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 4장. 원래 싸우면서 친해지는 법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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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 4장. 원래 싸우면서 친해지는 법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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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 4장. 원래 싸우면서 친해지는 법 (4)
2023.03.17.
“아주 사소한 것에 싸우다니. 둘이 너무 감정적이었구나. 그냥 말로 풀면 될걸.”
펜턴 공작이 말했다.
로저와 유릭은 더 싸우지 않았다. 그것뿐인가. 말도 섞지 않았고 서로를 쳐다도 보지 않았다. 이런 분위기를 풀기 위해 펜턴 부인은 요리를 마련해 우리들을 식탁에 초대했다.
“자리는 어떻게 앉죠?”
유릭이 물었다. 여기서 또 문제가 발생할 뻔했지만 다행히 펜턴 부인이 자리를 지정해주었다.
“정말 이렇게 앉아요? 부인?”
내 물음에 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리가 뭔가 이상했다. 내 맞은편에는 가운데 앉은 유네가 보였고, 양옆에 유릭과 로저가 있었다.
누가 보면 내가 펜턴 가문의 유일한 자식인 줄 알 거다.
“불편해도 좀 참아주렴, 리제.”
펜턴 부인은 내가 이곳에 앉는 게 모두의 평화를 지키는 일이라며 양해해달라고 부탁했다.
“이참에 로저와 유릭, 둘이 화해하고 친해지는 건 어떻겠니?”
“하지만 아버지. 저 애가 아버지를 모욕했어요.”
“모욕했다니! 모욕한 적은 없어요. 다만 제가 의심이 좀 많아서……!”
로저와 유릭은 크게 반응했다. 딱 봐도 서로 사과하기 싫은 눈치다.
“안 되겠구나.”
한숨을 내쉰 펜턴 공작이 이번엔 로저를 보았다.
“로저라고 했지?”
“……네.”
“왜 키토 남작을 의심했는지 알려줄 수 있겠니?”
로저는 잠시 망설였다.
“……그저 수상했어요. 아무 조건 없이 리제를 도와준다길래. 이상한 사람일까 봐 불안하기도 했고. 또 평소 펜턴 가문과 마르센 가문은 사이가 안 좋기로 유명하니까…….”
“이해한단다. 하지만 로저, 아까 너의 행동은 유릭이 기분 나빠 할만해. 물론 유릭 또한 너에게 못되게 굴었지만 말이야.”
“…….”
“그리고 로저, 네가 의심하는 것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지만 나와 키토는 리제를 진심으로 재능 있는 아이라고 생각한단다. 너도 리제의 체스 실력을 보면 알 거야. 그렇지 않니?”
펜턴 공작이 다정하게 말하자 로저는 입을 다물었다.
“제가 예민했던 거 인정해요.”
로저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슬그머니 고개를 올린 로저와 나의 눈이 마주쳤다. 그는 딱히 나에게 화가 난 거 같지 않았지만 문제는 유릭이었다.
사실 아까부터 유릭의 시선은 나에게 향해 있었다. 그 시선을 마주칠 때마다, 그는 나에게 아까와 같은 질문을 하는 거 같았다.
나야? 쟤야?
어떻게 누구 한 명을 콕 집어 고를까. 이건 ‘엄마가 좋아 아님 아빠가 좋아?’보다 더 어려운 질문이었다.
“전 이만 일어나볼게요.”
“하지만 유릭. 아직 많이 못 먹었잖니.”
펜턴 부인이 일어나는 유릭을 붙잡았다.
“오늘은 입맛이 없어요. 죄송해요.”
“그럼 유릭. 체스 보드를 가져다주겠니?”
펜턴 공작의 부탁에 유릭이 움찔했다.
“……아까 리제가 가져 왔을 텐데요.”
“하녀가 도로 치운 모양인 거 같구나. 그리고 그 체스 보드는 네 것이잖니. 서재에 있는 거로 부탁하마.”
