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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 4장. 원래 싸우면서 친해지는 법 (5) (23/47)


23 # 4장. 원래 싸우면서 친해지는 법 (5)
2023.03.21.


내가 한 일이라고는 실밥이 풀린 곰 인형을 꿰맨 것뿐이다.


‘유릭이 싫어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괜한 걱정이었나 보다.


“저, 유, 유릭. 숨이 막혀…….”

나를 꽉 안는 유릭으로 인해 이러다 숨막혀 죽는 건 아닐까 싶었다.

유릭의 가슴팍을 밀어보았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이를 멍하니 지켜보던 로저는 나와 유릭을 떼어놓았다.


“이제 그만 해! 떨어져!”

로저가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유릭이 그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로저도 두 살이나 많은 유릭에게 지지 않았다.


“싸우지 마! 로, 로저. 너 내 소원을 잊은 건 아니겠지?”

싸움이 또 일어나기 전에 내가 다급히 말하자 로저는 화를 단번에 누그러뜨렸다.


“소원이라니?”

유릭이 자신만 모르는 얘기에 불만을 내뱉었다.


“아까 내가 게임에서 이겼잖아. 그래서 소원을 로저에게 말했거든.”

“왜 저 녀석한테만 말해?”

“너와 로저가 싸우지 않고 조금 원만해졌으면 하는 소원을 빌었어.”

유릭은 소원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찌푸린 눈살을 지우지 않았다. 힘들게 풀린 분위기인데 그깟 소원 하나로 일을 망칠 순 없었다.


“좋아! 소원은 다른 거로 할게.”

내 말에 둘은 기다렸다는 듯 날 빤히 쳐다보았다. 둘이 친해졌으면 하는 욕심은 버려두자. 어차피 저 둘의 사이가 완만해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내가 둘 중 하나와 사이가 나빠지지 않은 한, 둘은 자주 마주칠 테고 그럼 미운 정이라도 들 거다. 미운 정. 그게 얼마나 무서운지 둘은 모르겠지.


“리제, 뭐든 들어줄게. 소원이 뭐야?”

“난 가능한 것만 들어줄 수 있어. 힘든 건 절대 안 해.”

고민했다. 사실 빌고 싶은 소원이 하나 있긴 하나 과연 이 둘이 들어줄 수 있을까.


‘그래. 어차피 어린 애들인데 적당히 작은 소원을 말해야지.’

말하고 싶은 소원은 고이 접고 간단한 것을 생각했다. 어떤 소원을 빌까? 저 둘이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는 작은 소원이어야 한다. 또 기대하는 눈빛으로 날 바라보는 두 사내를 만족시켜야 했다.


“……그래. 어깨를 주물러줘!”

목을 빼고 체스 보드를 보느라 어깨와 목이 걸렸는데 마침 잘 됐다. 소원을 적절하게 잘 정한 거 같아 뿌듯함을 느꼈다. 나, 솔로몬이 아닐까?


“정말 그거면 돼? 소원이 아니더라도 난 하루 종일 네 어깨를 주물러 줄 수 있어.”

소원을 빌자마자 유릭이 토를 달았다.


“너무 소박한 거 아니야? 나 같으면 당장 금부터 캐 달라고 했겠다.”

로저도 실망했다. 도대체 얘네들은 어떤 소원까지 생각하고 있었던 거지? 지금 저 둘의 표정만 보면 집 하나 사달라고 해야 만족할 기세다.


“그래서 안 들어 줄 거야? 내 소원인데?”

내가 실망한 투로 말하자 로저와 유릭이 단숨에 내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로저는 왼쪽 어깨를, 유릭은 오른쪽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시원하긴 하였으나 힘의 강도가 극과 극이었다. 로저는 약했고, 유릭은 아팠다. 또 로저는 엄한 곳만 주물렀고, 유릭은 아프고 연약한 곳만 노렸다.


“유, 유릭! 거긴 너무 아파!”

“아, 미안해.”

유릭은 내 비명에 놀라 바로 어깨에서 손을 뗐다. 그러자 로저가 피식 웃었다.


“잘 좀 할 수 없어? 리제가 아파하잖아.”

“로저, 너는 너무 약해. 좀 더 세게 주물러줘.”

“아, 이렇게?”

“좀 더.”

로저가 손에 힘을 더 넣었다. 이번에는 유릭이 혀를 찼다.


“너나 잘 좀 해. 리제가 만족하지 못하잖아.”

