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 4장. 원래 싸우면서 친해지는 법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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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 4장. 원래 싸우면서 친해지는 법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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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 4장. 원래 싸우면서 친해지는 법 (3)
2023.03.14.
이번에 할 게임은 누가 유리하고 불리한 것 없이 운으로만 결정되는 주사위 던지기였다.
“육! 육! 육! 육! 나왔다! 육!”
“안 돼. 이거 무효야. 주사위가 떨어졌잖아. 다시 던져.”
“그런 게 어딨어!”
근데 둘은 이 게임에 목숨을 걸었나, 자신의 말이 조금이라도 뒤처지면 안절부절못했다.
그 사이, 연속으로 높은 수를 던진 나는 저 두 소년을 제치고 골인 지점까지 들어갔다.
일등이었다. 승자가 나왔으니 게임은 분명 끝났다.
끝나야 정상인데.
“제발 육…….”
“제발…….”
게임이 끝난 건 나뿐이었다. 저들은 물 건너간 일등을 버리고 이등을 노렸다.
이등에 가까운 건 골인 지점까지 여섯 칸 남아 있는 로저의 말이었다. 이게 무엇이라고 로저는 기도까지 한다.
“던진다!”
로저 손안에 있는 주사위가 굴러졌다. 유릭과 로저는 빙그르르 도는 주사위에 온 집중을 쏟아부었다.
한참을 구른 주사위가 멈췄다 ……육이 나왔다.
“……이등이다! 이등이야!”
“…….”
눈에 띄게 기뻐하며 로저는 환하게 웃었다. 나라를 구한 듯한 표정과 함께 로저는 자신의 말을 골인 지점에 두었다. 그는 이 승리를 만끽했다.
유릭이 보드판을 엎기 전까지.
“무슨 짓이야!”
“다른 게임 해.”
“흥, 져서 기분 나쁘구나? 좋아. 다른 게임도 소원을 걸까? 응?”
우리 셋은 많은 게임을 했다.
공놀이, 카드 게임, 단어 맞추기 게임 등. 신기하게도 모두 내가 승리했지만 아무도 일등을 기억해주지 않았다. 늘 이등이 치열했다.
유릭과 로저는 서로 이를 갈며 이등이 되기 위해 기를 썼다. 그러다 결판이 나면 진 사람은 좌절하고, 승자는 두 손을 꽉 쥐며 몰래 좋아했다.
……모든 게임의 승자는 난데.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았다.
* * *
“더 이상 못 해.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무승부로 하고 말이야, 응?”
지쳤다.
소파에 앉아 어깨를 늘어트린 나와 달리 로저와 유릭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다른 게임 해!”
“좋아, 덤벼.”
괴물들.
게임 결과, 둘의 승률은 딱 반반이었다. 둘은 결판이 날 때까지 이 세상에 있는 게임은 다 할 셈이었다.
“이제 정리하자. 게임은 다음에 다시 하면 되잖아.”
내 말에 두 소년은 정색했다.
“싫어.”
“안 돼, 리제.”
“응, 그럴 줄 알았어. 그럼 여기서 소원을 하나 쓸게. 당장 게임을 그만하고 공작님이 오시기 전까지 체스 보드를 준비하자.”
소원이라는 말에 둘은 움찔했다. 로저와 유릭에게 미안하지만 나는 게임을 더 할 생각이 죽어도 없었다. 단 요만큼도.
정말로 끝난 게임에 둘은 어질러진 테이블 위만 바라보았다.
“어서. 로저는 나랑 같이 테이블을 치우고 유릭은 체스 보드를 가져오도록 해.”
“…….”
“…….”
둘은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디어 각자 할 일을 하기 위해 움직일 때였다. 체스 보드를 가져오기로 한 유릭도 계단으로 향하는데 얼마 못 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나와 로저를 한 번씩 쳐다보았다.
“왜 그래? 유릭.”
할 말이라도 있는 걸까, 내가 묻자 유릭이 다시 소파로 다가왔다.
“어디 있는지 까먹었어.”
“뭘?”
“체스 보드 말이야.”
“……?”
거짓말.
저건 백 퍼센트 거짓말이다.
마르센 가문인 나조차도 체스 보드가 펜턴 저택 어디에 있는지 알았다.
체스 보드는 이 층, 오른쪽 끝방인 작은 서재에 있다.
근데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얼굴에 철판을 깔고 도로 앉은 유릭을 보며 황당함을 감출 수 없었다. 그 틈에 테이블을 재빠르게 치운 로저도 소파에 앉았다.
“…….”
“…….”
“…….”
세 명이 말없이 침묵을 유지했다.
“그나저나 펜턴 공작께서 늦으시네? 오실 시간이 다 되었는데.”
내가 먼저 슬그머니 말을 꺼냈다.
“수도에서 진행하고 있는 체스 대회를 구경하러 가셨을 수도 있어. 오늘 키토 남작의 첫 번째 예선 대결이거든.”