유릭은 망설이다 결국 식탁 밖으로 벗어났다. 유릭의 빈자리가 분위기를 차갑게 만들었다. 로저는 억지로 음식을 입안에 집어넣으며 말을 피하려 했고, 유네는 여전히 로저를 낯설어하였다.
“로저, 그래도 자주 놀러 오렴. 네가 유릭과 친해졌으면 하구나. 유릭은 학교도 다니지 않고, 워낙 낯을 가려서 동성 친구가 없거든.”
“……노력해볼게요.”
공작의 말에 로저가 음식을 가까스로 삼키며 말했다.
“유릭이 널 마냥 싫어하는 건 아닐 거야, 로저. 애초에 유릭은 누군가와 대화를 잘 나누지 않거든. 다가가는 거조차 꺼려하지.”
“네…….”
“그래. 오늘은 유릭과 화해하는 게 힘들어도 이왕 놀러 왔으니 리제가 체스 두는 걸 구경하겠니? 나에 대한 오해를 풀고 싶기도 하고 말이야.”
펜턴 공작은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살짝 웃었다. 곧 서재에서 체스판을 가져온 유릭이 다시 식탁에 왔다. 그는 체스말과 체스판을 식탁에 올려둔 후 말없이 방으로 돌아가려 했다.
“유릭, 어딜 가는 거야? 리제와 내 체스를 구경하고 싶어 했잖아.”
“……전 딱히 그런 말 한 적 없는데요.”
유릭, 완전히 나한테 삐쳤구나.
“정말로? 리제도 네가 구경하길 바랄 텐데.”
펜턴 공작이 나를 흘끗 보자 유릭의 시선도 나에게로 향했다.
“……유릭, 네가 구경했으면 좋겠어. 그래주지 않을래?”
최대한 다정하고 정중한 투로 말했지만 마음은 조마조마했다. 그가 거절할까 봐 두려워서다.
“하아.”
유릭은 말없이 자리에 도로 앉았다. 그 행동 하나로 내내 무거웠던 마음이 그나마 가라앉았다. 그와 사이가 틀어지면 어쩌나 마음이 졸였는데 다행이다.
“고마워. 유릭.”
“게임이 궁금했을 뿐이야.”
그래, 그래.
“게임을 하기 전에 우선 선물을 주마.”
공작은 밑에 있는 가방에서 무언가 꺼냈다. 종이였다.
“오늘 키토와 상대방 대결의 표기란다.”
“아!”
로저와 유릭이 싸운 탓에 완전히 잊고 있었다.
“정말로 제가 가져도 돼요?”
“내 건 따로 있지.”
“감사합니다! 정말로 보고 싶었어요!”
공작에게서 기보를 건네받았다. 오프닝부터 상당히 치열하게 싸운 흔적이 보였다.
“상대방 f6나이트가 제거된 후 게임은 완전히 키토 것이 되었지.”
“처음부터 노린 거 같아요. 공격의 조건을 달성하기 위해서요.”
“그래. 그는 처음부터 이를 노리고 자신의 말을 희생시킨 후 승리를 가져갔어.”
키토 남작이 쓴 수는 상당히 어려운 전략이라고 했다. 근데 이 전략을 실제 게임에서 보다니!
“대단해요…….”
“오늘은 이 표기를 직접 따라 움직이면서 키토가 어떻게 승리를 가져갔는지 파악할 거다. 그리고 게임을 하는 게 어떻겠니?”
“상관없어요. 저도 그렇게 하고 싶어요!”
한동안 시간 가는 줄도 모른 채 기보에 정신이 팔렸던 난 고개를 들었다.
“……!”
“……?”
로저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러자 로저는 급히 시선을 돌렸다. 어딘가 불편한 표정이었다.
* * *
“여기 나이트를 보겠니? 이것도 놀라운 수인데 말이야…….”
총 두 시간가량 펜턴 공작과 오늘 치러진 키토 남작의 기보를 살폈다.
펜턴 공작은 내가 발견하지 못한 수를 하나하나 알려주며 상세히 설명했다. 그럴 때마다 키토 남작에게 경외심이 들었다.
“하암.”