“뭐? 나도, 나도 열두 살이면 강하게 할 수 있어!”

또, 또. 둘이 싸운다.


“어머, 둘이 리제의 어깨를 주무르고 있구나.”

펜턴 부인은 찻잔을 들고 소파에 앉았다. 부인의 눈에는 내 어깨를 주무르며 투닥투닥 싸우는 두 명의 사내 모습이 퍽 사이좋아 보였나 보다. 부인의 얼굴엔 미소가 계속 걸려 있었다.

유릭과 로저가 몇 분 정도 내 어깨를 주물렀을까.


“이 정도면 된 거 같아. 둘 다 고마워.”

정말로 시원했다. 걸렸던 어깨가 조금은 풀려 상당히 만족스러웠는데 둘은 아닌 모양이다.


“그럼 다음 소원은 뭐야?”

“다음 소원을 말해 봐.”

 

 
응? 다음 소원이라니? 유릭과 로저의 말에 나는 당황했다.


“바보야? 너 게임 다섯 번 이겼잖아. 그러니까 소원도 다섯 개지.”

로저의 말에 나는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얼얼했다. 그러니까 앞으로 또 적절한 소원을 네 개나 더 생각해야 한다고?


“리제, 이번엔 어깨 주무르기 같은 거 말고 더 하고 싶은 걸 말해 봐.”

유릭은 친절하고 다정한 말투로 나에게 큰 고민거리를 내주었다. 앞에 앉아 있는 펜턴 부인도 내 소원이 궁금한지 찻잔을 내려놓았다.

……이건 벌칙 아닐까.

진짜 엄청나게 부담된다. 이번엔 팔을 주물러 달라고 할까? 하지만 유릭과 로저가 실망할지도 모른다. 저 둘은 내가 근사하고 거창한 소원을 말하길 고대했다.

정말로 금을 캐달라고 해 봐?


“말해 봐. 정말로 저 녀석 말대로 금을 원하는 거면 그 이상의 가치를 가진 물품을 줄 수 있어.”

“흥, 물품이라니. 난 어머니께 말해서 정말로 금을 줄 생각이라고.”

미친놈들. 금 얘기는 절대 꺼내지 말아야겠다.

어떤 소원을 빌까, 하다 아까 말하지 못했던 소원 하나가 떠올랐다. 단언컨대 금을 달라는 소원보다 나을 터다.


“……저 사실은.”

내가 운을 떼자 모두 귀 기울였다.


“바다에 가고 싶어요.”

“바다?”

갑자기 나온 바다 얘기에 로저가 되물었다.


“지금은 겨울이잖아. 바다에 들어갔다가 얼어 죽을걸?”

“들어가고 싶다는 게 아니야. 보고 싶다는 거지.”

내 말에 로저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로저의 말대로 겨울 바다는 춥고 들어갈 수 없었지만 색다른 분위기가 있었다. 가령 파도 부서지는 소리가 더 섬세하게 들린다거나 아니면 고요하다거나.

대한민국에 있었을 때 가끔 강원도로 가는 버스표를 끊어 동해를 보러 갔었다. 아무도 없는 겨울 바다를 보면 마치 마음에 있는 모든 짐을 내려놓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겨울 바다가 문뜩 그리웠다.


“가자.”

유릭이 침묵을 깨고 말했다.


“응?”

“리제, 바다를 보러 가자.”

그는 나의 눈을 보며 한번 더 말했다.


“그래, 겨울 바다라니 좋구나. 이참에 내가 껴도 괜찮겠니? 대신 마차를 빌려주마.”

“……정말요?”

내가 묻자 펜턴 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리제. 네가 허락해준다면 말이야. 빵과 음료수도 준비해둘게.”

“가고 싶어요! 갈래요!”

어떻게 거절할 수 있을까? 내가 흥분하며 말하자 부인은 작게 웃으며 일정을 확인하기 위해 서재로 향했다. 혹시나 해서 말한 소원이 이루어지고 있자 나는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근데 어떻게 가려고?”

로저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세벨의 눈을 어떻게 피할 거냐는 뜻이었다.


“로저.”

“왜?”

“……너도 같이 가면 안 될까? 네가 간다면 어머니께서 허락해 줄 거야.”

내가 간곡히 부탁하자 로저가 팔짱을 꼈다. 그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냉정하게 현실을 파악했다.