“정말로? 몰랐어!”
“아버지께서 기보를 가져오실지도 몰라.”
벌써 예선경기가 시작되었구나!
“근데 그 키토 남작이란 사람 말이야. 수상한 사람은 아니지?”
로저는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 물음과 동시에 유릭의 표정이 딱딱해졌다.
“무슨 소리야?”
“아무리 리제, 쟤가 재능 있다고 하지만 갑자기 체스를 가르쳐준다고? 그리고 쟨 마르센 가문 자식이야. 평소 펜턴 가문과 마르센 가문의 사이가 나쁘다는 건 유명하잖아. 당연히 의심되지 않겠어?”
“키토 남작은 우리 아버지의 오랜 친구야.”
“그게 수상하다는 거야.”
로저는 특유의 예민한 성격을 드러냈다. 안 그래도 아슬아슬했던 둘의 사이가 대화로 인해 서서히 선을 넘어갔다.
“그러는 넌 누구야. 난 널 초대한 기억이 없는데?”
“리제 마르센이 같이 가자고 부탁해서 말이야.”
“그럼 키토 남작에 대한 의심을 지워. 그분은 리제를 가르치는 분이기도 해.”
“애초에 수상해서 같이 온 거야.”
도대체 왜 티격태격 되는 걸까.
“그만해. 로저, 유릭. 서로 사이좋게 지내자, 응?”
내가 좋게 말했지만 험악한 분위기가 사그라지지 않았다.
“리제. 이 애는 누구야? 내쫓아도 될까?”
“흥, 미안하지만 리제는 날 내쫓지 못해.”
유릭의 물음에 정신이 아찔했다. 두 소년의 시선이 나에게 고정되었다.
“리제.”
“리제.”
어떤 대답을 해도 곤란했다. 이렇게 곤란할 때는…….
“체스 보드는 내가 가져오는 게 좋을 거 같아. 서재에 있지? 가져올게!”
피하는 게 상책!
“지금 서재 문은 잠겨 있어, 리제.”
“그럼……어딘가에 있지 않을까? 그냥 내가 찾아볼게! 걱정 마. 막 방을 뒤지진 않을 테니까 말이야!”
그 어느 때보다 빨리 움직였다. 계단을 올라가고 나서 느긋하게 방을 살폈다.
문이 활짝 열려있는 유릭의 방을 발견했다. 슬프게도 그 방 책상에는 체스 보드가 번듯이 있었다.
생각보다 너무 빨리 찾았다. 뭉그적거리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슬며시 유릭의 책상을 살피는데 도서관에서 대출했는지 책 세 권과 인형이 하나 있었다.
유릭 취향에 들어맞는 곰 인형이었다. 귀여운 생김새와 달리 꽤 낡은 탓에 인형 몸 곳곳에 실밥이 어설프게 꼬여 있었다. 몇 번이나 실밥을 묶으려 했으나 번번이 실패한 듯싶었다.
‘내가 꿰매줄까?’
고민하다 어차피 시간도 남았겠다, 나는 바늘을 집었다. 하녀의 손길이 익숙하지 않아 몇 번이나 혼자서 옷을 꿰맨 적이 있었다.
저번 생에선 얼마나 꿰맸던가. 양말부터 시작해서 속옷, 교복, 일반 티셔츠까지. 안 꿰매어 본 옷이 없을 정도다.
능숙한 손길로 유릭의 인형을 하나씩 꿰맨 나는 처음에 뿌듯했다가 뒤늦게 후회가 밀려왔다. 물건을 함부로 건드렸다는 이유로 유릭이 화내면 어떡하지?
생각해보면 이상했다. 유릭은 하녀에게 이 인형을 꿰매어 달라고 부탁할 수도 있지 않나. 근데 부탁하지 않고 자신이 스스로 했다.
“생각을 좀 할걸.”
후회해도 늦었다. 결국 나는 책상 위에 놓인 공책 한 장을 찢었다.
[함부로 건드려서 미안해. 꿰맨 게 마음에 안 들면 똑같은 거 구해볼게. 정말로 정말로 미안해. -리제 마르센이-]
이 정도면 되겠지?
그 사이 유릭과 로저는 좀 친해졌을까?
원래 남자들은 싸우면서 큰다고 들었다. 이제 어느 정도 싸웠으니 친해질 때도 되었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방으로 나오는데,
“망할!”
“안 놔?!”
현관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심상치 않은 소리에 계단으로 향하자 치고받고 싸우는 두 사내의 모습이 시선에 들어왔다.
언제부터 싸웠는지 얼굴이 붉게 변한 로저와 유릭은 서로의 멱살을 잡고 있다. 그 정도가 심해 일하고 있던 하녀들도 급히 둘을 말릴 정도였다.
“……헉.”
큰, 큰일 났다.
“도대체 뭐 하는 거야?!”