“……?”
하품 소리가 내 집중력을 깨트렸다.
“아, 죄송해요…….”
실수로 하품을 하다 들킨 로저가 서둘러 사과했다. 민망하고 창피한 지 몇 번이나 헛기침을 터트리기도 했다.
그제야 로저와 유릭이 곁에 있음을 알아챘다. 로저는 표정에 생기가 없었고 유릭도 무표정으로 손가락을 소리 없이 튕기고 있었다.
여태 체스에 정신이 팔려 둘에게 소홀했던 내가 더 미안했다.
“아, 시간이 생각보다 많이 지났구나.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 리제. 대결까지 했다가는 저녁이 되어서 끝날 거 같다.”
“네, 괜찮아요.”
나와 공작은 체스 보드를 정리했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유릭도 도왔다.
“고마워, 유릭. 근데 유네는 웬일로 조용하네?”
“……자고 있을 거야.”
유릭은 여전히 가시 돋은 말투로 말했다. 아직 화가 풀리지 않은 거겠지.
“유릭, 저번에 내가 사준 보드게임을 하는 게 어떻겠니? 유네와 한 번 하고 말았잖아.”
“그다지 하고 싶지…….”
“이참에 해보렴. 기껏 사다 주었는데 안 하면 선물한 내가 아쉬울 테니까.”
유릭과 화해하고 싶은 내 마음을 알아차린 듯 공작이 제안했다. 유릭은 귀찮아했지만 아버지 부탁에 반항하지 못했다.
“찾으려면 시간이 걸릴 거예요. 어디 있는지 까먹었거든요.”
“아주 짐짝 취급한 모양이구나.”
“오해세요.”
유릭은 한마디 던진 채 무거운 발걸음을 움직였다.
“자, 그럼 나는 남은 일을 하러 갈까? 편히 있다 가렴. 로저, 리제.”
공작은 남은 일을 처리한다는 이유로 서재로 들어갔다.
나란히 소파에 앉은 로저와 나는 말 없이 앞에 있는 생크림 케이크를 먹었다. 배가 불렀지만 달콤한 맛 덕분에 잘 들어갔다. 로저도 먹는 것에 정신이 팔렸는지 말이 없었다.
한동안 조용히 케이크만 먹다가 고개를 들자 로저와 눈이 마주쳤다.
“……체스는 재미 있었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얘기하더라.”
로저가 뜸을 들이다 물었다.
“응. 너도 바이올린을 연주할 때 그렇지 않아? 난 체스를 둘 때 그래. 상대방의 킹을 어떤 식으로 궁지에 몰까 생각하면 꽤 짜릿하거든.”
“악마.”
“그런 게임인 걸 어떡해?”
“……미안해.”
로저가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갑작스러운 사과에 쥐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았다.
“뭐가? 악마라고 한 거?”
“……내, 내가 예민하게 군 거 말이야.”
예민하게 군 거? 이해할 수 없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건 나한테 사과할 게 아니라 유릭한테 사과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놈이 나한테 먼저 주먹을 내밀었어.”
“그럼 왜 나한테 사과하는 거야?”
“그냥……네가 체스를 무척이나 좋아한다는 걸 느껴서 말이야.”
새삼?
“너 어디 아파?”
“그게 아니라! 네가 키토 남작을 얼마나 존경하는지……알 거 같아서. 근데 난 너의 선생님을 욕했잖아.”
케이크를 저 멀리 밀어두고 로저를 쳐다봤다. 그는 입술을 계속 달싹이다 끝내 말을 꺼냈다.
“나도 너처럼 존경하는 교수님이 계셨어. 바이올리니스트셨지. 날 가르쳐주신 분이셨고.”
“정말? 누군데?”
“……다르다 바샹.”
그가 꺼낸 이름에 놀라 입이 벌어졌다. 다르다 바샹이라면 바이올린이나 음악에 무지한 나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천재적인 바이올리니스트이자 황궁 음악단 소속이기까지 한 사람.
하지만 그것을 별개로 내가 그 이름을 기억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설마, 내가 아는 그 다르다 바샹?”
