….”
“그럼 유네. 우린 함께 갔다 오자. 얘들아, 놀고 있으렴.”
생기 넘쳤던 저택엔 싸늘한 침묵만 맴돌았다. 유릭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비틀어 문을 바라보고 있었고, 로저는 절반 가까이 남은 초콜릿 음료를 멍하니 바라봤다.
이 분위기를 풀 사람은 유릭과 로저하고 친한 나뿐이다.
“……저.”
내 입술이 떨어지자 유릭과 로저의 시선이 나에게 향했다. 시선이 몰릴 것이라고 예상 못 했다. 그러니 생각해 둔 말도 없다.
“그, 그게 왜 부인께서 직접 식재료를 사러 가시는 거야? 보통 하녀를 시키지……않아?”
“어머니의 취미셔. 또 식재료 같은 경우 직접 보고 사야 어머니께서 안심하셔서.”
“그렇구나.”
다시 침묵.
로저는 초콜릿 음료를 홀짝이며 마셨다. 유릭은 다리를 꼬고 소파에 앉은 채 팔짱을 꼈다. 저택 밖에 칼바람이 불어온다면 여긴 온통 얼음장이다.
“미안. 갑자기 찾아와서.”
“괜찮아.”
사과하자 유릭은 고개를 저었다.
“어머니, 아버지께서도 널 보고 싶어 했어.”
“다행이다.”
그리고 또 침묵.
유릭은 팔짱을 빼고선 로저를 쓱 쳐다봤다. 유릭의 시선을 느낀 로저도 고개를 올렸다. 저 둘의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아까 다 하지 못한 기싸움이 또 한 번 벌어졌다.
좋지 않은 상황 같다.
“음, 저기…….”
용기 내어 입을 열었다.
“……나랑 같이 놀 사람?”
마땅히 할 얘기가 없어 아무 말이나 꺼냈다. 근데 꺼내고 보니 정말 아무 말인 거 같다. 어이가 없어 피식 웃으면 어쩌나, 걱정했다.
“나.”
“나.”
저 둘이 빠르게 손을 들며 대답하기 전까지.
“……응? 정말로?”
얘네들 왜 이래?
로저와 유릭이 무엇을 하고 놀 거냐는 듯 기대 섞인 눈빛으로 날 쳐다보았다.
“음, 그럼 순서대로 마을의 이름을 말하는 거 어때?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 승자인 거로……. 정말로 재미있을 거야. 아마도?”
내가 말했지만 정말 재미없을 거 같다.
“…….”
“…….”
역시 둘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는지 반응이 미지근하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내가 먼저 호샤 마을을 말하자 유릭이 뒤이어 다른 마을을 얘기했다. 분명 가벼운 게임이었다…….
시간이 조금 흐르자 유릭과 로저의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그들은 인상을 찌푸려가며 부르지 않은 마을 이름을 생각했다.
이상하리만큼 특이한 마을도 있었고, 태어나면서 한 번도 듣지 못한 마을도 있었다.
“북, 북쪽에 있는 마을 이름이 뭐였지? 제기랄!”
“십 초 안에 대답 못 하면 지는 거야.”
“……키, 키발 마을이었다! 아닌가? 시, 시로 시작했나?”
“오 초 남았어. 빨리 결정해.”
“키, 키발 마을! 지도 확인해 봐, 분명 있어. 분명!”
로저의 말에 유릭은 바로 지도를 확인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저리도 이기고 싶을까?’
로저와 유릭이 게임 하는 걸 볼 때면, 삼 년에 한 번 최고의 수재를 가린다는 국제 경시대회를 참관하는 거 같았다. 그만큼 두 남자의 패기가 상당했다.
“제기랄…….”
오랜 대결 끝에 우승자는 유릭이었다. 로저는 분한 듯 씩씩거리더니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유릭을 무섭게 노려봤다.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유릭에게 유리했다. 무역 회사를 물려받을 후계자답게 그는 어렸을 때부터 국내 지명과 지도에 관심이 많았다.
“다른, 다른 게임 없어?”
뼈아픈 패배에 의욕이 올랐는지 로저가 말했다.
“좋아, 그럼 이번에는 상금을 거는 게 어때?”
“상금?”
“이긴 사람 소원을 들어주는 거야.”
유릭의 제안에 나와 로저는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한 게임이 연습이었다면 지금부터는 실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