급히 체스 보드를 내려놓고 둘에게 달려들었다. 로저와 유릭은 이를 악물며 한 대라도 더 때리기 위해 팔을 내밀었다.
“그만해! 그만하라고!”
나는 로저와 유릭 사이를 비집고 끼어들었다. 아무리 어린 소년이라 해도 남자는 남자인지 둘의 힘이 장난 아니다. 이러다가 죄 없는 내가 맞게 생겼다.
“리제, 비켜!”
“물러나 있어, 리제!”
절대 못 물러난다.
몸을 우거지로 집어넣은 나는 두 팔을 양옆으로 뻗었다. 둘의 몸이 떨어지자마자 곁에 있던 하녀들이 로저와 유릭의 팔을 붙잡았다. 다행히 두 사람을 떼어 놓는 것까지 성공했다.
“놔! 저 녀석은 키토 남작을 모욕했어!”
“모욕이라니! 난 그저 물어만 봤을 뿐이야! 세상에 믿을 사람 한 명 없으니까!”
“세상에 믿을 사람 한 명 없다니? 그래 놓고 리제를 따라왔어?”
“리제는……리제는 달라!”
떼어놓아도 저 주둥아리는 멈출 줄 몰랐다. 얼굴이 새빨개진 채 소리만 버럭버럭 지르는 둘 탓에 양쪽 귀가 얼얼했다.
“무슨 일로 어긋났는지 모르겠지만 대화로 풀자. 서로 오해했을 수도 있잖아.”
“흥, 쟤랑 대화로 풀어졌으면 이 꼴이 되지 않았겠지. 리제.”
자랑 아니야! 로저.
피식 웃으며 말하는 로저가 괘씸해 팔꿈치로 그의 복부를 가격했다. 근데 생각보다 꽤 세게 쳤는지 로저의 입에서 신음이 나왔다. 로저가 갑자기 털썩 주저앉았다.
“로저?”
너무 심했나? 혹 다친 건 아닐까 재빠르게 로저에게 다가가 그의 몸을 살폈다. 부산스러운 내 손짓과 다르게 뒤에서 유릭이 날 조심스레 부른다. 하지만 상황이 급해 반응하지 않았다.
“괜찮아? 로저?”
멍이 든 건 아닐까 셔츠를 드러내려 할 때, 로저의 신음도 끊겼다. 이상함을 느낀 나는 고개를 올려 로저의 뻔뻔한 얼굴을 보았다. 날 속인 거구나!
“……리제.”
“…….”
뒤에서 유릭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진짜 유릭을 화나게 했다.
나도 모르게 침을 한 번 꿀꺽 삼켰다.
“너한테 물을게.”
“…….”
“나야, 쟤야?”
뭐, 이런 질문이.
-드르륵.
그때였다. 나를 구원해줄 바퀴 소리가 들렸다. 몇 초 되지 않아 열리는 문틈 사이로는 펜턴 공작 모습이 나타났다.
“공, 공작님.”
“어? 리제? 놀러 온 거니?”
“네…….”
“마침 잘됐구나! 안 그래도 너한테 보여주고 싶은 게 있단……응? 처음 보는 이도 있는데.”
“……아, 제 친구예요. 로저 바커스라고 해요.”
로저를 대신해 내가 그를 소개했다.
“바커스? 익숙하구나. 혹시 오르가니스트 레지날드의 그 바커스 가문이니?”
“로저의 숙부시래요.”
“그럼 테너인 릭 바커스가…….”
“그분은 로저의 아버지…….”
“이런 우연이! 며칠 전 릭 바커스 연주회에 갔었는데, 매우 놀라웠단다!”
공작은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아까 펜턴 부인이 했던 말을 그대로 말했다.
펜턴 공작은 바커스 가문 얘기가 상당히 반가웠는지 말을 늘어놓았다.
“다 훌륭한 예술가지. 예술을 선보이고자 하는 노력과 재능이 특출나신 분들 말이다.”
“그, 그렇죠.”
“아, 근데 아내는 어디 가고…….”
얘기를 이어가던 펜턴 공작은 뒤늦게 시선을 돌려 제 아들을 보았다. 그는 유릭의 다친 얼굴을 보고 바로 표정이 굳어졌다.
“유릭! 얼굴이 왜 그러지?”
“……별거 아니에요.”
“별거 아니긴! 누구한테 맞은 얼굴인데. 내 아들을 때린 놈이 누구야? 응?!”
유릭이 로저에게 시선을 옮겼다. 무심코 그 시선을 따라간 펜턴 공작의 입이 벌어졌다.
“이, 이게.”
“전 말리려고 했는데요…….”
머쓱한 나머지 내가 말을 더듬는데 다시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장터에 갔던 펜턴 부인과 유네가 온 거였다.
“어머, 당신 왔네요? 근데……무슨 일 있었어요? 분위기가 왜 이래요?”
“누가 싸운 거 같아!”
부인과 유네는 단번에 싸한 분위기를 감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