“맞아.”
학대와 폭행 및 사기.
자신의 제자들이나 바이올린 유망주를 학대했다는 의혹이 서서히 불거지며 일이 커졌던 사건이다.
한 명의 고발자가 나오자 여러 명의 고발자가 등장했고, 그는 완전히 예술계에서 파문당했다.
천재적인 바이올리니스트가 범죄를 저질렀다는 건 충격이었지만 더 큰 충격은 그 대상이 제자였다는 점이었다.
근데 지금 내 앞에 있는 소년이 자신이 다르다 바샹의 제자였다고 방금 막 밝혔다.
“……그를 존경하고 그처럼 훌륭한 바이올리니스트가 되고 싶어했지.”
“…….”
“그래도 난 양호한 편이었어. 내가 예술가 가문의 후계자이기도 했고, 유명한 아버지와 친척들이 곁에 계셔서인지 그놈이 쉽게 안 건드렸거든.”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몇 번 언행이 심하긴 했지. 그땐 몰랐지만 다 밝혀지고 나서야 알겠더라고.”
로저가 어떤 기분이었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아무 일도 겪지 않은 나조차도 충격에 뒤통수가 얼얼했다.
“이후로 나는 혼자 바이올린을 연습했어. 그 누구도 믿지 않고. 재능 있는 날 자신이 키워보겠다고 하는 이들이 많았지만 말이야. 다 거절했지.”
“로저.”
“결코 다르다 바샹처럼 되고 싶지 않았거든. 어떤 목적을 가지고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어. 이를 증명하기 위해 난 다시 붙잡은 거야. 활을.”
자신이 이루어야 하는 바를 확고하게 정했다. 나는 대뜸 나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쳐준다던 로저의 말이 떠올랐다. 이 또한 자신과 다르다 바샹이 다르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였을까?
“됐어. 이제 이 얘긴 안 할래. 기분만 불쾌할 뿐이야.”
로저는 말을 돌렸다.
“……내가 증명해줄게.”
“뭐?”
슬며시 입을 열었다.
“나는 너한테 바이올린을 배우고 있잖아. 그러니까 잘 배워서 사람들에게 증명해줄게. 너는 나에게 바이올린 연주의 즐거움을 가르쳐주었다고.”
“……무, 무슨 소리야.”
“농담 아니야. 절대 남들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자랑이 되도록 할게. 자랑스러운 제자, 자랑스러운 친구. 그 뭐든 말이야.”
“……마음대로 해.”
그 말뿐이었다.
“좋아, 다 오해였으니까 이제 유릭과 친해지는 건 어때?”
“왜 말이 거기로 빠져?”
로저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어째서냐니, 둘은 꽤 잘 어울렸다. 성격만 봐도 그렇다.
한 명은 모든 일에 매사 냉정하고 남들의 시선을 중요하게 여겼다. 다른 한 명은 감정을 잘 드러내고 남들에게 자신을 뽐내려 했다. 그러니 둘은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잘 메꿔주지 않을까.
그때 이 층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손에 보드게임이 아닌 인형을 쥐고 있는 유릭이 서 있었다.
“뭐야. 저 인형은.”
내가 꿰맨 인형이다. 역시 인형을 멋대로 만져 완전히 화가 난 걸까?
“유, 유릭. 그게……!”
황급히 사과하려고 했는데 내가 말을 잇기도 전에 유릭이 덥석 날 안았다.
“……으응?”
“리제.”
그는 나에게 단단히 삐쳤을 때와 달랐다.
“뭐 하는 거야?!”
유릭은 옆에 있는 로저의 윽박을 무시하고 날 자신의 품에 더 가두었다.
“리제, 내가 잘못했어. 내가 괜히 심통이 나서……. 넌 항상 날 배려해주고 있는데 말이야.”
“뭐?”
“미안! 앞으로, 앞으로 욕심내지 않을게. 그러니까 날 미워하지 말아줘……!”
설마, 지금 인형 꿰매줬다고 이러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