“내가 간다고 해도 문제야, 리제. 부인께서 열 살인 우리 둘이 바다에 간다고 하면 그냥 보내주실까? 설령 허락해주신다 해도 내 어머니가 따라오실걸.”

“바닷가에 간다는 말은 안 하면 되지!”

“아침 일찍 갔다가 밤에 돌아올 텐데?”

나한테 다 생각이 있었다. 요 십 년간 화장실을 들른 것보다 자주 한 것이 거짓말이었다. 이 정도 난관도 못 헤칠까.


“한 달 뒤에 호샤 마을에서 캠프가 열리는 거 알아? 어린이 캠프 말이야. 지금 참여자를 모집하고 있어. 하루 동안 서쪽에 있는 천문학자 저택으로 가 우주에 대해 듣고 오는 일정이지.”

“그게 뭐 어쨌다고?”

“그 캠프에 간다고 거짓말하면 되는 거야.”

“또 거짓말을 하라고?”

로저가 질색했다.


“내 소원이야! 나머지 소원은 이곳에 쓸게!”

“…….”

소원이라는 말에 반박하지 못한 로저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갈등하던 그가 곧 고개를 끄덕이자 나도 모르게 활짝 웃었다.


“리제, 잘 됐다. 바다에 꼭 가자.”

유릭이 나의 손을 붙잡았다.


“응!”

“바커스, 넌 괜히 거짓말을 들켜서 리제 곤란하게 하지 말고 처신 잘해.”

“내, 내가 언제 거짓말 들켰다고! 나 거짓말에 재능 있어!”

거짓말.

어쨌든 기분이 최고였다. 벌써 바닷가에 있는 기분에 가슴이 몽글몽글해졌다. 맛있는 빵을 먹고 겨울바람을 느끼고, 푹신푹신한 모래 위에 맨발을 두며 노는 것.

모든 게 기대되었다.


 

* * *



“캠프? 매년 열리는 우주 프로젝트 캠프 말이니?”

캠프에 대해 설명할 필요 없이 이세벨은 캠프에 대해 알고 있었다.


“네. 안 될까요?”

“네가 언제부터 천문학에 관심이 있었다고 갑자기 캠프니?”

“그, 그게……이 나이대는 다 우주에 관심이 있잖아요! 미지의 세계니까요!”

물론 거짓말이다. 나는 우주에 관심이 없었다.


“로저와 같이 가기로 했어요.”

“로저와?”

제발 먹혀라, 제발 먹혀라. 나는 속으로 애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한 달 뒤요.”

이세벨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평소보다 심각한 그녀의 얼굴에 역시 먹히지 않은 걸까 싶었다.


“우주에 관심이 있다고?”

“네? 네! 멋, 멋지잖아요!”

“……이번만 봐주마. 괜한 짓 하지 말고 다녀오렴. 대신 로저와 꼭 붙어 다녀야 해.”

이세벨의 말에 나는 속으로 ‘할렐루야!’하고 외쳤다. 그녀의 말이 바뀌기 전 빠르게 방 밖으로 나와 주먹을 꽉 쥐었다. 성공이었다.


‘가는 거야! 바다에!’

어서 한 달이 지났으면 했다.

* * *

그날 밤, 유릭은 늦은 저녁까지 잠들지 않고 조용히 소원을 빌었다. 원인은 갑자기 굴러들어 온 망할 로저 바커스 때문이었다. 리제와 동갑이라는 공통점 하나로 그녀의 옆에 진득하게 붙어 있는 놈이 유릭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근데 로저는 독점욕과 승부욕도 강했다. 자존심도 어찌나 강한지 자신이 아무리 때려눕혀도 주저앉지 않는다. 그래서 유릭은 로저가 더 싫었다. 이제는 그의 얼굴만 보면 확 때려주고 싶을 정도였다.


‘제발 감기에 걸리게 해주세요. 그 로저 바커스가요!’

유릭은 당연히 로저와 같이 바다에 가고 싶지 않았다. 심지어 로저와 하룻밤을 보내야 한다니 그건 유릭에게 지독한 일이었다. 그 이유로 유릭은 한 달 뒤 로저 바커스가 감기에 걸렸으면 좋겠다고 소원을 빌다가


‘아, 아니. 잘못 빌었어요! 그놈, 아니 로저 바커스가 건강했으면 좋겠어요!’

그가 바다에 가지 못하면 리제 또한 바다에 가지 못하기 때문에 소원을 철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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